말넋 9. 봄제비와 봄들꽃
― 고운 생각에서 태어나는 고운 말

 


  제비는 철새입니다. 철 따라 둥지 틀 자리를 새로 찾아서 날아다니기에 철새입니다. 참새는 텃새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한 곳에서 보금자리를 틀어 살아가기에 텃새입니다.


  고흥 시골집에 봄날 제비가 찾아듭니다. 지난해에는 4월 봄에 찾아들더니, 올해에는 3월 봄에 찾아들어요. 올해에는 참 일찍 오는군요. 왜 이리 일찍 오는가 알쏭달쏭합니다. 이 나라 날씨가 차츰 따스해지니까, 아니 더워지니까, 제비도 일찍 찾아올까요.


  아침에 째째째째 하는 소리를 들으며 제비가 찾아온 줄 깨닫습니다. 지난해에는 들마실을 하며 제비 날갯짓을 처음 만났고, 올해에는 우리 집 처마 밑 둥지에서 지난해 알을 깐 제비 세 마리가 노니는 모습을 보며 제비 노랫소리 새삼스레 느낍니다. 그래, 이제 너희가 이곳에서 짝을 찾아 알을 낳고 새끼 돌보려 한다면, 똥받이를 달아야겠구나.


  제비가 둥지에서 새끼들 똥을 받아 밑으로 버리니, 똥을 받아낼 나무판을 대야 합니다. 제비똥 받는 나무판이니, 말 그대로 똥받이입니다. 똥받이를 대지 않으면, 처마 밑은 온통 똥바다가 돼요.


  제비가 봄에 찾아오니, 봄철을 일컬어 제비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비가 찾아드는 이맘때는 꽃이 바야흐로 피어나는 철이기에, 봄철은 꽃철이라 달리 일컬을 수 있습니다. 재미나게 말을 엮는다면, 봄제비철이나 봄제비꽃철이나 봄꽃철이나 봄꽃제비철처럼 새 낱말 지을 수 있어요. 봄날 봄꽃 마실을 누리는 사람은 봄마실을 하는 셈이요, 봄꽃마실 즐기는 셈입니다. 봄에 피는 꽃이기에 봄꽃이면서, 봄들꽃이라 할 수 있어요. 멧골에서 피는 봄꽃은 봄멧꽃이라 해도 어여쁩니다.


  봄에는 그야말로 온통 봄입니다. 봄바람, 봄꽃가루, 봄구름, 봄하늘, 봄볕, 봄나무, 봄밭, 봄노래, 봄새, 봄아이, 봄놀이, 봄들, 봄바다, 봄밥, ……. 여름에는 여름바람을 비롯해서 여름밥까지 있고, 가을에도 겨울에도 새삼스러운 하루를 누리면서 새로운 이름 하나 얻습니다.


  내 곁에서 사랑을 속삭이며 서로를 지키는 짝꿍은 곁지기이면서 옆지기입니다. 곁에 있어 곁지기요, 옆에 있어 옆지기입니다. 책방을 지키는 일꾼은 책방지기요, 도서관을 지키는 일꾼이라면 도서관지기입니다. 나라를 보살피는 일꾼은 나라지기라 할 만하고, 겨레 삶을 북돋우려 하는 일꾼은 겨레지기라 할 수 있어요. 문화를 가꾸는 일꾼은 문화지기요, 교육을 살찌우는 일꾼은 교육지기입니다. 은행지기, 가게지기, 식당지기, 마을지기, 학교지기처럼 ‘-지기’라는 말마디로 말샘을 퍼올리면 즐겁습니다. ‘-지기’를 더 헤아리면, 하늘지기, 흙지기, 시골지기, 사랑지기, 꿈지기, 이야기지기처럼 남다른 지기를 생각할 수 있고, 노래지기, 아이지기, 책지기, 웃음지기처럼 여러 갈래로 생각을 넓힐 만합니다.


  1989년에 처음 나온 《우리글 바로쓰기》(이오덕 씀,한길사 펴냄)라는 책을 찬찬히 되읽습니다. 이 책을 쓴 이오덕 님은 “훌륭한 문학의 업적을 남긴 분도 아이들에게 잘못된 말을 가르쳐 우리 말을 병들게 했을 경우, 그 잘못을 드러내어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13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 그렇습니다. 아무리 훌륭하다 싶은 문학을 일군 분이라 하더라도, 알맞지 못하고 바르지 못하며 슬기롭지 못한 글을 써서, 엉뚱한 글투를 퍼뜨리고 만다면, 이 대목은 나무랄밖에 없어요. 나무라면서 바로잡거나 바로세워야지요. 알맞고 바르며 슬기로운 말과 글이 되도록 힘쓸 노릇입니다. 이오덕 님은 “통속적이 아닌 말, 고상한 말을 표준말로 삼는다고 중류사회의 말을 쓰다 보니 농민의 말, 민중의 말은 ‘통속적인 말’로 버림받고, 사전에까지 ‘통속적’이라 풀이해 놓는 것 아닌가(18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을 여러 차례 되읽고 곱읽으면서 생각을 갈무리해 봅니다.


  봄날 피는 봄꽃 가운데 맨 먼저 피는 꽃은 ‘봄까지꽃’이에요. 늦겨울에 처음 꽃봉오리 터뜨리고, 봄이 저물 무렵 꽃도 저물기에, 참말 봄까지만 피는 꽃이라서 ‘봄까지꽃’이라고 해요. 그러나, 퍽 많은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식물학자한테서 식물학 배운 한국 식물학자가 일본 풀이름을 고스란히 옮겨서 퍼뜨린 ‘개불알풀꽃’이라는 낱말을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일제강점기 찌꺼기라 할 꽃이름을 바로잡자고 여러 사람이 애썼는데, 그만 어느 시인이 ‘봄까지꽃’ 말밑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봄까치꽃’이라 시에 잘못 쓴 적 있어요. 봄과 까치가 잘 어울려서 ‘봄까치꽃’인 줄 잘못 알았다고 하지요. 이리하여,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 꽃이름을 옳게 모르는 채, 오늘날까지 ‘개불알풀꽃’과 ‘봄까치꽃’이라 잘못 쓰는 사람 퍽 많습니다. 언제쯤 봄꽃 이름 하나 살가이 건사할 수 있을까요.


  봄까지꽃이 피고 나면 곁에서 별꽃이 피어요. 별을 닮아 별꽃이라 하는데, 별꽃은 별꽃나물이라 하기도 해요. 별꽃이 피면, 이윽고 코딱지나물꽃이 피어요. 시골사람은 코딱지나물꽃이라 하고, 식물학자는 이런 이름이 ‘통속적’이라 해서 ‘광대나물꽃’이라고 꽃이름을 다르게 붙였어요. 국어사전을 뒤적이면 ‘광대나물’이라는 이름만 오르지, ‘코딱지나물’이라는 이름은 못 올라요.


  ‘애호박’은 작은 호박이라서 애호박입니다. 서울에는 애오개라는 데가 있는데, 작은 고개라서 애오개입니다. 그러나, 애오개가 작은 고개인 줄 미처 살피지 못한 예전 지식인들은 ‘아현동’이라고 동네 이름을 한자로 옮겨적으면서 ‘阿峴’이라 붙였어요. 왜 한겨레가 예부터 익히 가리키던 땅이름으로 동네 이름을 붙이지 못할까요. 골안마을, 무너미마을, 한티재 같은 이름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쓰면서, 땅이름을 비롯해서 먼먼 옛날 사람들 넋을 돌아본다면 역사와 문화와 삶을 한결 슬기롭게 돌아볼 수 있을 텐데요.


  고운 생각에서 고운 말이 태어난다고 느낍니다. 고운 사랑에서 고운 이야기 자란다고 느낍니다. 먼 옛날 옛적 누군가, ‘풀’, ‘하늘’, ‘보리’, ‘꿈’, ‘아이’, ‘빛’, ‘누리’, ‘무지개’ 같은 낱말을 어떤 사랑으로 지었을까 가만히 헤아립니다. 오늘 이곳에서 내가 사랑 하나로 빚을 새로운 말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4346.3.2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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