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학교
이윤기 지음, 북디자인 정병규, 정재규 그림 / 민음사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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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32

 


글에 담는 삶
― 어른의 학교
 이윤기 글
 민음사 펴냄,1999.4.10./7000원

 


  이윤기 님이 1999년에 내놓은 산문책 《어른의 학교》(민음사)를 201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장만해서 읽습니다. 이 책은 1999년에 처음 나왔지만, 나는 2013년 오늘 처음 만나니, 나로서는 ‘2013년 새 이야기’로 이 책을 읽습니다.


.. 집에서는 머리띠라는 것을 하고 지냈습니다. 근 20년 전에 광화문 육교 위에서 2백 원을 주고 산 플라스틱 머리띠는 여느 머리띠와는 다른 반달꼴 얼레빗입니다. 나는 두 손으로 이 반달꼴 얼레빗의 끄트머리를 하나씩 잡고 머리를 빗어 뒤로 넘기고는 마지막으로 정수리에다 꽂아 둡니다. 이렇게 해야 머리카락이 제자리에 붙어 있습니다. 나는 가까운 나들이 때는 곧잘 이 머리띠를 꽂은 채로 나다니기도 합니다 ..  (11쪽)


  책 첫머리에 머리띠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윤기 님은 머리띠 이야기를 쓰기는 하지만, 이 글을 쓸 무렵에는 머리카락이 짧습니다. 머리띠 하고 다니기 번거롭다며 짧게 깎았다고 합니다.


  머리카락이 길면 번거롭다 싶을 때가 있겠지요. 그런데, 머리카락이 짧아도 번거롭다 싶을 때가 있어요. 머리카락은 날마다 자라니, 언젠가 다시 긴머리가 되어요. 머리카락이 짧아서 가볍다 하더라도 틈틈이 머리를 깎으러 다녀야 합니다. 머리카락에 제법 긴 겨를을 내주어야 합니다.


  머리카락이 길더라도 고무줄로 묶고 머리띠로 누르거나 머리끈으로 착 조이면, 머리카락이 더 자라건 말건 아랑곳할 일이 없습니다. 아니, 머리카락이 긴지 짧은지 생각하지 않아요. 내 마음은 다른 데로 뻗어요. 머리카락이 짧더라도 틈틈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손질해야 하니, 자꾸자꾸 머리카락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내 둘레 사람들은 나더러 머리카락 길어서 번거롭지 않느냐 묻곤 합니다. 나는 빙그레 웃습니다. 내 둘레 사람한테 도로 여쭙니다. “머리카락 짧아서 번거롭지 않으셔요? 머리카락 자르려고 이발소 자꾸자꾸 가셔야 하잖아요?”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머리를 깎아 보았는지 안 떠오릅니다. 나는 길을 가며 이발소나 미장원이 있어도 따로 느끼는 일 없습니다. 나는 머리집 들어갈 일 없고 생각할 일 없습니다. 나는 길을 가면서 나무가 얼마나 있고, 나무가 얼마나 큰가를 살핍니다. 길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어떤 숨결이고, 잎사귀가 얼마나 푸른지 헤아립니다. 길가 나무는 나뭇가지 안 잘리는지, 나뭇가지 잘린 나무라면 이 나무가 얼마나 아플까 하고 생각합니다.


.. 농부가 흙을 걸우듯이 사람도 나날이, 자신을 걸웁니다. 사람은, 필경은 흙이 될 운명을 타고 나서 그런 것일까요 ..  (35쪽)


  두 아이를 데리고 마실을 다닐 때에는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몰거나 군내버스를 탑니다. 내 둘레 사람들은 나한테 묻습니다. 자가용 있으면 아이들 데리고 다니기에도 좋고, 먼 데까지 마실 다닐 수 있지 않겠느냐고. 나는 또 빙그레 웃습니다. 그러고는 도로 여쭙니다. “자동차 있어서 오히려 멀리 못 가지 않나요? 자동차 때문에 정작 가고 싶은 데 못 가지 않나요?”


  자동차를 끌고 숲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자동차를 몰면서 숲바람 쐴 수 없습니다. 자동차를 탄 몸으로 숲내음 맡거나 햇살내음 마시지 못합니다. 자동차를 몰 적에는 아이들 얼굴 바라볼 수 없습니다. 자동차 손잡이를 붙잡느라 아이들 손 잡을 겨를 없습니다.


  나는 자동차를 사귈 마음 조금도 없습니다. 자동차하고 사귀면, 그때부터 아이들하고 놀지 못하고, 책이랑 놀지 못하며, 호미를 손에 쥘 수 없거든요. 나는 아이들하고 부대끼고 싶습니다. 나는 책을 만지고 싶습니다. 나는 흙숨을 쉬고 싶습니다.


.. 사전을 열면 말의 역사가 보입니다. 그런데도 번역가는 사전 안 펴고 어물쩍 넘어가고 싶다는 유혹과 하룻밤에도 수십 번씩 싸워야 합니다 ..  (115쪽)


  나는 종이로 된 사전을 즐겨 씁니다. 내 곁에는 종이로 된 사전이 천 가지 즈음 있습니다. 한국말로 된 사전이 있고, 외국말로 된 사전이 있습니다. 1940년대 것부터 2000년대 것까지 골고루 있습니다. 조그마한 것 있고 커다랗거나 여러 권짜리 있어요.


  종이로 된 사전을 넘기면서 온갖 말 만납니다. 찾으려고 하는 낱말만 보지 않아요. 찾으려고 하는 낱말 둘레에 있는 숱한 말 마주합니다.


  책방마실을 할 적에도 이와 같은 느낌이에요. 찾으려고 하는 책 하나만 찾거나 살피거나 장만하지 않아요. 책 하나를 둘러싼 수많은 다른 책을 만집니다. 책 하나를 둘러싼 이런 책 저런 책 들추거나 넘기면서 널따란 책누리를 즐깁니다.


  사람을 만날 적에도 그렇지요. 이런 이야기 한 마디만 나누려고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조곤조곤 나누고, 저런 생각도 살근살근 주고받습니다.


  숲으로 들어가서 숲바람 쐴 때에도 그래요. 편백나무숲에 가야 하거나 삼나무숲에 깃들어야 하지 않아요. 소나무도 좋고 동백나무나 굴참나무도 좋아요. 콩배나무나 멧벚나무도 좋지요. 잣나무나 오리나무도 좋아요. 온갖 나무를 만나고, 숱한 나무를 생각합니다. 나무마다 다른 삶결과 숨결을 마십니다.


.. 받들어 모시는 대찰 주지 스님을 태연자약하게 놀려먹을 수 있는 내 길동무 스님의 세계 또한 만만한 것이 아니지요 ..  (129쪽)


  이윤기 님 산문책을 읽습니다. 이윤기 님이 살아온 발자국을 돌아봅니다. 이윤기 님이 생각하고 사랑하는 삶이 무엇인가 하고 헤아립니다. 이윤기 님 스스로 즐겁게 걸어온 삶이니, 이렇게 이윤기 님 마음을 글 하나에 차근차근 담겠지요. 이윤기 님을 좋아하는 분들은 이 산문책 즐겁게 장만해서 즐겁게 읽으며 이녁 마음밭 살찌우겠지요.


  누구나 삶을 누립니다. 그래서, 누구나 글을 씁니다. 누구나 삶을 짓습니다. 높거나 낮거나 좋거나 나쁜 삶이란 따로 없이, 누구나 스스로 삶을 사랑하고 아끼면서 짓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녁 삶을 즐겁게 글로 씁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며 무엇인가 배웁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험싸움 순위싸움 점수싸움에 시달립니다. 학교라는 데에서 아이들한테 즐거운 배움이나 슬기로운 가르침 나누는 일이 뜻밖에 무척 적어요.


  어른들이 학교를 세워서 무엇인가 가르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학교에서 시험공부 순위공부 점수공부로 들볶습니다. 학교라는 데에서 어른들 스스로 즐거운 삶과 사랑과 꿈을 북돋우거나 키우는 일이 뜻밖에 참 적어요.


  “어른 학교”란 무엇일까요. “어른 학교”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할까요. “어른 학교”는 꼭 다녀야 할까요. 졸업장 없는 사회가 그립습니다. 학교 없는 나라가 그립습니다. 4346.5.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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