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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코의 술 애장판 10
오제 아키라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225
사랑맛이 날 때에
― 나츠코의 술 10
오제 아키라 글·그림,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2011.12.25./9000원
들유채는 겨울 막바지부터 들판에서 돋습니다. 들유채는 펑퍼짐하게 잎사귀 넓힙니다. 늦겨울과 이른봄에 싱그러운 풀잎 베풀고, 한봄과 한여름에도 맑은 풀잎 내어줍니다. 이와 달리, 지자체에서 ‘경관사업’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빈논에 심도록 하는 꽃유채는 느즈막하게 논자락에서 돋습니다. 꽃유채는 잎사귀 아주 작습니다. 뜯어서 먹을 만한 잎사귀는 좀처럼 안 보입니다. 꽃대만 멀거니 빨리 올라오면서 꽃 또한 빨리 피어나요.
사월 십오일 넘어서는 들판을 노랗게 물들이는 꽃유채는 노란빛이 곱습니다. 뜯어서 먹고 싶다는 생각이 좀처럼 안 드는 꽃유채라 할 테지만, 꽃유채는 가만히 바라보며 즐거운 빛 누릴 수 있습니다. 풀은 먹어야 맛이기도 하지만, 따사로이 바라볼 때에도 맛이에요. 몸을 살찌우는 숨결 주는 풀이면서, 마음을 돌보는 숨소리 주는 풀입니다.
들미나리를 바라봅니다. 아예 미나리밭을 따로 넓게 마련해서 미나리농사 짓는 분도 있고, 비닐집을 마련해 미나리를 잔뜩 거두는 분도 있으나, 나는 들미나리를 바라봅니다. 들미나리는 날마다 한 줌씩 뜯어서 밥상에 올립니다. 따로 데치거나 볶거나 무치지 않아도 맛납니다. 끼니마다 한 줌씩 뜯는 들미나리에는 들내음이 감돌고 들맛이 서립니다. 따로 씨앗을 안 뿌렸어도 논도랑마다 자라는 미나리예요. 논도랑이 흙이라면 어디에서나 스스로 씨앗을 퍼뜨려 잘 자라는 미나리예요.
- “나츠코, 어디서 농땡이 치다 이제 오는 거야? 추수 다 끝났어.” (36쪽)
- “좋았어, 한 푸대 나왔다! 나츠코, 타츠니시키 현미다! 알이 엄청 굵은걸. 이 한 톨, 한 톨이 농사꾼의 땀의 결정체야.” (53쪽)
시골마을은 봄부터 가을까지 풀빛입니다. 왜냐하면, 풀씨는 풀씨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새로 씨앗을 퍼뜨리거든요. 흙일꾼이 아무리 논두렁 태우고 밭두렁 불을 놓아도, 풀씨는 씩씩하게 다시 자랍니다. 왜냐하면, 풀씨이거든요. 아예 시멘트로 뒤덮지 않고서야, 풀씨를 억누를 수 없어요.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확 깔아서 뭉개야 비로소 풀은 돋지 않아요.
요즈음 고흥 들판 곳곳에서 ‘흙도랑’ 없애고 ‘시멘트도랑’ 놓는 모습을 봅니다. 논을 빙 둘러 도랑을 시멘트로 채우는 꼴입니다. 이렇게 되면, 논은 어느덧 흙논이라기보다 시멘트벽에 갇힌 ‘시멘트논’ 되는 셈입니다. 흙도랑 아닌 시멘트도랑 되면, 논에서 개구리 살아가지 못합니다. 개구리는 물속에서만 살지 못하기에, 때때로 물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시멘트도랑 생기면, 개구리는 몽땅 물에 빠져 죽고 말지요. 게다가, 시멘트도랑에서는 다슬기도 가재도 살지 못하고, 미꾸라지도 못 살아요. 시멘트도랑에서는 무엇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다슬기 없어 개똥벌레 함께 살지 못하는 시멘트도랑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숨결 얻으면서 목숨 건사할 수 있을까요. 온갖 논목숨 죄 죽이는 시골마을은 시골사람한테 얼마나 즐겁거나 좋거나 아름다운 ‘문명’이나 ‘발전’이나 ‘문화’가 될까요.
적잖은 지식인이나 뜻있는 분들은 이명박 정부가 밀어붙인 ‘4대강사업’이 한강·낙동강·영산강·금강을 죽일 뿐 아니라, 시골 조그마한 냇물까지 죽인다고 이야기합니다. 정부에서는 ‘4대강 살리기’라고 외치지만, 정작 이 토목공사는, 이 나라 모든 냇물과 도랑을 갈아엎고는 냇바닥에 시멘트를 퍼붓습니다. 모두를 죽이는 토목공사인데, 사람들한테 홍보할 적에는 ‘살리기’라고 외칩니다. 정부에서 꾀하는 ‘살리기’ 때문에, 이제 이 나라 민물고기는 거의 씨가 사라질 판입니다. 정부에서 ‘살리기’를 한다지만, 이제 이 나라 냇물로 찾아오는 철새는 먹이인 물고기를 찾을 길 없습니다.
한강이나 낙동강 냇바닥에 시멘트 퍼붓는 짓이 끔찍한 줄 느낀다면, 시골마을 논도랑에 있던 흙을 파헤치고 묻는 시멘트도랑이 얼마나 끔찍한 짓인가를 느낄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시멘트도랑을 하루빨리 뜯어서 걷어내지 않는다면, 시골마을 살아날 수 없는 줄 어서 깨달아야지 싶습니다.
- “겨울이 온다, 쿠사카베! 우리의 작업이 시작되는 거야! 난 이미 만들어진 술보다 앞으로 만들 술 생각만 한다!” (67쪽)
- “네가 혀의 기억이라 생각하는 건, 사실은 마음의 기억이 아닐까.” “마음의 기억.” “넌 혀로 맛본 게 아니라 마음으로 맛본 거야.” (123쪽)
- “멍청한 소리! 만들기 편한 3증주가 도지의 실력을 얼마나 무디게 하는지 아냐? 나츠코! 내가 생각하는 일본 최고의 술은, 갖고 있는 모든 기술을 구사해 완벽하게 빚어낸 술이다. 그 어떤 술에도 지지 않는 긴조주야.” (148쪽)
앞으로 어느 시골이든 ‘친환경’이나 ‘유기농’으로 나아갈밖에 없습니다. 비료와 농약 먹은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는 나날이 값이 껑충 뛰어오를밖에 없습니다. 비료값이랑 농약값이 얼마나 오르는데요. 비료도 농약도 안 쓰고, 똥오줌 거름을 쓰면서 사람 손으로 조금씩 거두는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를 거두는 시골살이로 바뀔밖에 없습니다. 요새는 비료와 농약 먹고 자란 곡식이나 푸성귀나 열매가 오히려 비료와 농약 안 먹고 자란 곡식이나 푸성귀나 열매보다 비싸기도 합니다. 자유무역협정을 떠나, 사람이 살아갈 보금자리를 살필 때에, 이 나라 시골마을 나아갈 길은 아주 뚜렷합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더할 나위 없이 또렷합니다.
흙을 살리는 길로 가야지요. 땅을 북돋우는 길로 가야지요. 흙을 더럽히거나 망가뜨리는 길로는 가지 말아야지요. 갯벌을 메우는 짓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새만금에서조차 아직 못 깨닫는 사람 너무 많아요. 고흥 시골자락 갯벌도 이 나라 사람들 생각이 제대로 자라지 못했을 때에 너무 섣불리 메우고 말았어요. 갯벌에서 더 많은 돈이 나오기 때문이 아니에요. 갯벌에서 갯것이 끝없이 자라며 나오기도 하지만, 갯벌은 뭍에서 빗물과 냇물에 쓸려서 내려오는 찌꺼기와 쓰레기를 거르는 몫을 맡아요. 갯벌이 있을 때에 뭍도 비로소 정갈할 수 있어요. 갯벌이 사라지면 뭍도 바다도 나란히 더러워지면서 무너지지요. 바다에는 갯벌이 있어야 하고, 뭍에는 숲이 있어야 해요. 바다에서는 갯벌이 푸른 숨결 뿜고, 뭍에서는 숲이 푸른 숨결 뿜어요.
나무 한 그루 함부로 벨 일이 아닙니다. 나무 한 그루 살리려고 찻길을 에둘러 닦거나 건물 한 채를 허물 일입니다. 나무 한 그루 쉽게 베내어 찻길을 닦거나 건물 지을 일이 아닙니다. 나무 한 그루 우람하게 선 곳에서는, 무엇보다 나무를 돌보고 지킬 노릇입니다. 사람이건 벌레이건 들짐승이건, 찻길이나 건물 없어도 살지만, 나무가 없거나 숲이 없거나 들이 없거나 갯벌이 없거나 바다가 없거나 냇물이 없으면 살지 못해요.
-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닐 거예요. 신고이 노력으로 좋은 술을 만들었기 때문이겠죠.” “네 말이 맞다, 나츠코. 가격이 좀 비싸더라도 그에 합당한 품질이라면 팔린다. 이 녀석 덕분에 나도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137쪽)
- “나츠코, 우리 도지도 고향에서 친구들과 마시는 술은 늘 3증주다. 긴조를 살 돈이 없는 게 아니야. 그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지. 일을 마치고 마시는 2홉들이 싸구려 술이 우릴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긴조 한 병 값으로 그런 술 5병은 살 수 있다 보니, 우리로선 3증주가 그저 고마울 뿐이지. 신고 씨, 나 같은 늙은이는 쿠로이와 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네.” (146∼147쪽)
오제 아키라 님 만화책 《나츠코의 술》(학산문화사,2011) 열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만화책 《나츠코의 술》은 ‘일본 옛술(전통주)’ 빚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모두 열두 권으로 이루어진 만화책인데, 첫째 권부터 열째 권에 이르도록, 또 뒤엣권 열한째 권과 열둘째 권에서도, 가장 눈여겨보며 다루는 줄거리와 가장 찬찬히 헤아리며 들려주는 줄거리는 바로 ‘흙짓기’예요. 술을 빚는 마음이란, 시골 흙일꾼이 들판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흙을 빚는 마음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술을 빚는 얼거리와 매무새를 틈틈이 들려주고 밝히지만, 이보다는 ‘술을 이루는 바탕’이란 바로 ‘흙일꾼이 한 해 내내 피와 땀과 사랑과 눈물과 웃음으로 거둔 나락 한 톨’이라는 이야기를 더 깊이 오래도록 들려주고 밝힙니다. 아름답고 좋으며 정갈한 나락이 있어야, 비로소 아름답고 좋으며 정갈한 술 한 병 빚을 수 있다고 말해요. 술을 빚기 앞서 나락을 알아야 하고, 나락을 알려면 흙을 알아야 한다고 말해요. 흙을 알자면 시골을 알아야 하고, 시골을 알자면 숲을 알아야 하며, 숲을 알자면 풀과 나무를 알아야 한다고 말해요. 그리고, 풀과 나무를 알자면 벌레와 짐승을 알아야 하고, 물과 바람과 햇살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지요.
- ‘만들 거야, 오빠. 이 타츠니시키에 담긴 오빠와 나와 할아범의 마음이, 마시는 사람에게 깊고 조용하게 전해지는 술, 사랑이, 사랑의 맛이 나는 술을.’ (168쪽)
- “당신이라면 이해할 줄 알았어요. 그 술의 빛을 알아줄 줄 알았어요.” (205쪽)
한국 옛술이라 할 막걸리를 헤아려 봅니다. 막걸리는 예부터 ‘쌀’과 ‘물’ 두 가지로 빚었습니다. 막걸리맛이라면, 첫째 쌀맛이고, 둘째 물맛입니다. 그런데, 막걸리에 쓰는 쌀이란, ‘막걸리 담을 때에 쓰는 물’로 돌본 쌀이지요. 곧, 막걸리맛에서 쌀맛도 물맛인 셈이에요. 게다가, 이 물이란 쌀을 거둘 때에 쓰고 술을 빚을 때에 쓰는 물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여느 때에 마시는 물이요, 여느 때에 밥을 짓는 물이며, 여느 때에 씻고 빨래하는 물입니다.
물이 정갈하지 않으면 막걸리맛은 없습니다. 물이 맑지 않으면 쌀맛은 없습니다. 물이 싱그럽지 않으면 애써 빨래를 해도 옷가지가 보송보송 곱지 않습니다. 물이 푸르지 않으면 아이들이건 어른들이건 개운하게 씻거나 마시지 못합니다.
시멘트로 바닥을 막음한 도랑이나 못에서 푼 물로 밥을 지을 살림꾼은 없습니다. 시멘트바닥을 흐르고 플라스틱관을 거쳐 나오는 물로 옛술을 빚을 ‘일본 옛술 주조장’은 없습니다. 그러면, 한국에서 막걸리 빚는 주조장은 어떠할까요. 한국에서 나락 거두는 시골마을은 어떠한가요. 한국에서는 흙과 숲과 들과 갯벌과 바다와 하늘과 바람을 얼마나 곱게 건사하면서 얼마나 정갈히 보살피는가요. 수도물로 빚는 막걸리와 샘물로 빚는 막걸리는 맛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수도물로 짓는 나락농사와 냇물과 빗물과 샘물로 짓는 나락농사는 밥맛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 “나츠코는 역시 아직 어린아이야.” “이전 전무도 그랬죠. 그 사람에게서 환상의 쌀이니 일본 최고의 술이니 하는 소릴 처음 들었을 때, 전 그렇게 생각했어요. 마치 어린애 같다고. 아버님도 그러셨을 거예요.” (212∼213쪽)
- “넌 두려움마저 느낍니다. 진통을 넘어서 새로운 발전을 이룰 나츠코 씨에게.” “그럼 난 이상해진 게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믿기지 않아요. 하지만 할아범이 그러더군요. 혀가 아닌 마음으로 맛을 본 거라고.” “훌륭한 도지네요. 나츠코 씨, 술을 마음으로 맛보는 사람은 달리 없어요. 비센으론 성이 차지 않는다 여기는 사람도 당신뿐이에요.” (220∼221쪽)
사랑맛이 날 때에 술맛입니다. 사랑맛이 있을 때에 밥맛입니다. 사랑맛이 감돌 때에 삶맛입니다. 앞으로 모든 농사는 유기농이나 친환경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만, 유기농이나 친환경이 아닌 다른 길로 머잖아 차츰 나아가리라 느껴요. 잘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어요. 들나물이나 멧나물은 어느 흙일꾼도 따로 씨앗을 뿌려서 캐거나 꺾거나 뜯지 않아요. 쑥씨를 뿌려 쑥을 뜯는 흙일꾼은 없어요. 질경이씨나 냉이씨나 씀바귀씨나 민들레씨 뿌리는 흙일꾼은 없어요. 돗나물씨를 누가 뿌리겠어요. 꽃다지씨나 갯기름나물씨를 누가 뿌리겠어요. 나물이 되는 풀씨는 어느 누구도 뿌리지 않아요. 풀 스스로 씨앗을 내릴 때에 비로소 사람 몸에도 가장 좋은 먹을거리가 돼요. 고사리도 고비도 사람이 뿌린 씨앗으로 이듬해에 새로 돋지 않아요. 대나무 어린싹도 사람이 심어야 나지 않아요.
앞으로 시골사람은 ‘숲이 스스로 흙을 보살피면서 사람한테 푸른 숨결 나누어 주는 들풀과 들나물’ 누리는 길로 새삼스레 다시금 나아가리라 생각해요. 애써 상추씨 뿌려서 상추잎 먹어야 맛있지 않아요. 민들레잎 먹고 미나리잎 먹으며 쑥잎 먹으면 돼요. 환삼덩굴잎 먹고 며느리밑씻개잎 먹으며 유채잎 먹으면 돼요.
허리 꺾이며 하는 들일이 아닌, 허리 펴면서 숲과 들과 집을 곱고 푸르게 돌보면서 지키는 들삶으로 나아가리라 생각해요. 끝없이 뿌리는 비료와 농약은 곧 아주 접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들나물과 멧나물은 비료 한 알 안 주어도 싱그럽고 맛나게 자라요. 들나물과 멧나물은 풀약 한 모금 안 주어도 튼튼하고 씩씩하게 자라요.
콩잎 먹고 깻잎 먹으며 모시잎 먹어요. 사월 한 달은 느티잎과 단풍잎 먹을 수 있고, 오월에는 감잎 먹을 수 있어요. 숲은 늘 우리한테 먹을거리를 내주어요. 숲바람을 마시고 숲소리를 들어요. 어떤 삶일 때에 즐겁고, 어떤 사랑일 때에 빛나는가를 생각해요.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다’고 하는 때를 떠올려요. 즐거운 일이 있으면, 곧 마음속에서 사랑이 피어나면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다’고 느끼잖아요. 어느 때에 이런 몸이 되고 어느 자리에서 이런 마음이 되는가를 헤아려요. 삶을 이루는 아름답고 즐거운 길을 찾고 깨달으며 받아들일 수 있기를 빌어요. 4346.4.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