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쓰기
― 필름스캐너 바꾸기
2001년부터 스캐너를 썼습니다. 처음에는 십오만 원 즈음 하는 아주 값싼 스캐너를 썼습니다. 처음 장만한 스캐너는 책 겉그림 긁는 데에도 품이 제법 들었습니다. 돈을 푼푼이 그러모아 2002년에 이십오만 원 즈음 하는 스캐너로 한 번 바꾸었고, 다시 돈을 푼푼이 그러모아 2003년에 사십오만 원 즈음 하는 스캐너로 다시 바꾸었으며, 이번에는 적금을 깨서 2004년에 칠십오만 원 즈음 하는 필름스캐너를 장만했습니다.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해상도와 성능 나은 스캐너를 장만해서 쓸 때마다 생각했어요. ‘아아아, 예전에 장만한 스캐너로 긁은 사진은 몽땅 다시 긁어야겠구나.’ 하고요. 2004년에 필름스캐너를 장만해서 필름으로 사진파일 만들 적에는 이런 생각이 더욱 짙었어요. 그런데 필름스캐너를 갓 쓰던 때에는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해상도를 얼마쯤 맞추어야 하는가를 옳게 가누지 못했어요. 200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필름스캐너를 제법 잘 다루었고, 이때 다시금 ‘이런이런, 필름스캐너 처음 쓰던 때에 긁은 필름은 모두 다시 긁어야겠네.’ 하고 느꼈어요.
그런데, 2004년을 끝으로 필름스캐너가 더는 새로 안 나옵니다. 이제 디지털사진이 차츰 자리를 잡고, 필름사진은 한풀 꺾이면서, 필름스캐너 만드는 회사는 애써 이런 물건 만들어야 팔기 힘들었겠지요. 이리하여 2004년에 장만한 필름스캐너를 2013년 4월 첫머리까지 써요. 자그마치 열 해나 같은 필름스캐너를 씁니다. 필름스캐너 만드는 회사에서 더는 새 물건 만들지 않다 보니, 또 필름스캐너를 더는 안 팔다 보니, 나도 어쩌는 수 없이 유리판 낡고 많이 긁힌 필름스캐너를 그대로 썼어요.
어쩌는 수 없지 않느냐 하고 여기며 쓰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중고장터를 알아봅니다. 내가 쓰는 캐논9900F를 다시 살 수 있나 알아봅니다. 이 스캐너를 장만했다가 고이 묵힌 분이 매우 드뭅니다. 좀처럼 다시 사기 어렵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캐논9950F를 장만했다가 고이 묵힌 분을 만납니다. 내 스캐너보다 살짝 성능 나은 녀석입니다. 게다가, 이 필름스캐너를 고이 묵힌 분은 고작 이십만 원에 이 물건을 내놓습니다. 다만, 중고장터에 이 물건 올린 지 반해가 지났어요. 아무렴, 팔렸겠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그래도 궁금해서 쪽글을 보냈지요. 하루 지나서 답글이 와요. 아직 안 팔렸다고. 반가운 나머지 제가 그 물건 사고 싶다며 쪽글을 보냈고, 그분은 제가 필름스캐너 사겠다면 십삼만 원만 받겠다 얘기합니다. 2004년에 팔십만 원 가까이 하던 필름스캐너인데 2013년에 고작 이십만 원조차 아닌 십삼만 원이라니. 이렇게 값싸게, 게다가 포장조차 안 뜯은 필름스캐너라니.
물건을 받고 이틀 지난 뒤, 옛 필름스캐너 떼고 새 필름스캐너 붙입니다. 물건 받자마자 새로 붙이고 싶었으나, 조금 두려운 마음 있어서 이틀 기다렸어요.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필름 한 장 처음으로 긁습니다. 깜짝 놀랍니다. 한 장 더 긁습니다. 더 깜짝 놀랍니다. 아주 큰일났다고 느낍니다. 내가 열 해 동안 쓰던 필름스캐너 캐논9900F가 낮은 사양이나 해상도가 아닙니다만, 게다가 나는 해상도를 가장 높여 필름을 긁었습니다만, 열 해 동안 쓰던 필름스캐너로 긁은 필름 가운데 요 몇 해 사이에 긁은 필름은 모조리 새로 긁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똑같은 필름을 긁은 사진이 너무 뚜렷하게 질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2001년부터 2004년 사이에 해마다 스캐너를 바꾼 까닭은 스캐너도 소모품이로구나 하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한 해 즈음 쓰면 ‘어쩐지 사진 느낌이 많이 바래는걸’ 하고 느꼈어요. 2005년부터 이제껏 새 필름스캐너 장만하지 못한 까닭은 2004년을 끝으로 더 높은 사양으로 새 필름스캐너 안 나온 까닭이고, 그나마 2004년에 만든 필름스캐너조차 장터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에요.
엊그제 새로 장만한 필름스캐너 잘 아끼며 써야지요. 그리고 중고장터를 더 살펴, 이 필름스캐너 고이 묵힌 분 또 있다면, 한두 해에 한 번쯤 다시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필름스캐너 값이 얼마가 들든, 애써 필름으로 찍은 사진을 파일로 옳게 바꾸지 못한다면, 필름스캐너 있으나 마나요, 필름 한 장 긁느라 3분이라는 시간 들인 품이 모두 도루묵 되고 말아요(필름 한 장 긁는 데에 3분이니, 서른여섯 장 모두 긁자면 108분, 곧 한 시간 반입니다). 필름스캐너 하나 바꾸며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내가 필름사진을 엉터리로 찍어서 이런 사진 나오지는 않았구나. 내 필름사진을 믿자. 필름스캐너 한 대를 너무 오랫동안 쓰느라 이 기계가 매우 지친 탓에 필름을 옳게 못 긁었구나. 아무리 기계라지만 지나치게 오래 굴려서는 안 되는구나. 내가 쓰는 디지털사진기도 거울상자 많이 다치고 낡았으니, 이제 새 기종으로 바꿀 때가 한참 지나고도 한참 지났구나.’
그나저나, 또 무슨 돈으로 디지털사진기를 새로 바꿀 수 있으려나요. 나는 값싼 캐논450D를 아직도 쓰는데(제가 쓰던 기계는 더는 쓸 수 없겠다 여겨 형이 쓰던 사진기를 빌려서 쓰지만, 이 사진기도 오랫동안 많이 써서 요즈음 여러모로 애먹습니다), 어떤 디지털사진기로 바꾸어야 할까요. 캐논450D보다 사양과 성능 나은 다른 디지털사진기를 고이 묵힌 채 무척 값싸게 나한테 팔아 줄 놀라운 분이 나타날 수 있을까요.
글을 쓸 적에 연필과 공책을 틈틈이 새로 장만하듯, 사진을 찍을 적에는 사진기와 필름스캐너를 틈틈이 새로 장만할 노릇이겠지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연필과 공책 장만하는 데에 돈을 아끼지 말 노릇이요,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사진기와 필름스캐너 장만하는 데에 돈을 아끼지 말 노릇입니다. 다만, 사진장비는 돈이 퍽 많이 듭니다. 한참 망설입니다. 한참 망설이다가, 그만 애써 찍은 필름 제대로 못 건사하고, 애써 찍은 디지털파일에 티끌이 자꾸 깃듭니다.
《뱅뱅클럽》이라는 책 떠올립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보도사진 찍은 분들은 총알 빗발치는 싸움터에서 살아남으며 사진을 찍는데, 이들은 셔터막에 구멍이 났어도 돈이 없어 새 기계로 바꾸지 못하고, 구멍난 데가 티나지 않게끔 사진구도를 잡으며 사진을 찍었다고 해요. 어쩌면 나도 이분들하고 똑같은 매무새로 ‘거울상자 생채기’ 티끌이 잘 안 드러나게끔 사진구도 잡아서 찍는다 할 수 있어요. 참 쉽지 않고, 참 만만하지 않습니다. 4346.4.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새 필름스캐너로 긁은 필름파일.
예전 필름스캐너로 긁은 필름파일. 아아아... 이게 뭡니까...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