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버스표 하나 (13.4.8.)
고흥 길타래 8―봉래산 편백나무 숲길

 


  2012년 9월 즈음부터 고흥군에서도 교통카드를 쓸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고흥군 골골샅샅에 있던 작은 가게에서는 종이버스표를 더는 안 팝니다. 모든 삶이 참 빠르게 달라지는구나 싶습니다. 종이버스표만 팔던 읍내 가게는 아예 문을 닫고, 종이버스표를 함께 팔면서 물건 몇 가지 함께 파는 조그마한 면소재지 가게나 시골마을 가게에는 사람들 발길이 더 뜸합니다.


  시골에서도 교통카드를 쓰는 일이 좋은 편리요 문화요 복지라 할 수 있을까 살짝 아리송합니다. 얼마나 편리요 문화요 복지일는지 궁금하곤 합니다.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은 날마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 편의점에 어렵잖이 들른다지만(교통카드 충전은 여러 달 동안 편의점에서만 되었어요. 이제는 읍내 버스역에서도 해 줍니다.), 시골마을 할매와 할배는 편의점까지 갈 일이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시골마을에서 지내는 할매와 할배가 교통카드에 돈을 채우려고 따로 편의점까지 가야 하는 일은 무척 번거롭지요.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나 다른 마을로 나들이를 갈 때 살펴보면, 시골마을 할매와 할배는 거의 모두 맞돈을 내요. 교통카드로 찍는 할매나 할배는 거의 없어요. 읍내 버스터에서 시골마을로 돌아가는 할매와 할배는 으레 종이버스표를 끊지요. 교통카드에 돈을 채워서 찍는 할매와 할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와 달리,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은 거의 다 교통카드를 찍어요.


  그러면, 교통카드란 무엇일까요. 시골마을에 편리와 문화와 복지를 앞세우며 쓰도록 하는 교통카드란 어떤 편리와 문화와 복지가 될까요. 초·중·고등학교 아이들한테는 편리와 문화와 복지일 테지만, 시골마을 할매와 할배한테는 무엇이 될까요. 시골마을 작은 가게에 들러 종이버스표 끊으면서 이야기 몇 마디 나누고, 가게에서 볼일도 보던 삶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하는 교통카드는 시골마을에 어떤 편리와 문화와 복지로 스며들 만한 일이 될까요.

 

 

 

 

 


  봉래면 바깥나로섬에 깃든 봉래산으로 봄꽃마실을 갑니다. 편백나무 살그마니 우거진 조그마한 숲길을 걷습니다. 편백나무 숲길로 가는 길목을 알리는 푯말은 제대로 서지 않습니다. 예내식당 앞 ‘예내’ 버스터에서 내려 맞은편 조그마한 다리 지나 안쪽으로 걸어서 들어가면 편백나무 숲길로 접어들 수 있지만, 막상 편백나무 숲길까지 몇 킬로미터쯤 걸어가야 할는지, 이 길이 어떠한 길이요, 그 둘레에는 어떤 쉼터가 있는지 하나도 알 노릇이 없습니다. 게다가 봉래산 편백나무 숲길이자 삼나무 숲길까지 찾아가는 오르막길 왼편으로는 높다란 철조망이 길게 이어집니다. 아름다운 숲길이요 멧길에 웬 철조망인가 싶지만, 우주센터 때문에 이렇게 쳤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우주센테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려고 무언가 놓아야 한다면, 이런 무시무시하고 볼썽사나운 철조망을 크고 길다랗게 세워야 했을까요. 숲길과 멧골에 걸맞게 울타리를 쌓을 수 없을까요. 대나무를 베어 대나무 울타리만 쌓아도 됩니다. 나무울타리를 쌓아도 되고, 탱자나무 울타리를 마련해도 돼요. 찔레나무 울타리를 둘 수도 있고, 두릅나무를 심어 울타리 노릇 하도록 할 수 있어요.


  천천히 숲길로 올라갑니다. 숲길로 접어들 때까지는 나무그늘 없는 멧길입니다. 자동차 다니기 좋도록 길을 내었구나 싶은데, 차라리 아무 자동차도 오르내리지 못하게 하면서, 그러니까 자동차도 자전거도 드나들지 못하는 길로 하면서, 오직 사람만 걸어서 오르내리는 숲길로 두었으면, 이러면서 우주센터를 빙 두른 철조망은 모두 걷어내고 이곳에 ‘볼썽사납지 않고 숲속하고 제대로 어울리는 나무울타리’를 세운 다음, 나무울타리 앞에는 고흥에서 즐거이 마주하는 봄꽃과 여름꽃과 가을꽃 철따라 피어나도록 들꽃 씨앗 조금 뿌리면 참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고는 나무울타리 한쪽에 푯말 하나 붙이면 돼요. ‘숲을 사랑하는 고흥사람은 숲을 아껴 주셔요.’, 이렇게만 적어도 되지요. 굳이 ‘우주센터 출입금지’처럼 무서운 말 안 적어도 돼요.


  콩배나무 하얗게 맑은 꽃망울 흐드러진 곳에서 나무그늘 우거진 숲길로 아이들과 함께 들어섭니다. 작은아이는 졸립다 하기에 품에 안고 걷습니다. 큰아이는 씩씩하게 숲길을 걷습니다. 나무그늘 없이 시름재 언저리까지 올라와야 하는 길은 여느 멧자락하고 비슷하지만, 나무그늘이 짙게 드리우는 숲속으로 접어드니, 비로소 ‘숲이로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숲바람은 냄새와 맛과 결이 사뭇 다릅니다. 포근하면서 선들선들 감기는 숲바람이 무척 짙푸릅니다.

 

 

 

 


  작은아이는 아버지 품에 안겨 잠듭니다. 숲바람 흐르며 쏴아아 촤르르 노래하는 소리 들으며 고요히 잠듭니다. 나는 작은아이를 왼가슴으로 안고 봉래산 숲길에서 숲꽃이라 할까 멧꽃이라 할 들꽃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눈으로 보아도 좋고, 사진으로 담아도 좋습니다. 아이를 안은 채 쪼그려앉거나 무릎을 꿇거나 코를 들꽃 가까이에 대며 꽃내음 맡아도 좋습니다. 아이를 안지 않은 손으로 꽃송이를 살며시 쓰다듬습니다. 이 깊은 숲속에서 너희들은 어여삐 어울리면서 맑은 빛 뽐내는구나.


  금탑사 디딤돌 사이 빈틈에서 보던 현호색과 봉래산 숲길에서 보는 현호색은 같은 현호색이면서도 꽃빛이 새삼스레 다릅니다. 편백나무 숲길에서는 다른 어느 꽃보다 제비꽃이 참 많이 보입니다. 하얗게 꽃잎 피어나고 단풍잎처럼 또는 쑥잎처럼 잎사귀 퍼지는 이 제비꽃을 일컬어 ‘남산제비꽃’이라 하는데, 어느 모로 보면 ‘단풍제비꽃’일는지 모르겠다 싶기도 합니다. 좀처럼 알기 힘들구나 싶어, 2013년 4월 1일에 새로 나온 《특징으로 나온 한반도 제비꽃》(지성사 펴냄)이라는 책을 살피니, 꽃잎을 보며 남산제비꽃하고 단풍제비꽃을 가른다 합니다. 꽃잎이 줄기 하나 한 곳에서 겹쳐서 퍼지면 남산제비꽃이고, 꽃잎이 줄기 하나에 하나씩 따로 돋으면 단풍제비꽃이라 한답니다. 그러니, 봉래산에서 보는 하얀 꽃망울 제비꽃은 남산제비꽃이라 할 수 있어요. 다만, 고흥은 남산 아닌 고흥이고 봉래산이니 ‘봉래제비꽃’이라는 이름 얻으면 어떨까 싶기도 한데, 서울사람 발길이 봉래산에도 닿아 남산제비꽃이 퍼졌을까요, 아니면 남산제비꽃 씨앗을 누가 이곳에 뿌렸을까요, 아니면 남산에도 한라산에도 마이산에도 봉래산에도 자라는 하얀 꽃망울 제비꽃인데, 학자들이 남산에서 가장 먼저 찾아냈기에 남산제비꽃이 되었을까요.


  큰개별꽃을 보고, 산자고를 봅니다. 천금성을 보고, 족도리풀을 봅니다. 편백나무에서 떨군 씨앗이 자라며 조그마한 ‘아기 편백밭’이 된 곳은 밟지 말아야겠다 여기며 발걸음 살살 옮깁니다. 머잖아 이 어린 싹들이 씩씩하게 커서 우거진 숲을 이루겠지요. 그늘이 짙어 못 자랄 수 있고, 얼기설기 서로 얽힐 수 있겠지요.

 

 

 

 

 

 


  한 시간 즈음 숲길을 거닐고 바깥으로 나옵니다. 볕이 잘 드는 곳에 피나물밭이 이루어집니다. 피나물에 꽃이 피어나면 노랑매미꽃이라고도 한답니다. 왜 노랑매미꽃이라고도 할까 궁금하지만, ‘나물’이라는 이름이 붙는 피나물이니, 무엇보다 줄기와 잎을 똑 끊어서 입에 넣습니다. 살짝 쌉싸름한 맛이 돌며 괜찮습니다. 아무렴, 나물인걸요.


  볕이 더 잘 드는 곳은 양지꽃밭입니다. 볕이 잘 드는 데에서 자라니 양지꽃일까요. 시골에서는 양지꽃이라는 이름 말고도 쇠스랑개비라고도 하고, 가락지나물이라고도 한답니다. 꽃으로만 바라볼 때에는 양지꽃이 될 테고, 즐겁게 뜯어서 먹는 봄나물로 여긴다면 쇠스랑개비나 가락지나물이 될 테지요. 바라보기에 따라 다릅니다. 마주하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봉래산 숲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아이들 데리고 봉래면 ‘나로 공공 버스터미널’로 갑니다. 포두면 쪽으로 나가는 버스표를 끊습니다. 고흥군 다른 데에서는 종이버스표를 이제 안 파는데, 봉래면에서는 아직 종이버스표를 끊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어 남깁니다. 봉래면에서 포두면까지는 3100원입니다.

 

 

 

 


  군내버스에는 우리 세 식구만 탑니다. 소영마을, 봉남마을, 대영마을, 사동마을 백양마을 죽죽 지나는 동안 아무도 안 탑니다. 우리 식구들 버스마실 호젓하게 즐깁니다. 이 군내버스 모는 일꾼도 여느 때에는 손님 없이 홀로 버스를 몰까요. 홀로 천천히 마을 구비구비 돌 때에는 봄에는 봄내음 맡고 가을에는 가을내음 맡겠지요. 일(버스 몰기)도 하고 마실(고흥 여행)도 즐기고, 시골 군내버스 일꾼은 퍽 괜찮은 일자리 되겠구나 싶습니다. 남들은 돈 들여 고흥으로 여행을 오지만, 고흥 군내버스 일꾼은 돈을 벌면서 천천히 마을마다 샅샅이 돌며 봄내음 한껏 들이켜네요.


  손님이 없는 군내버스는 남성을 거쳐 동래포와 우산과 봉암과 정암을 지납니다. 신촌과 세동을 지나 원세동세거리에 이르러, 우리 식구는 내립니다. 마침, 고흥읍에서 동백마을 지나가는 군내버스 지나갈 때입니다.


  아이들과 풀밭에 서서 조금 놀자니 군내버스 지나갑니다. 손을 들고 휘휘 젓습니다. 버스 일꾼이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멈칫멈칫 그냥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저 앞에서 멈춥니다. 작은아이를 안고 큰아이 손을 잡고 달립니다. 버스에서 할머니 두 분이 내립니다. 그러더니 우리 쪽으로 마주 달려옵니다. 할머니 두 분은 하하하 웃으면서 달려옵니다. “싸게싸게 오쇼. 가방은 이리 내고. 아니 우찌 애들 데리고 타쇼. 오늘은 자전거 안 타쇼.” 버스 일꾼은 “거그는 안 서는 데인데 손을 흔들면 우짜요. 거그는 위험해서 죽은 사람도 있고, 다음에는 아우야 앞에서 타쇼. 거 애들 때문에 세웠소.”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원세동세거리에는 어엿하게 버스터 이름도 있고, 버스를 타는 곳입니다. 도화면에서 포두면으로 가는 길목에서는 어김없이 버스를 세웁니다. 그리고 원세동세거리 아래쪽 세동마을 사는 분들은 읍내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갈 적에 늘 이곳에서 내립니다.

 

 

 


  세 갈래 길이 위험하다면, 위험하지 않도록 뭔가 시설이나 조치를 해야지요. 위험하지 않게끔, 포두에서 도화로 접어드는 길목에도 ‘버스를 타고 내리며 기다리는 시설’을 마련해야지요. 고갯마루 한쪽에 ‘버스 타고 내리는 자리’를 마련하든 해야지요.


  군내버스가 왁자합니다. 봉서마을 지나 동백마을 쪽으로 꺾을 무렵, 큰아이가 “내가 (단추) 누르고 싶은데.” 하고 말합니다. “그래, 네가 눌러라.” 하니 자리에서 일어나 삐익 하고 누릅니다. 옆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는 할머니들이 “아가야, 벌써 누르면 어쩌냐. 저기 우사(소 키우는 우리) 지나서 눌러야지. 우사에서 내리면 우짤려고.” “저희 마을인지 알고 눌렀는가베.” “다 아니까 잘 세워 주것지.”


  작은아이를 안고, 큰아이는 손을 잡고 내립니다. 큰아이는 버스에 대고 “할머니, 안녕!” 하고 손을 흔듭니다. 도화면 이웃마을에서 군내버스 함께 타고 다니는 할매 할배 들하고 우리 식구는 ‘서로 이름은 모르’지만, ‘낯은 서로 익숙한’ 사이입니다. 할매들 오늘 고마웠어요. 4346.4.1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고흥 길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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