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방위훈련 책읽기

 


  면사무소에서 마을방송으로 이듬날 아침 일곱 시에 마을회관에서 민방위훈련 한다고 알린다. 그런데 그저 이렇게만 알릴 뿐, 달리 알려주지 않는다. 이를테면 편지라든지 엽서라든지 손전화 쪽글로도 없다. 오직 마을회관 알림방송으로 얘기해 주고 끝이다.


  집일 하고 밥 차리고 이것저것 하느라 한바탕 움직이고 나서 살짝 허리를 펴려고 자리에 누워 끙끙거리다가 마을방송을 들으며 생각한다. 이것들, 면사무소 이것들, 내가 읍내에 볼일 보러 나갔으면 이 마을방송 못 들었을 텐데, 민방위훈련 안 나오면 벌금 물린다고? 미친 것들 아녀? 게다가 어느 마을회관으로 나오라는 말도 없이 이렇게 얘기해서 되나?


  전화번호부 뒤져서 면사무소 예비군동대에 전화해서 묻고, 다시 면사무소까지 전화해서 묻는다. 시골에 어린이도 젊은 어른도 몇 없는데, 한 사람씩 전화를 해서 알려주어도 10분조차 걸리지 않을 일을, 이렇게 엉터리로 마을방송으로 알리는 면사무소 공무원은 어떤 사람일까.


  이듬날 아침 일곱 시. 마을회관 앞에 있지만 이장님도 안 오고 아무도 안 온다. 일곱 시 이십 분쯤 되어 면사무소 일꾼 하나 자가용 몰고 와서 종이 내밀며 이름 적으라 한다. 지난해에는 동호덕 마을회관에 모여서 이름 적고 끝이었는데, 올해에는 사람들더러 이녁 마을회관으로 모이라 하면서 당신이 한 곳씩 돌아다닌다고 한다. 애써 어느 한 곳까지 오가느라 시간 버리지 말라는 뜻이 될 수 있지만, 이렇게 기다리느라 한참 멀뚱멀뚱 아침 일 못 보아야 하는데, 차라리 어느 한 곳에 오라고 해서 제때 맞추어 이름 적고 돌아가면 훨씬 시간을 아끼고 품도 줄이는 노릇 아닐까.


  이름 적고 끝인 민방위훈련이라면 아예 이름조차 적을 까닭이 없다. 나이 마흔 꽉 차는 나이 되면 민방위훈련 소집조차 끝이기는 하다만, 이런 허울뿐인 일을 맡는 공무원 따로 있고, 이런 허울뿐인 일을 하느라 서류를 꾸미고 움직여야 하는 한국 사회는 얼마나 문명과 문화와 교육과 복지와 정치가 아름답다 할 만할까. 뿌리를 캐면, 민방위훈련뿐 아니라 예비군훈련도 부질없다. 예비군훈련에 앞서 군대조차 덧없다. 평화를 부르거나 지키지 않는 군대이기도 하지만, 군대 속살을 들여다보면 갖가지 부정과 부패가 넘실거린다. 행정보급관·중대장·하사관·소대장을 비롯해, 대대장과 대대 간부나 사병, 또 연대나 사단이나 군단 간부나 사병 모두 한통속 되어 돈을 빼돌리고 물건을 빼돌린다. 맨 끄트머리 중대 사병(이른바 ‘땅개’라고 하는)만 언제나 뺑이치고 배를 곯는다. 군부대 들어가는 나라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이 수십만 군 관계자 주머니에 들어간다. 군인들이 무얼 하는 줄 사람들이 제대로 알기나 알까? 포병 아이들은 포대에서 술 마신다. 특전사 아이들은 산속에서 술 마신다. 해병대 아이들은 바다에서 술 마시지. 관세 없는 값싼 술을 먹고 세금 안 붙는 값싼 담배를 태우며 젊은 나날 군대에서 폭력과 욕설을 배우며 길들여진다. 어찌 보면, 젊은이한테 술을 먹이고 담배를 가르치며 바보짓 시키는 ‘바이오 로봇’처럼 길들이려고 군대라는 제도를 만들어 ‘평화 지킴이’라도 되는 듯 ‘세뇌’를 시킨달 수 있는데, 젊은 사내들이 군대를 안 가고, 군대가 아예 없어지는 사회를 이루지 못하면, 우리 나라는 막다른 벼랑으로 가다가 굴러떨어지리라 느낀다. 마을 형님 한 분은 나이 마흔셋이라 하는데, 당신 아버지가 주민등록 잘못 해서 아직까지 민방위훈련 나가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예비군훈련 일곱 해, 민방위훈련 일곱 해, 벌써 열네 해째 이런 쓸데없는 훈련에 휘둘리며 산다. 서른아홉 살 봄날 흐른다. 4346.3.1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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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03-15 09:59   좋아요 0 | URL
그래설까요,요즘 서울은 민방위 훈련도 인터넷으로 대체하는 것 같더군요^^

숲노래 2013-03-15 18:44   좋아요 0 | URL
아아, 놀랍군요!
민방위든 예비군이든 얼른 없어져야 할 박정희 유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