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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산골
김수자 지음 / 종합출판범우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책읽기 삶읽기 127
아름다운 보금자리는 어디에
― 낭만 산골
김수자 글
종합출판 범우 펴냄,2009.3.16./9000원
스스로 사랑할 만한 곳에서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가장 아름답습니다. 스스로 사랑할 만한 곳이 아닌데 억지로 머물면서 지내야 한다면, 아름답지도 못하고 즐겁지도 못합니다. 사랑이 샘솟지 못하고, 꿈이 자라지 못합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사랑을 느낄 만한 데에서 삶을 꾸려야 아름다우리라 느낍니다. 사랑을 못 느낄 만한 데에서 돈만 벌거나 시험공부만 한다면, 어른도 아이도 아름다움하고는 차츰 멀어질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돈을 억수로 번대서 억수로 쌓은 돈을 다 쓰지 못해요. 즐겁게 쓰지도 못해요. 시험성적 잘 나와 이런 대학교 저런 대학교에 붙는들 졸업장이 남지, 딱히 더 남을 것이 없습니다. 돈 때문에 살아갈 목숨이 아니고, 졸업장 이름값 때문에 흘려버릴 푸른 나날이 아닙니다.
.. 눈밭에 낫을 들고 나가 마른 산 갈대를 잘라 와서 밑불을 놓고 생 참나무 장작을 아궁이 가득 밀어 넣는다. 눈 속에 불쏘시개거리 마른 풀이 남아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 돼지 냄새에 신경 쓰고 질병에 신경 쓰다 보니, 사람 사는 동네와는 먼 곳을 선호하게 되는 까닭이다. 돼지 따라 변두리를 좋아하다 보니 평생 수돗물을 못 먹어 보았고, 쓰레기 봉투를 모르고 산다 .. (15, 26쪽)
며칠 앞서 ‘고흥 마중길’이라는 자리를 지나갑니다. 이웃이 모는 짐차를 얻어타고 아이들과 함께 해창만 사이를 지나가다가 ‘고흥 마중길’ 알림판을 봅니다. 살짝 멈추어 ‘고흥 마중길’ 첫 자리를 살펴보는데, 그늘이 드리우는 자리도, 흙을 밟을 자리도, 물 한 모금 마실 자리도 아직 따로 없습니다. 알림판과 푯말만 덩그러니 있습니다. 해창만부터 능정마을과 사도마을까지 죽 걸어가라는 길이라 하지만, 이 길은 자동차가 매섭게 싱싱 달리는 길이며, 참말 그늘이건 앉을 빈터이건 하나 없어요. 그렇다고 풀밭이나 흙을 밟는 포근한 길이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곳까지 오자면 자가용을 몰아야 해요. 자가용 몰고 이곳에 차를 댄 다음 10킬로미터 길을 죽 걸어가서, 다시 10킬로미터 길을 돌아오라는 소리인데, 시골마을에는 가게나 편의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물 마실 자리도 없지요.
고흥군청에서 애써 목돈 들여 알림판과 푯말 세운 뒤, 이런 시설 저런 건물 짓느라 부산한 듯하지만, ‘사람이 걷는 길’은 돈으로 지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느긋하게 거닐며 삶을 누리도록 하는 길은 돈으로 닦을 수 없습니다.
내 보금자리 깃든 마을에서 이웃집 찾아가는 구비구비 시골길은, 사람들 스스로 꾸준히 두 다리로 천천히 땅을 디디고 다니면서 생깁니다. 오솔길은 사람이 빚습니다. 숲길은 숲이 빚지요. 제주 올레길이든 지리산 둘레길이든 그닥 재미있지 않아요. 왜냐하면, 마을사람 스스로 즐겁게 거닐며 오가는 길이 아니니까요. 살가운 이웃을 만나러 사랑을 마음에 품고 오가는 길이 아니니까요.
.. 각박한 세상을 향기로 채우고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것은 꽃과 식물이다 .. (82쪽)
관청에서 찻길 가장자리에 꽃씨를 뿌린대서 찻길이 예쁘지 않습니다. 빈논이나 빈밭에 유채씨 뿌린대서 찻길이 곱지 않습니다.
그저 가만히 놓아 두셔요. 그러면 나무씨앗 풀씨앗 스스로 날려 아름다운 들길이 이루어집니다. 찻길 넓이만큼 사람들 느긋하게 다닐 만한 흙땅을 마련해 주셔요. 그러면 사람들 스스로 이 길을 거닐면서 아름다운 거님길로 일굽니다.
관청에서 돈을 안 들여도 마을사람 스스로 거님길에 씨앗을 심습니다. 관청에서 돈을 안 퍼부어도 마을사람 스스로 열매나무 꽃나무 거님길 한쪽에 심습니다.
길은 마을에서 태어납니다. 길은 마을에서 싱그럽게 숨을 쉽니다. 곧, 집은 마을에서 스스로 일구어 짓습니다. 어여쁜 살림살이 깃든 보금자리는 마을사람 스스로 한 땀 두 땀 기나긴 해에 걸쳐 손질하며 차츰차츰 고운 결과 무늬와 빛으로 거듭납니다.
..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구석에서 산다고, 고층 아파트에서 한겨울에 반팔 옷 입고 살지 않는다고, 유명백화점에서 쇼핑을 하지 않는다고 시골 사람들이 자존심 상해 할 거라는 선입견은 오해다 … 이번 (한미자유무역)협정으로 가장 이익을 보는 쪽은 ‘소비자’이며 가장 손해를 보는 쪽은 ‘농수축산업’이란다 .. (190, 212쪽)
전라도 순천에서 돼지농장 하는 김수자 님이 쓴 《낭만 산골》(종합출판 범우,2009)을 읽습니다. 시골살이 즐기는 사람이 쓰는 책이 무척 드문데, 《낭만 산골》은 참말 시골사람 스스로 시골살이 들려주는 이야기책입니다. 시골내음 밴 이야기요, 시골소리 감도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돼지 한 마리 두 마리 보살피는 냄새까지 글에 담지는 못합니다. 늘 돼지와 어울려 돼지내음 맡는다고 하지만, 농장경영과 농장관리 테두리에서 글을 쓰는 바람에, 여느 수수한 시골사람 목소리까지 차분하면서 조곤조곤 이야기꽃 피우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 한 자락 나올 수 있어 반갑습니다. 순천 돼지농장 아줌마 이야기가 책으로 태어난다면, 고흥 김공장 아저씨 이야기도 책으로 태어나면 재미있겠네 싶습니다. 매생이집 할머니 이야기도 책으로 태어나면 재미있을 테고, 유자농장과 석류농장 아저씨 아줌마 이야기도 책으로 태어나면 재미있을 테지요. 수필이나 산문을 떠나 농사일기나 농장일기를 군청에서 ‘제대로 돈을 들여 펴내어’ 시골마을뿐 아니라 도시사람한테도 읽히도록 하면 참으로 재미나리라 생각합니다.
.. 넓은 산속을 종횡무진 누비고 살던 나는 15층 좁은 아파트에서 어질어질 멀미에 시달리다가 겨우 이틀 밤 자고 서울을 탈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서 시내버스를 탔다가 또 한 건 톡톡히 올렸는데, 이번에는 5천 원권 지폐 한 장을 낸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죄송합니다.” 하고 잔돈 준비 못 한 실수를 사과했지만 때는 늦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고액권이 얼마나 짜증나는 일인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돈을 보고 이렇게 화를 내면 어쩌나? 1만 원권을 냈더라면 아마도 승차거부나 멱살잡이를 당하지 않았을까) 기사님께서 우당탕 동전통을 두드려 쏟아낸 동전을 한참이나 쓸어담아야 했다. 끈적이는 기름때와 먼지에 전 마흔 개의 동전(버스요금이 천 원인 것을 처음 알았다) .. (158∼159쪽)
시골사람이 쓸 글은 시골 이야기입니다. 시골사람은 시골에서 흙 만지는 삶을 글로 쓸 노릇입니다. 시골 군청은 시골사람 누구나 시골 이야기를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어 책이 태어나도록 도울 노릇입니다. 쌀 한 톨 어떻게 빚는지, 김 한 장 어떻게 얻는지, 나물 한 접시 어떻게 뜯는지, 푸성귀 하나 어떻게 마련하는지, 이런저런 숱한 시골살이를 저마다 다른 빛깔로 시골사람 스스로 적바림하도록 북돋울 노릇입니다.
이런 건물 짓거나 저런 공사 벌이는 데에는 돈을 그만 쓰기를 빌어요. 살아가는 이야기 나누고, 아름다이 보금자리 누리는 이야기 길어올려, 사람이 사람답게 어깨동무하는 길을 밝히는 데에 ‘군 예산’ 알뜰살뜰 쓸 수 있기를 빌어요.
이야기가 있기에 길이고, 이야기가 있어서 마을입니다. 이야기가 있을 때에 비로소 정치·교육·문화·예술·행정이 빛납니다. 4346.3.1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