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두 아이 재우면서 자장노래를 부른다. 문득문득 깨닫고 새삼스레 생각한다. 내가 어릴 적에 개구지게 뛰놀지 않았으면, 오늘 이렇게 자장노래 불러 주기는 어렵겠구나. 아마, 어릴 적에 개구지게 뛰놀지 못한 아이들이 자라 어른 되어 새롭게 아이들을 낳으면, 어릴 적 부른 놀이노래가 거의 없는 나머지, 따로 노래테이프나 노래시디를 사다가 틀겠지. 클래식노래를 튼다든지 무슨무슨 노래를 들려준다든지 하겠지. 생각이 좀 없다면, 텔레비전을 하염없이 켠다든지 아무 만화영화나 틀기만 할 테고.


  내 어린 나날, 내 둘레 어른들 늘 하는 말은 “그렇게 놀고 언제 공부할래?”였다. 그러면, 이런 말 하는 어른이 누구인가 먼저 살핀다. 무서운 어른이면 꽁지 빠져라 내빼고, 좀 살가운 어른이면 입을 비쭉 내밀고는 “쳇, 공부할 때에는 공부한단 말예요!” 하고 쏘아붙이다가는, 속으로 생각한다. ‘그래, 공부 너무 안 하고 놀기만 했나? 공부는 좀 이따가 하지 뭐.’


  이리하여, 나는 어릴 적에 ‘어른들이 바라던 공부’는 퍽 게으르게 했다. 때로는 안 하고 넘어가기 일쑤였다. 이 때문만은 아닐 텐데, ‘어른들이 바라던 공부’는 꽤 덜 한 탓에 시험성적이 아주 좋지는 않았다. 인천에서 다닌 학교에서 치면, 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늘 들기는 했지만,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내 마음은 학교 교실에 갇힌 공부보다는, 학교 바깥에서 뒹구는 놀이에 닿았으니까.


  오늘도 작은아이 팔베개를 하며 거의 두 시간 즈음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르며 생각한다. 똑같은 노래를 다시 부르기는 싫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자꾸자꾸 새 노래를 부를 테야.


  이 노래 저 노래 부르다가, 어릴 적 부르던 노래가 하나둘 튀어나온다. 아이들과 살아가지 않았다면 까무룩 잊고 말았을 노래가 갑작스레 솟아나온다. 어, 이런 노래도 부르고 살았구나.


  어릴 적 놀며 부르던 노래를 아이들한테 들려주면서, 내 어릴 적 놀이가 떠오른다. 내가 어린이였을 때에 또래 아이들이랑 뒹굴며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떠오르고, 동무들이랑 얼마나 개구지게 복닥였는가 하는 그림이 환하게 떠오른다.


  오늘날 시골에서는 아주 마땅하지만, 우리 두 아이하고 함께 뒹굴 또래 동무는 옆마을에까지 없다. 어쩌다 이웃집(이웃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도시로 떠난 분들이 낳은) 아이들이 놀러온다 하더라도, 이 아이들은 도시에서 어린이집이나 학원이나 텔레비전이나 장난감에 길든 터라, 우리 아이들하고 뒹굴거나 뛰놀거나 노래부르며 놀지 못한다. 서로 안 어울리고, 같이 못 어울린다. 참 재미없는 아이들이다. 면소재지에 가든 읍내에 가든 똑같다. 오늘날 시골 아이들은 참 재미없다. 뭐, 도시 아이들도 참 재미없지. 놀 줄 모르고 노래할 줄 모른다.


  어딘가에는 잘 놀고 잘 노래하는 아이들이 있겠지. 어느 도시에서는 틀림없이, 또 어느 시골에서는 어김없이, 그야말로 골목스럽고 시골스러운 아이가 꼭 있겠지. 날마다 옷 더럽히고 노래부르며 목 쉬는 아이들 반드시 있겠지.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자라서 둘레에 맑은 웃음과 노래를 들려줄 수 있겠지. 4346.1.2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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