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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와 고무신과 책
아이들과 도시에서 살아갈 적에는 ‘자연·생태 그림책’을 바지런히 장만했습니다. 시골로 옮겨 한동안 지낼 적에도 ‘자연·생태 그림책’을 이럭저럭 장만했습니다. 이제 시골에서 여러 해 지내며 ‘자연·생태 그림책’을 거의 장만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늘 마주하는 숲과 들과 메와 바다를 바라볼 때만큼 가슴을 울렁울렁 뛰도록 북돋우는 ‘자연·생태 그림책’은 좀처럼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속이나 땅속을 깊이 들여다보도록 돕는 몇 가지 그림책은 여러모로 볼 만하지만, 이 또한 아이들과 온몸으로 흙과 물을 부대끼면 훨씬 깊고 넓게 흙이랑 물을 느끼면서 알 수 있어요.
내가 도시에서만 살아갔으면, ‘자연·생태 그림책’ 이야기를 줄기차게 썼으리라 생각합니다. 도시에는 자연도 생태도 없으니까요. 도시에는 숲도 들도 메도 내도 바다도 없으니까요. 부산은 코앞에 바다가 있다지만, 막상 부산사람 스스로 바닷물을 ‘너른 목숨 살아가는 터’로 받아들인다고는 느끼지 못합니다. 그냥 바다가 코앞에 있을 뿐이에요.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고, 바다 앞에 아파트 높이 세울 뿐이에요. 자연이 있어도 자연을 느끼지 못하고, 숲이 있어도 숲을 돌보지 못해요.
풀 한 포기를 아낄 때에 숲을 아낍니다. 꽃 한 송이를 사랑할 때에 이웃을 사랑합니다. 나무 한 그루를 보살필 때에 내 살붙이를 보살핍니다.
비록 우리한테 땅뙈기 하나 아직 없지만, 대문을 열고 마실을 다니면, 온 마을 어디에나 논이고 밭입니다. 이웃논 이웃밭을 들여다보며 벼포기를 쓰다듬고 마늘잎을 어루만집니다. 들풀을 간질이고 들나무를 마주합니다. 벼포기 하나가 책이 되고, 들꽃 한 송이가 사전이 됩니다. 나무 한 그루가 도감이 되며, 구름 한 자락이 다큐멘터리가 됩니다. 4346.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