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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사상과 작가정신
최민식 지음 / 로도스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생각하는 삶과 사진하는 마음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50] 최민식, 《사진의 사상과 작가정신》(로도스,2012)
- 책이름 : 사진의 사상과 작가정신
- 글·사진 : 최민식
- 펴낸곳 : 로도스 (2012.12.7.)
- 책값 : 18000원
ㄱ. 생각하는 삶
여름 아닌 겨울인데, 새벽에 문득 ‘아차, 엊저녁 잠자리 들기 앞서 쌀을 안 불렸네.’ 하고 깨닫습니다. 여름이라면 새벽에 누런쌀 씻어서 불려도 아침에 밥을 지어 먹을 만합니다. 겨울이라면 이른아침에 불린 쌀을 저녁에 지어 먹어도 덜 풀어집니다. 하루쯤 넉넉히 불려야 제맛이 납니다.
날마다 밥을 지어 먹으면서도 때때로 깜빡 잊습니다. 내가 깜빡 잊으면 식구들 아침을 어찌 할까 싶은데, 문득 새로운 생각 하나 떠오릅니다. 어차피 아침에 밥하기 힘들면, 아침에는 고구마를 찔까. 스텐냄비에 불을 아주 작게 올려 오래오래 익히면 고구마가 퍽 맛납니다. 고구마도 찌고 감자도 찌면 아침거리가 될 만합니다. 여기에 국 하나 끓이면, 아침을 홀가분하게 넘길 만하리라 싶습니다.
엊저녁 늦게까지 잠들지 않던 아이들은 아침에 늦게까지 꿈나라를 누빕니다. 그래, 늦게 잤으니 늦게 일어나는구나. 고맙네. 그래도, 너희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쪽이 더 나은데. 다만, 한겨울이니까, 늦게까지 꿈나라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일도 좋겠지. 너희들이 느긋하게 꿈결을 누빌 때에, 아버지도 아침을 한결 느긋하게 누릴 수 있어 좋다.
달력 날짜로 새해를 맞이한 아침, 홀로 물 한 그릇 마시고 찬물로 낯을 씻습니다. 수도물 아닌 샘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오래 품다가, 식구들 다 함께 시골로 살림을 옮긴 지 여러 해 됩니다. 늘 마음속으로 생각을 품기는 했지만, 정작 몸으로 옮겨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옆지기가 바라고 또 바라며, 말하고 또 말한 끝에 도시살림을 접고 시골살림으로 옮겼습니다. 옆지기로서는 이녁 몸과 마음을 살리고 살찌우는 길이 시골살림이니까 시골살이를 바랐을 테지만, 한솥밥 먹는 살붙이로서 돌아보면, 옆지기뿐 아니라 나도 아이들도 시골살이가 서로서로 즐거우며 아름다운 빛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골에서는 아이들이 저희 마음껏 뛰놀 수 있습니다. 목청껏 노래를 부르거나 소리를 지를 수 있습니다. 쿵쿵쾅쾅 발을 구르며 뛰고 달릴 수 있습니다. 자동차 지나간다며 눈치를 볼 일이 없습니다. 한겨울 찬눈을 맨손으로 뭉치며 손이 꽁꽁 얼어도 되고, 언손은 이불 밑에 넣고 녹이면 됩니다. 따사로운 햇살이 참말 얼마나 따사로운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포근하거나 차갑거나 시원하거나 서늘한 바람을 그때그때 온몸으로 느낍니다. 풀빛이 왜 ‘푸른’지를 몸과 마음으로 깨닫습니다. 나무가 이웃이고 들이 벗이며 멧골이 동무입니다. 바다가 너나들이요 숲이 씨동무입니다.
한 해 갈무리하는 마을모임에서, 마을 할아버지들이 입을 모아 ‘빨래터를 시멘트로 메워 없애자’고 외칩니다. ‘마을 여자(할머니)’들이 틈틈이 청소를 해서 이끼 안 끼도록 해야지, 보기 나쁘다고들 말씀합니다. 할머니는 집에서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논일 밭일 함께합니다. 할머니더러 마을 빨래터 청소까지 도맡도록 시키는 모습은 좀 껄쩍지근합니다. 할아버지들이 함께해도 되잖아요. 예부터 그랬다느니 어쨌다느니 하지 말고, 남녀를 따로 가리거나 누가 더 높으니 나으니 하지 말고, 함께 치우고 돌보면 되잖아요.
면소재지 철물점에 들를 일이 있으면, 자루 길다랗게 붙은 수세미 몇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마을 어르신들 보기에 빨래터가 지저분하다면, 우리 식구가 빨래터를 정갈히 치우고, 아이들 물놀이터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늘 생각은 하는데, 막상 자전거 몰아 면소재지 찾아갈 때면, 철물점 들러 긴자루수세미 장만하자던 생각을 깜빡깜빡 잊습니다. 쪽종이에 적어 주머니에 넣을 때에는, 쪽종이에 적은 줄 깜빡 잊습니다.
.. 요즘은 자신을 희생하는 법은 알지 못하면서 야심만 가득 찬 예술가들이 너무 많다 … 한 사람의 손에 카메라를 쥐어 주는 것은 “이제 당신은 당신이 보는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 요즘 일부 사진가들은 교묘하게 겉치레를 꾸며내어 결국은 대중을 우롱하고 사진을 우롱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곤 한다. 위대한 사진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생활을 예술 작품이 되게 해야 한다 .. (5, 13, 25∼27쪽)
아이들과 살아가는 나날을 언제나 사진으로 담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 삶을 하루라도 사진으로 담지 않으면 어딘가 허전하고 아쉽습니다. 마치 내 삶이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날마다 아이들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으면서도, 날마다 이 사진들을 갈무리하지는 못합니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하고 지나가고 마는 사진이 많습니다. 때로는 여러 해 뒤에 겨우 갈무리하는데, 어느 때는 여러 해 지나더라도 못 들추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아버지가 도맡는 집일을 몇 가지 나누어 맡는다면, 때로는 아이들이 빨래도 하고, 집안 청소도 한다면, 아버지가 미처 못하는 이런저런 집일을 나누어 준다면, 아버지는 ‘예전에 찍은 아이들 사진’을 찬찬히 갈무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참말, 사진은 그때그때, 그러니까 사진을 찍은 그때그때 갈무리할 때에 더없이 빛납니다. 그때그때 누리며 즐기고 나누려고 찍는 사진인걸요.
한참 잊고 지나간 뒤, 이를테면 두서너 해쯤 지나서 ‘예전에 미처 갈무리 못 한’ 사진을 들여다볼 때면, 참 새삼스럽구나 싶습니다. 내가 나 스스로 우리 아이들 사진을 이토록 빛나는 결과 무늬와 넋으로 곱다시 담았네, 하면서 놀랍니다. 나 스스로 내 사진을 바라보며 놀랍니다.
오래오래 우리 아이들 사진을 바라보며 생각에 젖습니다. ‘나와 옆지기가 낳아서 돌보는 우리 아이들’이라서가 아닙니다. ‘내가 찍은 사진’이라서가 아닙니다. 나 스스로 가장 따스하며 가장 넉넉하고 가장 즐거운 넋으로 찍은 사진일 때에는, 내가 내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웃음을 짓고 눈물에 젖으며 사랑을 깨닫습니다.
나는 내 사진을 볼 때부터 내 마음이 뭉클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나 스스로 뭉클뭉클 기쁨과 보람을 누리는 사진을 찍을 노릇이지요. 멋스러이 보인다거나 예쁘장하게 보이는 사진이 아니라, 숱한 이야기 서린 사진이로구나 하고 느낄 만한 사진을 찍을 노릇이지요.
내가 내 사진을 쩌릿쩌릿 아름답게 누릴 수 있으면, 내 곁 다른 이들이 찍은 사진을 들여다볼 때에도 짜릿짜릿 아름답게 누릴 수 있습니다. 내 삶에서 나부터 내 사진을 아름다이 일굴 때에, 비로소 내 이웃들이 저마다 아름다이 일구는 삶에서 길어올리는 아름다운 사진을 알아보면서 함께 좋아할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 내 삶이 곧 예술이기 때문에, 삶이 무기력해지면 작품도 똑같이 무기력해진다 … 우리는 사진이 당순한 기법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 그것은 내용인가? 만약 그렇다면 내용이란 무엇인가? 사진가들은 이런 기본적인 문제에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 사진 작품은 생활에서 드러나는 표현이다 … 한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는 과거를 살아간 사람들의 무수한 이야기가 들어 있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한다 .. (16, 28, 78, 153쪽)
생각해 보셔요. 웃음이 맑고 눈빛이 밝은 아이들을 찾아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하지 않아요. 나와 함께 이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이 맑은 웃음과 밝은 눈빛으로 뛰놀도록 내 하루를 북돋우면 돼요. 바로 이곳에서 우리 아이들과 사랑스러운 삶을 일구면서 날마다 기쁘게 사진을 찍으면 돼요.
웃음 맑은 아이들은 라오스나 캄보디아에만 있지 않아요. 모잠비크나 소말리아에 있을 눈빛 밝은 아이들은 ‘우리 집 우리 아이’하고 똑같은 아이예요. 내가 내 보금자리에서 무언가 느끼며 생각하는 가슴일 때에, 내 아이부터 꾸밈없이 바라볼 수 있고, 이웃 아이도 수수하게 마주할 수 있어요.
저잣거리에 거적 하나 깔고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길장사 하는 할매와 할배란, ‘낯설거나 남남’인 사람이 아닙니다. 나한테는 ‘모르는’ 사람일는지 모르나, 누군가한테는 어머니요 아버지입니다. 곧, 어떤 늙은 사람을 사진으로 담는다 할 적에는 ‘내 어머니와 내 아버지’라 할 다른 누군가를 사진으로 담는 셈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이녁 어머니와 아버지를 사진으로 담으면 ‘늙은 사람 주름살’을 애틋하게 아로새기는 사진빛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아직 잘 모르는 나라, 아직 잘 모르는 마을, 아직 잘 모르는 사람 들을 찾아나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나를 낳고 돌본 어버이와, 바로 내 곁에서 삶과 꿈을 나눈 동무와, 바로 나랑 함께 살아가는 살붙이는 얼마나 잘 알까요. 살붙이와 동무와 이웃조차 잘 모르면서, ‘또 다른 잘 모르는’ 사람을 찾아나서며 사진여행을 떠나는 모습은 아닐까요.
.. 창조주는 우리를 창조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창조성은 신이 우리에게 내려준 선물이다 … 자신의 창조 열정을 발산하면 당사자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난다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은 우리의 삶 자체다. 예술은 결코 특별한 게 아니다. 일상적인 삶의 연속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결과물이 아름다우면 그것이 곧 예술이다 …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살아 있는 역사를 만들었던 것은 정치가가 아니라 삶의 심연을 탐구하는 예술가들이었다 .. (16, 18, 63, 90쪽)
생각이 삶을 이끕니다. 생각하는 모습이 삶으로 드러납니다. 생각이 삶을 빚습니다. 생각하는 이야기대로 삶이 흐릅니다.
멋진 사진을 찍고 싶은 사람은, 참말 멋지다 싶은 모습을 찍는 사진길을 걷습니다. 거룩한 사진을 찍고 싶은 사람은, 참말 거룩하구나 싶은 모습을 찍는 사진길을 걷습니다. 사랑스러운 사진을 찍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예 사랑 가득 담기며 사랑 물씬 피어나는 모습을 나누는 사진길을 걸어요. 사진을 찍어 돈을 벌고 싶은 사람은, 아주 마땅히 사진 하나로 돈을 버는 사진길을 걷습니다.
좋고 나쁘다든지, 옳고 그르다든지, 하는 금긋기는 없습니다. 생각이 이끄는 사진일 뿐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이루며 누리는 사진입니다.
ㄴ. 사진하는 마음
사진 한길 걷는 최민식 님이 쓴 사진이야기를 그러모은 《사진의 사상과 작가정신》(로도스,2012)을 읽습니다. 최민식 님은 《사진의 사상과 작가정신》에서 사진넋과 사진삶을 밝히려고 힘씁니다. 2012년까지 쉰다섯 해 걸어온 사진길을 톺아보면서, 이제 막 걸음마를 떼려는 젊은 사진쟁이한테 물려주고 싶은 사진넋을 하나하나 들려주려고 애씁니다. 이 나라에서 태어나 한국사진을 일굴 젊은이한테 남기고 싶은 사진이야기를 찬찬히 가다듬어 선물로 나누어 주려고 합니다.
.. 우리 사진가들의 테크닉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의식이 없고 형식에만 치중한 결과, 내용의 빈곤성이 느껴지는 것이다 … 내용이 없고 고뇌가 없는 작품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풍요롭고 드라마틱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확인시켜 준다는 측면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은 매우 매혹적인 장르다 … ‘피사체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작아지면 창의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잦아드는 법이다 .. (122, 129, 198, 271쪽)
최민식 님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오직 하나입니다. ‘사진길을 걷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입니다. ‘어떤 사진기를 쓰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사진기를 손에 쥐느냐’입니다. ‘작품을 만드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떤 삶을 일구려 하느냐’입니다. ‘사진을 배우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매무새를 갖추느냐 못 갖추느냐’입니다.
사진 한길 걷는다고 대단하지 않습니다. 출판 한길 걷는다든지, 노래 한길 걷는다든지, 영화 한길 걷는다든지, 요리사 한길 걷는다든지, 그닥 대수롭지 않습니다. 한길을 걷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내가 선 이 길을 어느 만큼 아끼고 사랑하면서 즐기느냐입니다.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한길이기에 더 아름답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 같은 수렁에 휩싸여 제 갈 길 모르는 채 어지러이 떠돈대서 볼썽사납거나 딱하지 않습니다. 흙을 일구든 말든, 정치판을 떠돌든 말든, 스스로 이녁 삶을 얼마나 누리며 좋아하느냐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쟁이’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쟁이’입니다. 높거나 낮거나 하지 않습니다. 흙을 만져 ‘흙일꾼’이에요. 집에서 살림을 맡으니 ‘살림꾼’이에요. 농사꾼을 거룩하게 우러르거나 이 땅 어머니들을 훌륭하게 섬길 까닭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살가이 어깨동무할 수 있으면 돼요. 서로 이웃이 되고, 함께 동무로 지내면 돼요. 내 밥을 내 손으로 건사하고, 내 옷을 내 손으로 간수하며, 내 집을 내 손으로 보살필 줄 알면 됩니다.
내 사진은 내 손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빛냅니다.
.. 사진은 그 어떤 권력이나 돈으로도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준다. 새롭고 발전된 생각, 올바른 삶을 위한 용기와 힘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 우리는 공모전을 중심으로 예쁜 사진, 아름다운 사진에만 치중하고 있다. 외국 사진가들은 지구를 누비면서 인류를 위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다 .. (166, 290쪽)
이 땅 어머니들은 ‘인류 역사나 문명을 지키려’고 밥을 짓지 않았습니다. 배고픈 새끼(딸아들)들 ‘든든히 먹고 기운 내라’면서 밥을 지어 차려 주었습니다. 이 땅 아버지들은 ‘지구 환경과 자원을 지키려’고 숲을 보듬거나 들을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알맞게 먹고 살뜰히 아끼면서 오래오래 숲과 들을 정갈히 이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내가 마시는 물은 내 아이가 마시는 물이요, 내 아이가 마시는 물은 먼먼 뒷날 아이들이 마실 물이에요. 내가 짓는 집은 내가 사는 집이요, 내 아이와 살아가는 집이면서, 먼먼 뒷날 새 아이들이 살아갈 집입니다.
고작 쉰 해를 못 버티고 허물어야 하는 아파트는 ‘오늘 내가 살아갈’ 보금자리조차 못 됩니다.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한 보금자리 구실마저 못합니다. 먼먼 뒷날 이 땅 아이들한테 ‘오늘 번쩍거리듯 지어 세운 아파트’는 어떤 값을 할까요. 재개발 한다면서 허문 아파트에서 나올 어마어마한 쓰레기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늘 우리가 자동차 몰며 내뿜는 배기가스는 우리 아이들한테 어떤 ‘문화유산’ 되어 남을까요. 오늘 우리가 쓰고 버리는 어마어마한 쓰레기는 우리 아이들한테 어떤 ‘물질문명’으로 남는가요.
사진을 찍는 까닭은 남기고(기록하고) 싶기 때문인가요? 무얼 남겨야 하지요? 사진으로 남길 모습이 아니라, ‘참모습을 지켜서 물려줄’ 노릇 아닐는지요? 정갈한 숲과 사랑스러운 마을을 사진으로 찍어 남겨서 보여준들 무엇 합니까. 정갈한 숲과 사랑스러운 마을을, 우리 뒤에 이곳에서 살아갈 아이들이 몸으로 누리도록 해야지요. 아름다운 사람들 얼굴을 사진으로 찍어 남긴다 해서 아무 뜻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나 스스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나 스스로 아름다운 얼굴이 되어, 우리 아이들 앞에서 ‘몸으로 느끼고 삶으로 누릴’ 이야기가 될 노릇이라고 느껴요.
.. 참으로 일상적인 삶을 뚫어지개 바라보는 사람이라야 좋은 사진을 창작하게 된다. 사진은 삶이다. 삶이 곧 사진인 것이다.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탄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감성이다 … 사진은 물리적으로 사진기가 만들지만 ‘사진의 마음’은 사람이 만든다.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지만, 아무나 사진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훌륭한 예술이란 보기 좋은 예술이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느낌과 영감을 주는 예술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끌려가지 마라. 실패에 좌절하거나 칭찬에 기뻐하지 말고 꾸준히 자신만의 길을 가라 .. (300, 315, 328쪽)
흔히, 사진을 일컬어 ‘기록’이라고 하지만, 사진은 어느 모로 보나 ‘기록’이 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책도 영화도 모두 ‘기록’일 수 없다고 느껴요. 아니, 기록이 되고 싶으면 기록은 되겠지요. 그러나, 기록이 되기만 한다면 아무 값도 뜻도 꿈도 사랑도 없으리라 느껴요. 사진은 무엇보다 ‘이야기’가 되어야 해요. 이야기가 되는 사진이라야, 비로소 값도 뜻도 있으며, 꿈도 사랑도 담길 테지요. 이야기를 빚는 사진일 때에, 바야흐로 누구나 즐기고 누리는 웃음꽃 눈물열매 나누어 줄 테지요.
최민식 님이 찍은 사진을 그러모은 사진책 《사람(human)》은 ‘기록’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기록원에서 최민식 님 필름 15만 장을 ‘갈무리(기록)’해 준다고 하는데, 최민식 님 필름은 국가‘기록’원 아닌 다른 곳에 모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국가‘기록’원 ‘기록’실, 그러니까 창고(문서보관실)에 들어갈 필름이 아니라, 최민식 님이 사진을 찍은 저잣거리 한켠 자그마한 여느 살림집에 건사할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이나 전시관 같은 데가 아닌, 누구나 스스럼없이 드나드는 ‘이웃집’ 같은 데에 정갈히 건사해서, 누구나 즐겁게 만나고 웃음과 눈물로 이야기꽃 피우도록 북돋우는 이야기밥으로 삼아야지 싶습니다.
사진이 삶인 까닭은, 사진이 이야기이기 때문이니까요. 사진이 삶이 되고 삶이 사진이 되는 까닭은, 바로 이야기꽃을 흐드러지게 피우려 하는 우리 삶이요 사진이며 사랑이기 때문이니까요.
사진하는 마음이란, 살아가는 마음입니다. 사진하는 마음이란,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진하는 마음이란,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사진하는 마음이란, 즐기는 마음입니다. 사진하는 마음이란, 어깨동무하면서 살림하는 마음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진밭에서 돋보일 만한 사진이 좀처럼 태어나지 못한다고 한다면, 아직 삶을 살가이 아끼거나 사랑하거나 좋아하거나 즐기거나 어깨동무하거나 살림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문 탓이라고 느낍니다. 사진이란 쉬워요. 삶을 누리면 돼요. 사진은 참 쉬워요. 삶을 사랑하면 돼요. 사진찍기는 참말 쉬워요. 내 삶을 나 스스로 빛내면 돼요. 사진읽기는 더할 나위 없이 쉬워요. 날마다 활짝 웃고, 언제나 신나게 뛰놀면 돼요. 4346.1.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