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이야기 글쓰기

 


  대통령이 바뀌면 ‘대통령이 바뀔’ 뿐입니다. 내 삶도 내 마을살이도 내 나라살이도 바뀌지 않아요. 내 삶이 바뀌기를 바라면, 내 삶이 앞으로 어떠한 길로 나아가면서 아름답게 바뀌면 즐거울까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이 생각을 기쁘게 몸으로 옮기면 돼요. 나 스스로 내 삶을 아름다운 길로 접어들도록 즐겁게 힘쓰며 누릴 때에 내 삶이 바뀌어요. 내 삶이 바뀔 때에 내 마을살이가 바뀌며, 내 마을살이가 바뀌면서 내 나라살이가 함께 바뀌어요.


  대통령으로 누구를 뽑느냐 안 뽑느냐는 그닥 대수롭지 않아요. 가게에 가서 새우깡을 사든 감자깡을 사든 대수롭지 않아요. 저마다 입맛에 맞추어 달리 고를 뿐이지만, 가게에 놓는 과자는 모두 공산품이에요. 풀약과 비료와 항생제를 안 쓴 기름진 밭에서 거둔 푸성귀를 숲에서 나무를 한 장작으로 불을 지펴서 익히거나 굽거나 볶거나 데쳐서 거두는 먹을거리가 가게에 놓이는 일은 없어요. 그러니까, 내 몸을 살찌우는 가장 맛나며 좋은 먹을거리를 바란다면, 스스로 가장 기름지며 정갈한 밭을 일굴 노릇이에요. 스스로 삶을 바꾸어야 먹을거리를 맛나게 누리거든요.


  아이를 새로 낳아야 ‘예쁘며 똑똑한 아이’와 살아갈 수 있지 않아요. 어버이로서 예쁘고 똑똑하게 살아갈 적에 우리 아이 또한 예쁘며 똑똑한 사람살이가 무엇인가를 곁에서 늘 지켜보면서 차근차근 받아들여 살아갈 수 있어요.


  사람살이를 헤아릴 적에 내 삶을 다스릴 수 있어요. 내 삶을 다스리는 길에서 대통령이 누가 되든 대수롭지 않아요. 내 삶을 아끼는 길에서 시장이나 군수가 누가 되든 대단하지 않아요. 대통령 때문에 내 삶이 흔들린다면 내 삶은 뿌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시장이나 군수 때문에 내 삶이 무너진다면 내 삶은 기둥이 없다는 셈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랄 일은 아니라고 느껴요. 대통령은 ‘될 만한’ 사람이 됩니다. ‘될 만한’ 사람이라서 ‘아름답다’거나 ‘훌륭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 눈높이와 깜냥에 걸맞는 ‘될 만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곧, 나 스스로 아름답게 삶을 일구면서 사랑을 나눈다면, 대통령이 ‘될 만한’ 사람은 이러한 그릇이에요. 나 스스로 아름답지 못하고 사랑스럽지 못한 채 톱니바퀴나 쳇바퀴처럼 허덕이는 나날이라 한다면, 이러한 얼거리에서 대통령이 ‘될 만한’ 사람은 이러한 굴레를 더 단단히 들씌우면서 사회를 억누르는 그릇이겠지요.


  ‘노동자 대통령’이나 ‘농사꾼 대통령’이 뽑히지 못하는 까닭은, 이 나라 사람들 스스로 ‘노동자 삶을 누리지 않거나 노동자 삶하고 등지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 사람들 스스로 ‘농사꾼 삶을 즐기지 않거나 농사꾼 삶하고 등돌리’는데, 농사꾼 대통령이 나올 턱이 없어요.

  이 나라에서는 ‘여성 대통령’도 나올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는 옳고 바른 평등이 자리잡지 않아요. 사랑스럽고 믿음직스러운 평등이 싹트지 않아요. 사내와 가시내가 서로 사랑한대서 혼인을 한다지요? 그런데 혼인을 하는 예식장부터 ‘사내 쪽 집안’ 흐름대로 가요. 혼인잔치를 마치고는 혼인마실을 끝내서 집으로 돌아가면 ‘사내 쪽 아버지 집안’ 흐름을 좇아 제사이니 명절이니 인사이니 어쩌니 하면서 끝없이 휘둘리거나 끌려다니기만 해요. 우리 사회에 평등이 있을까요. 남녀평등을 넘어 계급평등이나 학력평등이나 재산평등이나 지식평등이 있을까요. 이런 사회에서는 ‘여성 대통령’이든 ‘장애인 대통령’이든 뽑힐 수 없어요. ‘성별만 여성’이라 해서 여성 대통령이 아니에요. 삶을 아름답게 누리고 펼치며 보듬는 ‘따사로운 어머니 손길’인 여성 대통령일 때에 비로소 올바른 ‘여성 대통령’이에요. 곧, 성별이 남성이라 하더라도 따사로운 어머니 손길로 평등을 이루려 한다면, 이이는 ‘여성 대통령’인 셈입니다.


  대통령 이야기를 글로 쓰는 일은 덧없습니다. 내 이야기를 글로 쓰면 됩니다. ‘내 삶 이야기’가 바로 ‘어떤 대통령을 바라는’가를 보여줍니다. 4345.1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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