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야
김홍모 지음 / 북스(VOOXS)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17

 


내가 좋아하는 12월 맞는 첫날
― 누나야
 김홍모 글·그림
 북스 펴냄,2009.3.18./9000원

 


  전남 고흥 시골집에서는 12월이 되어도 김이 나오지 않습니다. 깊은 밤이나 때이른 어둑어둑 새벽에는 김이 살짝 나오는구나 싶지만, 햇살이 드리우는 아침부터 별이 반짝이는 저녁까지 입김을 보지 못해요. 옆지기 동생이 시집을 가기에 모처럼 경기 일산으로 마실을 나오고 보니, 순천역에서 떠난 기차가 용산역에 닿아 내려 택시를 불러 타기까지, 또 일산집에 내려 짐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는 동안, 입에서 나오는 숨결이 하얀 김이 되어 파르르 흩어집니다. 오, 겨울이로구나. 찬바람이로구나. 비로소 겨울 느낌을 누립니다.


  나는 12월이 다가오면 가슴이 콩닥콩닥 뜁니다. 한 해를 마무리한다는 12월이라고들 일컫지만, 나로서는 12월이 한 해를 처음 여는 달이라고 느낍니다. 왜 그런고 하니, 내가 내 어버이한테서 고운 사랑을 받아 태어난 달이 12월이거든요. 게다가 12월 가운데에서도 ‘큰눈 절기’에 태어났어요. 겨울에 태어났고, 12월에 태어났으며, 큰눈 절기에 태어난 내 목숨이 얼마나 예쁘며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나를 이렇게 뜻깊은 날에 맞추어 이 땅으로 맞아들인 어버이가 얼마나 고마우며 어여쁜지 모릅니다.


  막상 12월에 큰눈을 구경한 일은 드물지만, 인천이라는 바닷마을에서 살아가느라 어쩔 수 없기도 했다고 느껴요. 인천은 서울 곁에서 ‘공산품 만들어 올려보내는 공장도시’ 구실을 맡거든요. 동네마다 크고작은 공장이 수두룩하게 있어 바람이 매캐해요. 서울사람 쓰고 버린 쓰레기를 인천에 파묻어요. 서울 꽃섬도 쓰레기섬이지만, 인천 변두리도 서울사람 쓰레기 묻는 터예요. 게다가 서울사람 쓰는 전기를 인천에서 만들고, 서울사람이 쓰고 버린 물을 인천에서 받아들여 인천 앞바다로 풀어놓잖아요. 이렇게 쓰레기와 매연이 가득한데다가, 온갖 수출입 짐꾸러미를 인천항에서 보내고 받고 부리고 나르고 하니까, 자동차 배기가스마저 끔찍해요. 이런 도시에는 눈이 내려도 뿌옇기 일쑤이고, 눈이 잘 안 내려요.


.. “누나야, 배고프다.” “빨래하고 와서 먹자. 호미하고 바가지 챙겨.” ..  (3∼4쪽)


  일산집에서 언손을 호호 녹이며 입김을 만듭니다. 두 아이는 일산집 개들이랑 놀면서 입김이 자그맣게 호호 나옵니다. 나는 애 입김을 바라보며 놀고, 아이들은 저희 입에서 입김이 나오는 줄 모르면서 까르르 웃고 떠듭니다.


  부산스레 놉니다. 낄낄 깔깔 놉니다. 엎어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면서 놉니다. 몸이 너무 차가우면 방으로 들어가서 이부자리에서 뒹굴며 놉니다. 일산 이웃집에서 우리 아이들한테 선물로 준 자그마한 놀잇감 자동차를 갖고 놉니다. 연필과 공책으로 놀고, 넓은 종이를 깔아 그림을 그리며 놉니다.


  깊은 밤 바깥으로 나오면, 일산 변두리에 있는 이곳에서 별을 조금 올려다볼 수 있습니다. 코앞에 우람한 송전탑이 있어 안타깝지만, 까만 밤하늘에 자그마한 별빛이 반짝반짝 예뻐요. 그런데 이 조그마한 몇몇 별조차 일산 시내로 간다든지, 서울 언저리로 들어간다든지 하면 하나도 안 보입니다. 보름달이 뜨든 초승달이 뜨든 도시 밤하늘에서는 달빛조차 어림할 수 없어요.


  무엇보다 도시에서는 눈을 느긋하게 구경하지 못합니다. 도시사람은 눈이 오기 무섭게 염화칼슘을 뿌리고 모래를 뿌려요. 길에 눈이 안 쌓이게 한다며 부산합니다. 왜냐하면, 자동차가 다녀야 하니까 길바닥에 눈이 있으면 안 된다고 여겨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눈송이를 뭉쳐 눈놀이를 하거나 눈사람을 굴리도록 눈을 두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눈을 밟으며 발자국 내는 기쁨을 누리게 하지 않아요. 언제나 자동차를 먼저 생각합니다. 늘 자동차가 맨 먼저입니다.


  그러고 보면, 도시에 있는 길은 모두 자동차를 생각해서 놓은 길이지, 사람을 생각해서 놓은 길이 아니에요. 사람이 즐거이 오가도록 꾀하며 놓은 길이란 없어요. 자동차가 다니기 좋도록 길그림을 좍 펼쳐서 골목집을 쭉 밀고는 길을 반듯하게(?) 편다고 해요.


.. 누나는 빨래를 하고, 꼭지는 다슬기를 잡아요 ..  (10∼11쪽)


  해가 날 적에는 해가 나기에 즐겁습니다. 비가 올 적에는 비가 오기에 즐겁습니다. 바람이 불 적에는 바람이 불기에 즐겁습니다. 눈이 올 적에는 눈이 오기에 즐겁습니다. 시골마을에서는 해와 비와 바람과 눈을 그때그때 다 다르게 누립니다. 구름이 끼면 구름마다 모양이 다른 모습을 느낍니다. 바람이 부는 때에도 바람결이 늘 달라요. 고요히 잠든 바람이 있고 휭휭 몰아치는 바람이 있어요. 바람에 나뭇잎 날아다니기도 하고, 여름철에는 나뭇잎이 반짝반짝 눈부시기도 해요.


  봄에는 봄바람을 쐬는 빨래에 봄기운이 스며듭니다. 여름에는 여름햇살을 받는 빨래에 여름기운이 젖어듭니다. 가을에는 가을빛을 받아들이는 빨래에 가을기운이 감돕니다. 겨울에는? 겨울에는 겨울눈 소복소복 내리기도 하는 차가운 기운이 가만히 물들어요.


  겨울 문턱에 들어서는 12월은 차고 따가운 바람이 몸속 구석구석 들어옵니다. 오들오들 떨다가도 ‘아, 춥네.’ 하고 웃습니다. 참말 12월에는 첫 찬바람이 새록새록 즐겁게 차가든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습니다. 어기적어기적 걷습니다. 무릎이 시리면 콩콩 뜁니다. 달음박질을 칩니다. 껑충껑충 뛰면서 폴짝폴짝 납니다. 손을 비비면서 추위를 녹이고, 아이들 볼에 내 볼을 대면서 서로서로 따순 기운을 나눕니다. 여름에는 아이들 안고 다닐 적에 땀이 후끈후끈 솟지만, 겨울에는 아이들 안고 다니며 서로 따뜻합니다.


.. 집에 갈 때는 누나 손을 꼭 잡고 가지요 ..  (19쪽)


  김홍모 님이 당신 이럴 적 이야기를 담았다고 하는 그림책 《누나야》(북스,2009)를 읽습니다. 애틋하게 그리는 누나와 얽힌 고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참말, 형제 자매 여럿 있는 집안에서는 아이들이 서로서로 돕고 아끼면서 자라요. 형아가, 오빠야가, 누나야가, 언니야가, 저마다 살가우며 사랑스럽습니다. 살몃살몃 짓는 웃음이 곱습니다. 와하하 터뜨리는 웃음이 시원스럽습니다. 빙그레 짓는 웃음이 상냥합니다. 까르르 터뜨리는 웃음이 푸릅니다.


  삶이란 웃음입니다. 사랑이란 웃음입니다. 어버이는 사랑으로 아이들을 낳고, 아이들은 저마다 아끼고 보듬으며 돌보는 사랑으로 무럭무럭 큽니다. 아이들은 씩씩하게 자라 새롭게 어버이가 되어 이녁 어버이가 물려준 사랑을 저희들이 새로 낳는 아이들한테 이어줍니다.


  사랑이 씨앗 되어 밭에 드리웁니다. 사랑이 밭에서 튼튼히 자랍니다. 사랑이 흐드러지고 사랑이 꽃으로 피어나며 사랑이 소담스러운 열매로 나타납니다. 사랑이 있기에 오늘 하루를 누립니다. 사랑이 있어 그림쟁이가 되거나 글쟁이가 되거나 사진쟁이가 되어 이녁 어릴 적 함빡 누린 사랑을 책 하나에 알뜰히 담습니다. 김홍모 님이 앞으로도 당신 어릴 적 고운 사랑이야기와 꿈이야기를 새록새록 빚어서 즐거이 나눌 수 있기를 빌어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그림을 읽는 사람도, 바로 스스로 누린 사랑을 들려주는 이야기가 가장 즐겁고 아름답습니다. 4345.1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