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멍청이

 


  이 나라에 날이 갈수록 ‘전문가’라 일컬을 만한 사람이 늘어난다. 이를테면, 생물학 박사라든지,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라든지, 주식투자 잘 하는 사람이라든지, 정치를 잘 하는 사람이라든지,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든지, 법원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든지, 세무서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든지, 총을 든 군인이라든지, 몽둥이를 든 경찰이라든지, 양복을 걸친 검사라든지, 수없이 많은 전문가라 일컬을 사람이 생긴다.


  또한, 초·중·고등학교에 교사라 일컫는 전문가가 있다. 학교에는 상담만 맡는 전문가하고, 양호실에 있는 전문가에다가, 영어만 가르친다거나 과학만 가르친다는 전문가가 있다. 버스나 기차나 비행기를 모는 전문가가 있다.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는 전문가가 있다. 보일러를 고치거나 전기를 다는 전문가가 있다. 다리미를 든 전문가와 빵을 굽는 전문가가 있으며, 과일을 파는 전문가와 물고기를 파는 전문가가 있다. 머리를 깎는 전문가, 옷을 다루는 전문가, 집이나 땅을 사고파는 전문가가 있다.


  여느 살림집에는 집일을 도맡으며 밥을 차리는 사람이 있다. 이들 또한 뜻하지 않게 어느새 전문가처럼 집일을 한다. 아이들은 어린이집과 유치원과 학교를 거치면서 손전화 기계 다루는 전문가가 되는 한편, 피시방에서는 인터넷게임 전문가가 된다. 대학생쯤 되면 영어를 제법 할 줄 아는 전문가로 거듭나기도 한다.


  자격증 없는 사람이 없다 할 만하고, 새 자격증은 끝없이 생긴다. 그런데 좀처럼 한 가지 전문가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흙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빚는 전문가는 나타나지 않는다. 흙을 살찌우고 숲을 보살피는 전문가는 도무지 태어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흙을 아끼고 숲을 사랑하는 사람은 ‘전문가’가 아니다. 이들은 그저 ‘사람’이다.


  사람이란 어떤 목숨인가. 말을 할 줄 알면 사람인가? 머리를 써서 일을 하거나 연필을 잡고 글을 쓸 줄 알면 사람인가? 두 다리로 걷고 두 손으로 물건을 쥐면 사람인가?


  나는 어떠한가 생각한다. 나는 ‘사람’이라 이를 만한가. 곧, 흙을 먹고 바람을 마시며 햇볕으로 자라나는 ‘사람’다운 모습을 옹글게 건사하는가 생각해 본다.


  사람이란, 돈을 버는 일꾼이 아니다. 사람이란, 어떤 일 한두 가지를 솜씨있게 할 줄 아는 전문가가 아니다. 사람이란, 물질문명을 북돋우거나 누리는 톱니바퀴가 아니다. 사람이란, 목숨이다. 싱그러이 숨을 쉬는 어여쁜 목숨일 때에 비로소 사람이다.


  지구별에 전기가 사라지는 날을 헤아려 본다. 지구별에 기름이 없어지는 날을 헤아려 본다. 자, 이 지구별에서 ‘어떤 사람’이 살아남을 만한가. 아니, 어떤 사람이 ‘삶을 누릴’ 만할까. 전기가 사라지고 기름이 없어질 때에, 도시에 깃든 사람들은 어떤 삶을 즐길 만할까. 20층 아파트나 40층 아파트에서 이들 도시내기는 어떤 삶을 빛낼 만할까.

 

  전문가라 일컫는 사람은 모두 ‘바보’라고 느낀다. 전문가이기 때문에 ‘멍청이’라고 느낀다. 이름을 얻거나 힘을 거머쥐거나 돈을 쓸 줄 안대서 ‘사람’이 되지 않는다. ‘전문가’는 되리라. 그러면, 물은 어떻게 마시지? 물꼭지를 틀면 되나? 가게에서 페트병에 담긴 먹는샘물 사다 마시면 되나? 햇볕은 어떻게 쬐지? 바람은 어떻게 마시지?


  아이를 낳으면 ‘아이 맡아 돌보는 전문가’ 손에 아이를 넘겨야 할까. 여덟 살이 되면 ‘초등교육 전문가’ 품에 아이를 보내야 할까. 마음이 맞는 짝꿍을 사귈 적에는 ‘연애상담 전문가’가 쓴 책을 읽어야 할까. ‘사진 찍는 전문가’를 불러 식구들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전문가’를 불러 일기를 써야 할까.


  스스로 모든 삶을 누리고 지으며 즐길 줄 알 때에 비로소 ‘사람’이면서 ‘목숨’이 빛난다고 느낀다. 스스로 ‘한두 가지만 잘 할 줄 아는 전문가’ 굴레를 털어내면서 온 삶을 손수 나누고 펼치며 어깨동무할 줄 알아야 바야흐로 ‘사람’으로서 아름다운 꿈과 사랑을 길어올릴 수 있다고 느낀다. (4345.11.1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