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읽기
나는 신문을 안 읽습니다. 나는 1995년부터 1999년까지 ㅎ신문 배달노동자로 살았습니다. 1999년에는 ㅎ신문 광고모델을 한 적 있고, 2001년부터 2003년까지 ㅎ신문에 우리 말글 이야기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고서 2004년에 ㅎ신문을 끊었습니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삶터를 옮기며 더는 어느 신문도 읽을 까닭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시골살이를 들려주는 중앙일간지도 시골신문도 없거든요. 지역신문이든 도시신문이든 온통 도시살이만 다루거든요. 게다가 도시살이만 다루는 신문들이 도시 밑바탕을 이루는 여느 사람들 삶자락을 들려주지 않아요. 정치 이야기, 사건·사고 이야기, 스포츠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텔레비전 이야기, 자동차와 옷 이야기, 영어 이야기, 입시공부 이야기, 주식투자·부동산·아파트 이야기, 외국여행 이야기, 맛집 이야기, …… 들에 사로잡혀 정작 ‘작은 공장 노동자’ 이야기조차 1줄로나마 제대로 다루는 일이 없어요.
무엇보다 ‘집에서 아이들과 하루를 보내는 아줌마 이야기’조차 중앙일간지이든 시골신문이든 다루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는 2004년부터 이제껏 어떠한 신문도 읽지 않고 보지 않으며 살피지 않습니다.
중앙일간지라는 이름부터 허깨비라고 느낍니다. ‘중앙’이란 무엇이지요? ‘서울’이 한복판(중앙)인가요? 도시가 한복판인가요? 중앙에서 내는 신문이 왜 더 눈길을 받고 왜 사람들 목소리를 이끌어야 할까요?
한미자유무역협정 이야기가 불거질 때에 스스로 시골로 찾아와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하룻밤이나마 지내면서 이러한 무역협정이 이 겨레 먹을거리와 땅뙈기에 어떻게 스며들까를 생각한 기자나 작가나 지식인이나 학자는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ㅇㅁㅂ정부가 사대강 삽질을 밀어붙인다고 손가락질하거나 사대강 순례를 하는 사람이 제법 많지만, 아직 시골로 삶터를 옮겨 ‘스스로 삶을 즐기는 저항’을 하는 사람은 몇 안 됩니다.
진보신문도 없고, 민주신문도 없습니다. 더 까놓고 말하자면, 보수신문도 없으며, 중도신문도 없습니다. 평화신문이나 자유신문조차 없습니다. 통일신문이나 평등신문은 있을까요.
진보와 민주와 보수와 중도와 평화와 자유와 통일과 평등이란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뿐더러, 스스로 삶으로 이러한 이야기를 녹이거나 삭혀서 거듭나지 않는다면, 모두 ‘목소리로만 외치는 꼴’입니다.
삶은 목소리가 아니라 삶입니다. 살아내야 비로소 삶입니다. 외치기만 하는 일이란 외침, 곧 목소리일 뿐입니다. 목소리를 낸대서 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스스로 삶을 움직일 뿐 아니라 삶을 즐기고 누릴 때에 달라집니다. 스스로 달라지지 않고 목소리만 낸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스스로 진보신문이라고 여긴다면, 도시를 떠나고 서울을 벗어나야 합니다. 진보를 말하려는 매체가 되겠다면 기꺼이 도시를 버리고 서울하고 등지면서 시골에서 자급자족을 하며 신문을 내야 마땅합니다. 광고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밥을 벌며 신문을 내면 됩니다. 글 써 주고 사진 보내 주는 이한테는 스스로 지은 ‘똥오줌 거름으로 지은 곡식과 열매’를 글삯과 사진삯으로 주면 됩니다. 보수신문도 이와 같고, 평화신문이나 평등신문도 이와 같습니다.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참말 어느 누구도 종이신문을 안 읽습니다. 요사이는 연속극 보느라 텔레비전을 켜기는 하지만, 막상 텔레비전 새소식은 듣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새소식 나올 여덟 시나 아홉 시는 시골사람 모두 코코 자는 때거든요. 새벽 서너 시에 일어나 저녁 일고여덟 시면 하루를 마감하는 시골살이예요. 시골사람은 흙에서 사회를 읽고, 햇살에서 문화를 읽으며, 바람에서 경제를 읽어요. 멧자락에서 교육을 읽고, 냇물에서 철학을 읽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활짝 웃고 뛰놀며 삶을 읽습니다. (4345.11.10.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