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90 : 삶놀이, 책놀이, 사랑놀이
엘린 켈지 님이 쓴 《거인을 바라보다》(양철북,2011)라는 책이 있습니다. 누군가 이 책을 한글로 옮겼고, 또 누군가 이 책을 펴냈기에, 나는 고작 13000원을 들여 틈틈이 책장을 넘기면 ‘고래와 얽혀 그동안 알지 못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새록새록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글쓴이는 고래 연구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하며 이 책을 썼다고 하는데, 연구자나 학자는 으레 “우리가 고래에 대해 아는 지식이란, 연구자들이 수면에서 얻어낸 극히 일부분의 정보로부터 추론한 것에 불과하며 그조차도 계속 같은 장소만을 관찰해 얻은 정보(57쪽)”라고 말한답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안다’고 할 때에는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아는 셈일까 헤아려 봅니다. 누군가 나무를 ‘안다’고 한다면, 나무 한 그루와 얽혀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아는 셈일까 생각해 봅니다. 카렐 차페크 님은 《원예가의 열두 달》(맑은소리,2002)이라는 책을 쓰며 “입수한 식물을 전부 완벽하게 테스트하고 마스터하고 실제로 감상하기까지는 1100년이 걸린다(225쪽).” 하고 말합니다. 1100년을 살지 않은 주제에 무슨 턱없는 소리이냐고 따질 수 있을 텐데, 어느 풀이건 나무이건 꽃이건 하나도 똑같지 않아요. 풀 한 포기를 알려고 하면, 한해살이를 낱낱이 살펴야 하고,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갈래 풀포기를 모두 살펴야 하는데, 이렇게 살피고 저렇게 살피자면 ‘한 가지 풀’만 하더라도 자그마치 1100년을 들여다봐야 모든 모습을 살필 수 있다는 소리예요.
내가 너를 알려면 너랑 함께 살아 보아야 알까요. 내가 너랑 함께 살아도 내가 못 보는 네 모습은 없을까요.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이녁 아이를 얼마나 안다 할 만할까요. 오늘날 거의 모든 어버이는 아이들을 보육원이나 어린이집에 맡깁니다. 어느 집에서는 돌쟁이조차 ‘전일제’로 보육원에 맡겨요. 때로는 할머니 손에 오래도록 맡기기까지 해요. 이런 요즈음 흐름을 돌아본다면, 요즈음 어버이는 이녁 아이를 ‘안다’고 하기 어려우리라 느껴요. 참말 무엇을 알까요.
《거인을 바라보다》를 더 살피면 “아이를 키우는 엄마나 갓 태어난 아기들에게는 평화로움과 고요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고래의 경우, 성별이나 나이를 막론하고 모든 개체들에게 평화와 고요가 반드시 필요하다(64쪽).”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책을 덮고 오래도록 생각에 잠깁니다. 고래뿐 아니라 사람도 평화롭고 고요한 곳에서 즐겁게 살아갈 만해요.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평화롭고 고요한 데에서 즐겁게 일하며 놀 만해요.
삶이란 놀이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즐겁게 누리는 놀이처럼 즐겁게 누릴 삶이어야지 싶습니다. 1100년을 들여다봐야 비로소 겉훑기를 할 만한 풀 한 포기처럼, 한 사람 삶이란 두고두고 살펴도 모를 깊이가 있는 어여쁜 사랑이지 싶습니다. 가을하늘 올려다보며 삶을 읽고 놀아요. 밤하늘 초승달 올려다보며 사랑을 느끼고 놀아요. 스스로 아름다운 눈망울로 거듭나면서 아름다운 책을 알아보며 하루를 해사하게 누리면서 놀아요. (4345.11.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