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솔로 이야기 1
타니카와 후미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내 마음속은
[만화책 즐겨읽기 189] 타니카와 후미코, 《솔로 이야기 (1)》
가을비가 내리는 새벽은 호젓합니다. 그제는 비가 흩뿌리고 어제는 빗방울이 들지 않더니 오늘 새벽에 다시 빗방울이 찾아듭니다.
아이들 오줌그릇을 비우려고 마당으로 나옵니다. 빈 땅뙈기에 아이들 오줌을 붓고 나도 쉬를 눕니다. 까만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별이 하나도 안 보입니다. 온통 구름인가? 자그마한 물방울이 살짝 볼에 떨어진다 싶어, 새삼스레 비구름으로 덮였나 하고 생각합니다. 방으로 들어와 낯을 씻으니 이내 빗소리 들립니다.
이제 길가에 곡식을 펴서 말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거의 없으니, 가을비가 찾아와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바쁜 가을일을 마치고 나서 마늘이나 파나 양파를 새로 심은 밭뙈기라면 가을비가 반가우리라 생각합니다.
한동안 매우 따스한 날씨였습니다. 겨울 앞둔 늦가을이라고는 느낄 수 없던 날씨인 나머지, 잎을 모두 떨군 나무들마다 새잎이 돋았습니다. 동백나무와 후박나무야 한겨울에도 푸른잎을 건사한다지만, 감나무와 매화나무와 석류나무까지 새잎이 돋고, 느티나무 또한 푸른 새잎이 돋았어요. 늦가을에 철 이르게 돋은 새잎은 차가운 가을비를 어떻게 맞아들일까요. 찬비를 맞으며 아이 추워 하고는 옹크릴까요. 찬비를 씩씩하게 견디며 겨우내 푸르게 살아갈까요.
- ‘아아, 행복해. 잠들기 직전까지 책을 읽고, 오후에 느긋하게 일어나서 산책 겸 브런치. 멋진 휴일.’ “그건 좀 쓸쓸하지 않아요?” “응? 쓸쓸해? 누가?” “누구긴요. 당연히 야마나미 씨죠. 모처럼 휴일인데 혼자 책 읽고 산책하고 밥 먹고 영화 보고, 좀 그렇잖아요.” (10∼11쪽)
-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일지도 모른다는,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고 나를 생각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하루하루는 즐겁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야의 말에 이토록 흔들리는 건, 마음속 어딘가에서 나는 쓸쓸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18쪽)
가을에 따사롭고 겨울에 포근한 남녘 들길을 자전거로 달립니다. 작은아이는 새근새근 낮잠을 자고 큰아이도 제법 졸린 눈치이지만 더 놀고파 하기에, 마침 우체국에 편지 부치러 가야 해서 큰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들길을 달립니다. 햇살은 따스하지만 바람은 매섭습니다. 수레에 앉은 큰아이가 “바람이 멈춰, 멈춰, 차가워!” 하고 외칩니다.
나락을 거두어 빈 들판 사잇길을 달립니다. 군데군데 논둑에 봄꽃이 피었습니다. 봄날 온 들판에 일찍 노란 물결을 이루는 유채랑 갓이 한 포기씩 드문드문 피었어요.
그러고 보면 우리 집 마당 한켠에도 갓풀이 돋았습니다. 가을에 돋은 갓풀을 반가이 맞이하며 맛나게 뜯어먹는 나날이에요. 풀은 고운 흙과 맑은 바람과 싱그러운 빗물과 따순 햇살을 먹으며 자랍니다. 여기에 지구별 사람들 착한 넋을 만나며 씩씩하게 커요.
밤마다 여러모로 칭얼거리는 작은아이가 어머니 곁에 자꾸 달라붙습니다. 큰아이도 이러했던가 떠올려 봅니다. 나는 이 아이들만 하던 지난날 어떠했을까 헤아려 봅니다. 낮에는 신나게 놀고 밤에는 까무룩 잘 때에 몸이 개운하고 마음은 활짝 열릴 텐데 하고 생각하지만, 아이들로서는 어머니 품이 더 그립고 조금이라도 더 몸뚱이 움직여 놀고 싶겠지요. 어버이로서 내가 할 몫이라면 아이들을 예쁘게 사랑하고 내 마음 또한 예쁘장하게 아끼는 한 가지라고 느낍니다.
- “미와, 이제 좀 정신 차려. 나는 네 남자친구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야. 평생 널 돌봐 줄 수는 없어. 넌 항상 남자친구를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네가 좋아서 그런 것뿐이잖아? 좀더 남의 마음을 생각해 봐. 너 좋을 대로 밀어붙이지만 말고. 먼저 혼자 서도록 해. 그래야만 비로소 다른 사람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32쪽)
- ‘어느샌가 나는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해서 그때처럼 신짱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47쪽)
자장노래를 부르는 마음은 아이들을 다독여 재우는 마음이면서, 어버이로서 내 자리를 새롭게 깨닫고 아끼는 마음이라고 느낍니다. 밥 한 그릇 날마다 차려 아이들과 함께 먹는 마음은 아이들한테 새 기운 북돋우는 한편, 어버이로서 내 꿈을 한결 튼튼히 다스리려는 마음이라고 느낍니다.
무엇을 하든 서로를 살찌웁니다. 어떤 일이든 서로서로 웃고 떠들며 즐길 만합니다. 하루하루 반가운 삶을 누립니다. 언제나 홀가분하게 생각을 짓고 살림을 지으며 이야기를 짓습니다.
나무를 쓰다듬습니다. 나무가 잘 자라기를 빌면서, 내 마음에 나무 한 그루 푸른 기운이 가만히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풀잎을 뜯습니다. 맛난 풀잎을 먹자고 생각하면서, 내 손길을 타는 풀포기가 앞으로도 이 땅에서 씩씩하게 새로 돋기를 바랍니다. 냇물을 받아 마십니다. 내가 떠서 마시는 만큼 냇물은 더 기운차게 흐르며 맑고 시원한 물줄기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새벽나절, 빗소리 들리다가 문득 멎습니다. 잠들지 못하는 작은아이를 안고 마당으로 나와 쪼그려앉습니다. 까만 하늘 사이로 구름 흐르는 모습 보입니다. 구름 지나가는 어느 한 자락 틈을 타고 별 몇 살며시 고개를 내밉니다.
들고양이가 우리 집 마당을 가로지릅니다. 저쪽에서 돌울타리 건드려 와르르 무너뜨리는 소리를 내더니, 한 마리는 쌩 내빼고 한 마리는 평상 뒤에 숨어 가르릉가르릉거립니다. 여그가 느그들 집인가. 여그가 느그들 놀이터쯤 된다면 쥐라도 좀 잡든가.
- ‘응, 그러니까, 뭐랄까. 마음이 편안해져.’ (61쪽)
- ‘언젠가 지금의 나를 후회할 날이 올까. 울며 지새울 밤이 찾아올까. 조금 무섭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했다.’ (87쪽)
-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한다. 잠도 못 자고 씻지도 못했지만 행복하다. 연인들이여. 쓸쓸한 인생이라 마음이 아픈가. 하지만 이게 지금 나의 전부다. 비웃고 싶은가. 사랑을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다. 소중한 온기도 기억하고 있다. 서로 나누는 행복, 서로 상처 입히는 것마저도 틀림없이 근사하겠지. 하지만 지금 내게는 이게 최선이다.’(119∼120쪽)
타니카와 후미코 님 만화책 《솔로 이야기》(대원씨아이,2012) 첫째 권을 생각합니다. 혼자 살아가는 아가씨들 이야기를 다루는 만화책입니다. ‘혼자 살아간다’고 해서 《솔로 이야기》라 할 테지만, 만화책에 나오는 아가씨들은 ‘혼자’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살림집에 혼자 있을’ 뿐, 일터나 학교나 마을에서나 여러 사람하고 얼크러져요. 늘 수많은 사람하고 뒤섞여 살아가요. 다만, 하루일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혼자 밥을 차리고 혼자 빨래를 하며 혼자 책을 읽어요.
- ‘일어나면 천천히 목욕을 하자. 그리고 갓 지은 밥을 먹자. 그래, 머리도 잘라야지. 돌아오는 길에 꽃이라도 살까. 뭘 해도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힘을 축적해서 다시 싸우는 거야.’ (122쪽)
- ‘언젠가 만날 수 있을까. 아무리 한심해도 볼썽사나워도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진심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과.’ (137쪽)
‘같이 산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한 집안에 사람이 여럿 있을 적에 ‘같이 산다’라 말할 만할까요. 한 집안에 한 사람만 있기에 ‘혼자 산다’라 말할 만할까요.
학교에서나 일터에서나 마을에서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사람들 많은 데에서 여럿이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따로 떨어져 돌아다니기를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는 여럿이 어울리기를 쑥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동무랑 있대서 혼자가 아닐까요. 살붙이랑 있으니 혼자가 아닐까요.
혼자란 무엇일까요. 외로움이나 쓸쓸함은 언제 스멀스멀 기어나올까요.
같이 꾸리는 살림은 어떤 모습일까요. 서로 북돋우는 살림은 어떤 사랑으로 피어날까요. 내 마음은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하루 살림을 꾸리는 내 모습은 어떤 빛깔로 환하게 드리울까요.
하늘을 보고 아이들을 봅니다. 집안을 보고 마당을 봅니다. 마을을 보고 서재도서관을 봅니다. 들길을 보고 멧자락을 봅니다. 마음속에 사랑을 곱게 건사할 적에는 언제나 사랑스럽습니다. 마음속에 사랑을 불러들이지 않을 적에는 언제나 허전합니다. 혼자이지 않은 사람 없고, 혼자인 사람 없으리라 느낍니다. 누구나 혼자일 수 없으면서, 누구라도 혼자 아닐 수 없습니다. (4345.11.6.불.ㅎㄲㅅㄱ)
― 솔로 이야기 1 (타니카와 후미코 글·그림,김진수 옮김,대원씨아이 펴냄,2012.8.15./5500원)
(최종규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