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한 줄, 살며시 읽는 책
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지식으로 읽는 책이란 없습니다. 누군가 지식을 가득 담아 책을 쓴다 하더라도, 읽는 우리들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왜냐하면, 책 하나를 손에 쥐어 읽는 우리들은 스스로 삶을 가꾸거나 북돋우거나 살찌울 때에 스스로 즐겁거든요.
대학교 졸업장이 내 이름을 높이지 않습니다. 값진 옷차림이 내 얼굴을 드높이지 않습니다. 새까만 자가용이 내 눈빛을 밝히지 않습니다. 오직 내 마음으로 내 이름을 빛냅니다. 오로지 내 마음으로 내 얼굴을 곱게 가꾸고 내 눈빛을 싱그러이 추스릅니다. 김원숙 님이 빚은 이야기책 《그림 선물》(아트북스,2011) 33쪽을 읽으면 “그러고 보면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아무래도 사랑이다.” 하는 말마디가 나옵니다. 그림쟁이가 그림을 그리든, 사진쟁이가 사진을 찍든, 글쟁이가 글을 쓰든, 저마다 언제나 ‘사랑’ 하나 있어 삶을 일굽니다.
시골마을 할머니 할아버지가 흙을 만지며 숲과 들과 바다를 지킬 수 있는 힘이라면 그예 한 가지 ‘사랑’입니다. 딸아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 보내지만 정작 당신은 시골마을에 남아요. 딸아들이 도시로 당신을 부르려 해도 손사래를 칠 뿐, 시골마을을 떠나지 않아요. 허리가 아프네 눈이 어둡네 하지만,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 사람들 배부르게 먹을 온갖 곡식과 열매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거두어요.
편해문 님은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소나무,2012)라는 책 53쪽에서 “대한민국은 작은 골목을 없애 도로를 만들고 동네 마당을 메꾸어 큰 건물을 지어, 이제는 아기자기한 골목도 마당도 보기 쉽지 않다. 골목과 마당이 사라지니 아이들도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하고 말합니다. 도시라는 곳은 돈을 더 만들고 돈을 더 벌며 돈을 더 쓰도록 나아가니까, 골목도 마당도 없애기 마련입니다. 나중에서야 겨우 나무 몇 그루 심고 공원 흉내를 내는데, 공원 흉내를 낸 그 자리는 지난날 숲이었어요. 처음부터 숲을 고스란히 살리면 될 노릇이지만, 도시에서는 숲을 되살리거나 지키지 않아요. 언제나 돈을 들여 무언가 뚝딱거립니다.
깊은 가을날, 아이들 이끌고 바다로 마실을 갑니다. 사람들은 여름바다에서만 물놀이를 하는데, 봄바다에서도 가을바다에서도 물놀이를 즐길 만합니다. 겨울바다라고 물놀이를 못 즐길 까닭이 없습니다. 바다에서는 물을 밟고 만지며 튕길 수 있어 좋아요. 숲에서는 풀을 밟고 만지며 뜯어먹을 수 있어 즐거워요. 들에서는 바람을 쐬고 햇살을 누리며 풀내음 짙게 맡아요.
돌이켜보면, 책이란 곧 삶이지 싶어요. 삶이 바로 책이지 싶어요. 바다에서 책을 읽어요. 논배미와 유자밭에서 책을 읽어요. 나락을 말리는 할머니 손길에서 책을 읽어요. 풀개구리 한 마리한테서 책을 읽어요.
카렐 차페크 님은 《원예가의 열두 달》(맑은소리,2002)이라는 책을 쓰며 138쪽에서 “관청의 창가에는 아무것도 피어 있지 않거나 빨강과 흰색의 제라늄만이 피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관청에서 자라는 식물에 대해서는 공무원 또는 장관의 의지와 호의와 일정한 전통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철도청 관리 아래서 식물은 가장 왕성하게 성장하며, 우체국과 전화국에서는 도무지 아무것도 피지 않는다.” 하고 노래합니다. 참말, 시골 군청이나 면사무소에서조차 ‘꽃’도 ‘풀’도 ‘나무’도 보기 힘들어요. 자동차 세우는 터만 널따랗습니다. 잔디밭조차 구경하기 어려워요. 건물은 커지기만 할 뿐, 숲이 늘어나는 일이 없어요. 사람들은 애써 수목원으로 나무내음 풀내음 즐기려 간다고 하지만, 정작 이녁 삶자리에 숲이 우거지고 나무가 푸른 잎사귀 흔들며 바람노래 들려주도록 하지 않아요.
이선관 님 시집 《우리는 오늘 그대 곁으로 간다》(실천문학사,2000)를 읽습니다.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왔으면 좋겠다〉라는 짤막한 시를 찬찬히 곱새깁니다. “여보야 / 이불 같이 덮자 / 춥다 /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 따뜻한 솜이불처럼 / 왔으면 좋겠다” 겨울날 솜이불 함께 덮는 ‘통일’이로군요. 겨울날 고구마 쪄서 나누어 먹는 ‘통일’도 되겠지요. 따순 봄을 함께 꿈꾸는 ‘통일’도 될 테고, 찬바람 싱싱 불어도 노랗고 하얀 꽃송이 뽐내는 가을 들꽃 어깨동무하며 바라보는 ‘통일’도 될 테지요. 삶을 살며시 읽으며 책을 마음 깊이 녹입니다. (4345.1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