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보라
한금선 외 22인 지음 / 아카이브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사람을 보아야 찍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115] 사진쟁이 스물세 사람, 《사람을 보라》(아카이브,2011)

 


  ‘한진중공업 노사분규’ 이야기를 사진쟁이 스물세 사람이 저마다 다른 눈길로 담아내어 한 자리에 그러모은 사진책 《사람을 보라》(아카이브,2011)를 읽습니다. 사진쟁이 스물세 사람이 저마다 다른 눈길로 사진을 찍을 수 있던 까닭이라면, 한진중공업 노조와 회사가 서로 부딪혔기 때문이라 할 텐데, ‘노사분규’가 생기고 ‘85번 크레인’에 ‘김진숙’ 님이 올라갔대서 사진으로 찍을 만한 그림이 나왔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맨 먼저 ‘노사분규’라는 이름부터 안 어울린다고 느낍니다. 노사분규가 아니라, 회사에서 ‘일꾼한테 일삯을 옳게 주지 않은’ 데에서 모든 일이 비롯합니다. 이 다음으로는, 회사가 노조하고 말로 보드라이 이야기를 나누려 하지 않았어요. 평화롭게 어깨동무를 하는 길이 아닌, ‘주인과 노예’처럼 계급과 신분을 가른 채, 돈을 움켜쥐어 사람을 부리고, 돈을 바라며 이리저리 휘두릅니다. 일하는 사람이라는 일꾼, 곧 노동자이지만, 일하는 몫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일을 시키는 사람 스스로 일을 모르기 때문이요, 일을 헤아리지 않기 때문이며, 일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일을 시키는 사람 스스로 일이 아닌 돈만 알고, 돈만 생각하며, 돈만 거머쥐려 하기 때문이에요.


  한 사람이 태어나서 누릴 수 있는 돈이란 얼마쯤일까 궁금합니다. 한 사람이 죽는 자리에서 저승으로 가지고 갈 만한 돈이란 얼마쯤일까 궁금합니다. 죽은 뒤에 돈이 어떤 값을 할까 궁금합니다. 서로 얼크러져 살아가는 이곳에서 즐겁게 나누고 기쁘게 함께할 돈이 될 때에 아름답지 않을까 싶어요.


  노동자 일삯을 올린대서 회사가 무너질까요. 노동자 일삯을 줄이면 회사가 이익을 많이 올릴 수 있을까요. 노동자 일삯을 줄이거나 깎으면, 얼핏 보기로는 회사가 이익을 거두는 듯 보일 테지만, 이렇게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나면, 회사는 얼마쯤 손해를 보는 셈일까요. 회사로서는 안 치러도 될 손해를 굳이 치르는 꼴인데, 처음부터 노동자 일삯을 옳게 치러 주었으면 다 함께 즐거우면서 노동자도 회사도 나란히 즐겁게 ‘돈을 벌’면서 평화로우리라 느껴요.


  사진책 《사람을 보라》는 ‘생생한 현장기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사진책을 보면서 ‘어떤 현장을 기록’하고 ‘어떤 생생함’을 찾으려 했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일하는 사람들 삶을 생생하게 그린 사진일까요? 일하는 사람들 웃음과 눈물을 생생하게 그린 사진일까요? 싸우는 사람들 다툼을 생생하게 그린 사진일까요? 싸우는 사람들이지만 주먹이나 돌 아닌 웃음과 어깨동무로 새길을 찾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린 사진일까요?

 

 


  사진책 이름 “사람을 보라”를 생각합니다. 사람을 사진으로 찍으려면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거나 사귀려면 “서로를 보아야”, 곧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얼굴이나 옷차림을 볼 일이 아닙니다. 졸업장이나 은행계좌를 볼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볼 일입니다. 마음가짐을 보고 마음밭을 보며 마음씨를 볼 일입니다. 함께 나눌 사랑을 보고, 같이 누릴 꿈을 보며, 서로 북돋울 이야기를 볼 일입니다.


  한진중공업 일꾼과 이들을 둘러싼 사람들은 씩씩하게 싸웠다고 합니다. 희망버스가 드나들고, 오랜 나날 외롭게 서며 목소리를 내려고 했답니다. 사진은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을 비춥니다. 오늘은 정규직이라 하더라도 모레에는 비정규직이 되고 마는 얼거리가 오늘날 한국 사회라고 밝힙니다. 사람은 꽃이요, 노동자는 꽃이라고 큼지막하게 쓴 걸개천을 사람들이 들고 춤을 춥니다. 아이들이 노래하고 어른들이 어깨동무합니다.


  어디에서나 삶입니다. 살아가는 나날입니다. 삶을 적바림하는 사진입니다. 살아가는 나날을 그리는 사진입니다.


  한진중공업 싸움이기에 대단하지 않습니다. 희망버스가 찾아왔으니 기쁘지 않습니다. 경상남도 밀양에서는 시골마을 사람들이 송전탑 때문에 여러 해째 싸웁니다. 시골마을 사람들이 에어컨을 쓰지도 않고 승강기를 타지도 않으며, 시골마을에 공장이 따로 없는데, 도시에서 쓰는 전기가 모자라다며 시골에 발전소를 짓고 도시까지 송전탑을 놓습니다. 이러는 사이 시골사람은 애꿎게 논밭과 보금자리를 발전소와 송전탑한테 빼앗깁니다. 때로는 우람한 송전탑 곁이나 한복판에 논밭과 보금자리가 놓이는 모양새가 됩니다. 그러고 보면, 평택 대추리에서도, 제주 강정마을에서도, 어제오늘 똑같거나 엇비슷한 싸움과 슬픔이 되풀이됩니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다른 이웃마을에서도 다툼과 아픔이 잇달아 터집니다. 참말 사진쟁이들이 다니며 찍어야 할 사진이 많고, 희망버스가 돌아다니며 힘내라고 북돋울 삶터가 많습니다.

 

 

 


  이곳에서나 저곳에서나 ‘사람을 보라’고 말합니다. 이곳에서나 저곳에서나 어떤 힘, 이를테면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이나 문화권력을 거머쥔 이들이 ‘사람을 안 보’면서 짓누릅니다. 어떤 얼굴이든 권력이 될 때에는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사람을 사람으로 마주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 아닌 모습일 때에는 무엇일까요. 괴물일까요, 도깨비일까요, 귀신일까요. 바보일까요, 멍텅구리일까요, 얼간이일까요.


  내 이웃이나 동무를 사람으로 바라보지 못할 때에는, 이녁 스스로 사람인 줄 모르거나 잊지는 않나 궁금합니다.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에 이녁 이웃이나 동무를 꾸밈없이 바라보지 못하고 어깨동무하지 못하며 사랑하지 못하는 노릇 아닌가 궁금합니다. 회사에서 사장이 되든, 회사에서 노동자가 되든, 또 회사에서 어떤 다툼이 생겨 이 자리에 찾아가 사진을 찍는 사람이 되든, 우리들은 서로를 사람으로 마주하고 사람으로 생각하며 사람으로 사랑해야지 싶습니다. 사람을 보아야 비로소 즐겁게 웃으며 함께 일합니다. 사람을 보아야 비로소 어깨동무를 하거나 두레를 하면서 손을 잡습니다. 사람을 보아야, 사진기를 들이밀어 사진을 찍는 사람이랑 사진기를 쳐다보며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 이웃이나 동무가 됩니다.


  사진책 《사람을 보라》에 나오는 사람들이 웃습니다. 슬픔과 아픔이 있다 하더라도 웃는 삶을 바라기에 웃습니다. 사진책 《사람을 보라》에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낯빛일까요. 이들도 함께 웃는 낯빛일까요. 군인 옷이나 경찰 옷, 또는 사장 옷이나 간부 옷, 또는 정치꾼 옷이나 군수 옷을 입은 채 핏기를 잃은 낯빛일까요.


  사람은 웃을 때에 사람이요, 꽃은 활짝 피어날 때에 꽃이라고 느껴요. 열매는 무르익을 때에 열매요, 나무는 푸른 잎사귀를 한껏 빛낼 때에 나무라고 느껴요. 햇볕은 날마다 새롭게 찾아들어 환하고 따뜻하게 비출 때에 햇볕이요, 구름은 때때로 그늘을 마련해 주며 더위를 식힐 때에 구름이라고 느껴요. 목마름을 달래니 비요, 온누리를 포근하게 덮으니 눈이라고 느껴요. 사람이라면 사랑이겠지요. 사람이라면 꿈이겠지요. 사람이라면 이야기일 테지요. 사람이라면 서로를 아끼며 보살피는 맑은 웃음일 테지요.


  사람을 바라보아 주셔요. 나를 바라보고 내 이웃과 동무를 바라보아 주셔요. 멧새가 노래하고 풀벌레가 속삭이는 가을이에요. 하늘은 파랗게 높고 들판은 누렇게 깊은 가을이에요. 밥 한 그릇에 다 함께 배부르며 즐거울 가을이에요. 내 안에서 곱게 빛나는 넋을 보아 주셔요. (4345.10.5.쇠.ㅎㄲㅅㄱ)

 


― 사람을 보라 (사진쟁이 스물세 사람,아카이브 펴냄,2011.8.20./1만 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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