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세계사 시인선 41
신현림 지음 / 세계사 / 1994년 6월
평점 :
품절


이 모두를 사랑해
[시를 노래하는 시 30] 신현림,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 책이름 :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 글 : 신현림
- 펴낸곳 : 세계사 (1994.6.1.)
- 책값 : 5500원

 


  선선한 가을 아침은 따스한 가을볕과 함께 새롭게 열립니다. 가을이 무르익으며, 이제 새벽 다섯 시 반을 지나고 여섯 시 가까울 때까지 퍽 어둑어둑합니다. 여섯 시 반쯤 되어야 비로소 환하게 날이 샙니다.


  저녁에는 다섯 시 즈음 되면 선선한 바람이 감돕니다. 말리는 이불이나 빨래가 있으면 네 시 반쯤 모두 걷어야 합니다. 처마 없는 마당에 두는 물건은 저녁부터 이슬이 내려앉습니다. 아침 아홉 시가 넘어도 밤새 내린 이슬을 맞은 들풀과 나뭇잎마다 물방울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나물비빔을 하려고 들풀을 뜯으며 손끝으로 풀이슬을 느낍니다.


.. 후후 / 당신은 여지껏 환상을 보고 있었다 / 어쩌면 生과 死란 없다 // 홀연히 사라질 나는 / 공중에 불타는 구름막대기 ..  (bottle woman)


  가을볕은 누구만 더 사랑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을볕은 시골 들판만 사랑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을볕은 도시 한복판 높다란 빌딩숲도 사랑합니다. 고속도로를 누비는 자동차도 사랑합니다. 원자력발전소 지붕과 화력발전소 지붕도 사랑해요. 가을볕은 푸른기와 이은 집도 사랑하고, 천막으로 이은 집도 사랑해요. 누구한테나 골고루 따순 사랑을 드리우는 가을볕입니다.


  가을쑥이나 가을나물은 누구를 더 좋아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골사람한테만 반가울 가을나물이 아니에요. 도시에서 살림하는 사람한테도 반가울 가을나물이에요. 가을꽃도 가을나무도, 모든 사람한테 고운 빛을 베풀고 싶으리라 느껴요.


.. 제 한 줄의 시가 누군가에겐 동병상련 술이 되게 / 그대 장칼로 내 가슴 거듭거듭 휘저어주시기를 ..  (황혼의 지구병동)


  사랑하기가 가장 쉬우며 즐겁고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사랑받기가 가장 반가우며 기쁘며 좋다고 느낍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나를 사랑할 때에 더없이 빛난다고 느껴요. 이른바 평화도 평등도 민주도 통일도,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할 때에 천천히 이루어지리라 생각해요.


  미워하기란 참 어렵고 힘들며 괴로우리라 생각합니다. 싫어하거나 못마땅히 여기기 또한 참말 까다롭고 고단하며 슬프리라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주어지는 삶이란 하루하루 웃음으로 누리는 삶이에요. 하루하루 누리는 삶이란 하루하루 맑고 밝게 일구는 삶이에요.


  가을에는 가을사람이 됩니다. 겨울에는 겨울사람이 됩니다. 봄에는 봄사람 되고, 여름에는 여름사람 돼요. 언제나 가장 좋게 꿈을 꾸고, 늘 가장 살가이 사랑을 키우며, 노상 가장 곱게 말을 빚어요.


.. 금연방송을 비웃는 듯 / 내 앞의 사내가 계속 담배를 피웠다 / 담배연기는 얼어가는 파도처럼 / 머리를 휘감아 죄었다 문득 담배를 / 그의 위법의 법을 숨통을 비벼끄고 싶었다 / 신도림 역을 떠날 때였다 / 하모니카 부는 장님이 오고 있었다 / 껌팔이 소녀가 구호상자 든 노인이 / 허기진 손들이 장례식의 화환처럼 몰려왔다 / 내 것과 다른 가난을 사는 그들이 낯설었다 / 아무도 그들의 가난에 관심갖지 않았다 / 궁핍의 냄새가 지겨웠다 화가 치밀었다 ..  (호소의 表裏)


  가을날 들새는 가을철에 걸맞게 바쁩니다. 겨울날 멧새는 겨울철에 걸맞게 바빠요. 사람들은 가을과 겨울은 어떤 철을 헤아리고 어떤 날씨를 살필까요. 들새한테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온통 다른데, 사람한테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스스로 얼마나 다르다고 느낄까요.


  아침과 저녁이 다를까요. 낮과 밤이 다를까요. 새벽과 어스름이 다를까요. 구름과 햇살이 다를까요. 바람과 무지개가 다를까요. 달과 별이 다를까요.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내 삶이 한결같이 새로우면서 새삼스럽다고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오늘 하루를 맞이하면서 내 삶을 한결같이 새롭고 새삼스럽게 돌보는 바탕은 어디에 있을까요.


.. 바다는 엄청 큰 가야금이다 / ―둥기당당 두둥기당당― / 젖은 가야금소리 / 어머니 긴 머리칼처럼 진하고 따뜻해라 / 바다란 말처럼 부드러워라 아아 아파라 ..  (나는 물고기가 될테야)


  밥을 합니다. 식구들 먹을 밥을 합니다. 밥상을 차립니다. 식구들을 부릅니다. 밥을 먹는 사람은 밥을 하는 사람 마음을 알까요. 거꾸로, 밥을 하는 나는 밥을 먹는 식구들 마음을 알까요.


  나는 내 살붙이나 이웃한테 말을 건넵니다. 나는 내 말투가 어떠한가를 잘 헤아릴까요. 나한테서 말을 듣는 사람들은 어떤 느낌이요 마음이며 생각인가를 환하게 깨달을까요.


  밭자락에서 풀을 뜯으며 풀포기한테 고맙다고 말합니다. 너도 먹고 너도 먹어야겠다, 생각합니다. 이렇게 오래오래 푸르게 자라서 나와 살붙이 모두한테 좋은 밥이 되어 고맙다고 말합니다. 가을 늦게까지, 또 겨울까지, 이 밭자락 풀들이 싱그럽고 기운차게 돋으면 참 기쁘겠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 붑니다. 새가 노래합니다. 풀내음이 날립니다. 풀벌레가 속삭입니다. 아이들이 칭얼거립니다. 빨래하고 집일하는 내 발자국 소리가 콩콩 울립니다.


.. 여자인 것이 싫은 오늘, 부엌과 / 립스틱과 우아한 옷이 귀찮고 몸도 귀찮았다 / 사랑이 텅 빈 추억의 골방은 비에 젖는다 / 비오고 허기지면 푸근할 내 사내 체온 속으로 / 가뭇없이 꺼지고 싶다는 공상뿐인 내가 싫다 ..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나 스스로 이 모두를 사랑하기에 오늘 다시금 눈을 뜰까 하고 되뇌어 봅니다. 나 스스로 이 모두를 안 사랑한다면 오늘 나는 눈을 못 뜬 채 어디론가 사라질까 가누어 봅니다. 나 스스로 이 모두를 사랑하려는 따스한 넋이기에 새롭게 기운을 차릴 수 있는가 궁금합니다. 나 스스로 이 모두를 안 사랑하는 차갑거나 매몰차거나 메마른 몸가짐이라면, 내가 발을 디딘 이곳은 무척 쓸쓸하며 어둡겠지요.


.. 그야말로 나는 아름다운 악기가 돼 / 이 모든 것을 사·랑·해라고 노래하면 ..  (철로변의 가을)


  신현림 님 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세계사,1994)를 읽습니다. 신현림 님은 1994년에 이 시집을 낼 적과 스무 해 지난 2014년에 서로 어떤 모습일까 그려 봅니다. 다시 스무 해가 지난 2034년이 되면 또 어떤 모습이 될까 그려 봅니다. 1994년에 처음 나온 시집을 2012년에 처음 읽는 나는, 또 앞으로 스무 해 지난 2032년이나 다시 스무 해 더 지난 2052년에 어떤 눈길과 눈빛과 눈높이로 내 삶을 마주할까 그려 봅니다.


  나는 지겨운 이 땅에 불길 활활 오르는 고무신짝 던지는 사람일까요. 나는 즐거운 이 터에 불길 활활 오르는 풀짚으로 불을 밝히며 멧길을 걷는 사람일까요.


.. 밥 한 사발엔 / 해뜨는 바다와 조상의 살냄새와 단비가 / 매일 일하다 저무는 쓰라린 손그림자가 있다 ..  (밥 한 사발)


  나는 내 삶이 지겹거나 따분하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슬프거나 고단하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기쁘거나 놀랍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흐르는 삶이 스며들고, 나부끼는 삶이 노래한다고 느껴요. 푸른 물결 되어 춤을 추고, 파란 하늘이 무지개 되어 손짓을 하는구나 싶어요.


  왜 그럴까, 왜 이렇게 느낄까, 왜 이처럼 생각할까, 하고 돌아보곤 하는데, 온누리에는 딱히 좋음이나 싫음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바라봅니다. 좋거나 싫거나로 가를 수 없이, 좋으면서 싫고 싫으면서 좋달까요. 즐거우면서 서운하고 서운하면서 즐겁달까요.


  자전거로 언덕길을 오르며 허벅지가 터질 듯하지만 온몸에 땀이 쏟으면서 즐겁습니다. 자전거로 달리는 즐거움을 느끼다가는 허벅지가 터질 듯하며 고단합니다. 마음은 두 갈래가 아니라 하나요, 이때에는 이렇고 저때에는 저렇지 않습니다. 늘 똑같이 움직여요. 그래서, 진보와 보수라든지, 왼쪽과 오른쪽이라든지, 어떻게 가리거나 따질 수 있을까 알쏭달쏭하다고 느껴요. 지구별에서 왼쪽으로 왼쪽으로 왼쪽으로 가면 어디로 갈까 싶고,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또 어디로 갈까 싶어요. 어디로도 안 가고 한 자리에 있대서 ‘한 자리(중립)’가 아니라, 왼쪽에서 볼 때에는 오른쪽이 되고, 오른쪽이 볼 때에는 왼쪽이 돼요. 한편, 나와 얼굴을 마주한 아이는 나한테 왼쪽이 아이한테 오른쪽이요, 아이한테 왼쪽이 나한테 오른쪽이에요.


.. 북풍이 거칠게 몰아친다 / 나는 내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 깨닫기 위해 시를 쓰는지 몰라 ..  (북풍과 은장도)


  신현림 님은 예전이나 오늘이나 똑같이 ‘아무것 아닌’ 숨결일까 궁금합니다. 또는, 아무것 아니기에 모든 것일까 궁금합니다. 깨달으려고 시를 쓰는 사람은 없지 싶어요. 깨닫기에 시를 쓰고, 시를 쓰다가 깨닫지 싶어요. 깨달으려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겠지요. 깨닫기에 살아가고, 살아가며 깨달아요. 깨달으려고 밥을 짓지 않고, 깨닫기에 밥을 지으며, 밥을 지으며 깨달아요.


.. 결혼해서 애를 낳아봐야 인생을 안다구요? / 당신은 인생 좀 아세요? ..  (활짝 핀 살코기의 공허함을 아세요?)


  아이들이 개구지게 놉니다. 이른아침부터 늦은저녁까지 마음껏 놉니다. 이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넣는다면, 나는 이 아이들이 얼마나 개구지고 얼마나 힘차며 얼마나 맑은 넋인가를 낱낱이 깨닫지 못했으리라 생각해요. 하루하루 새롭게 살아가는 아이들 모습에 비추어 내 삶을 헤아리고, 내 삶에 비추어 아이들 마음을 헤아려요.


  저녁거리로 텃밭에서 돗나물을 큰아이하고 뜯습니다. 내 손은 아이 손이고, 아이 손은 내 손입니다. 아이가 뜯는 돗나물은 싱그럽게 바구니에 담기고, 내가 뜯는 돗나물 또한 싱그럽게 바구니에 담겨요. 이 돗나물은 벌써 봄부터 가을까지 우리 집 밥거리가 됩니다. 날마다 조금씩 자라며 줄기를 뻗는 돗나물을 날마다 이곳저곳 돌아보며 조금씩 뜯어 먹습니다. 돗나물은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돗나물이 돼요.


  쑥을 뜯을 적에도, 모시풀을 뜯을 적에도, 부추풀을 뜯고 까마중풀을 뜯으며 망초풀을 뜯을 적에도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으레 망초풀을 어찌 먹느냐고 하지만, 나는 ‘왜 못 먹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왜 못 먹을까 하고 생각한 지 퍽 오래 흐르고서야 비로소 망초풀 한 닢 뜯어 잘근잘근 씹었고, 망초풀은 망초풀맛이 나네, 하고 생각하면서 나물비빔을 하거나 풀물을 짜서 먹습니다.


.. 우리는 탐구하지 않을 때 시간을 잃어버린다 / 밭갈고 씨뿌리는 농부의 손길을 배우지 않을 때 / 내 안에 깊이 생각하는 얼굴이 없을 때 / 시간을 잃어버린다 / 우리가 저 강물 저 나무그늘에게 고마워할 때 / 세월의 무덤에 환한 창문을 보리라 / 더 이상 시간을 놓치진 않으리라 / 강렬한 오늘을 살기 위해 나는 사랑하련다 / 내 가족과 벗들을 겨울이 오는 도시를 / 내게 주어진 상황과 고달픔을 / 서럽게 죽고 사는 모든 것을 안으련다 ..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창문, 입시생을 위해)


  이제 물을 덥힙니다. 큰아이를 씻길 생각입니다. 작은아이도 같이 씻길까요. 그러고 나서 나도 씻을까요. 나는 내 몸을 씻으며 빨래를 할 수 있겠지요. 날마다 새벽 아침 낮 저녁 밤, 이렇게 조금씩 손빨래를 하면 빨래가 천천히 알맞게 마르고, 굳이 기계빨래를 하지 않아도 좋아요. 날마다 틈틈이 물을 만지면서, 이 물방울이 내 몸과 내 삶에 얼마나 고마우며 즐겁고 반가운가 하고 생각해요. 물을 만지고 물을 마셔요. 물을 다루고 물로 씻겨요. 물을 헤아리고 물을 누려요.


  물을 따숩게 덥히며 내 마음을 따숩게 덥힙니다. 아이들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마실을 다녀온 다음 찬물로 내 몸을 씻으면서 머리를 시원하게 식힙니다. 좋은 마음이 되고 착한 머리가 되며 슬기로운 몸이 되자고 생각합니다. 맑은 눈길이 되고 밝은 눈빛이 되며 고운 눈높이가 되자고 생각합니다.


  씻기 앞서, 두 아이는 또 개구지게 놉니다. 아마, 씻고 나서도 다시금 개구지게 놀겠지요. 말끔히 씻은 다음에도 땀을 낼 테고, 이렇게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흐르며 이 아이들은 무럭무럭 클 테며, 나 또한 아이들 곁에서 사랑이 무엇인가 그리면서 크겠지요. 이 모두를 사랑하는 하루란 밝고 따스합니다. (4345.9.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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