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장터 - 발로 뛰며 기록한 전국의 오일장
정영신 글.사진 / 눈빛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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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온 날을 사진으로 되짚다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38] 정영신, 《한국의 장터》(눈빛,2012)

 


- 책이름 : 한국의 장터
- 사진·글 : 정영신
- 펴낸곳 : 눈빛 (2012.8.1.)
- 책값 : 29000원

 


  (1) 시골 저잣거리


  저녁 여덟 시가 살짝 넘은 구월 한복판, 시골은 바야흐로 깜깜합니다. 어느 집에서고 말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몇몇 집은 이무렵에도 텔레비전 켜 놓은 불빛이 바깥으로 살짝살짝 퍼집니다.


  모처럼 두 아이가 일찌감치 잠들어 우리 집도 조용합니다. 하루 내내 아이들과 부대끼느라 나도 지쳐 아이들 곁에서 드러눕고 싶지만, 내 마음은 아이들이 잠든 틈에 무언가 글을 끄적이거나 책을 읽고 싶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하고는 함께 보기 어려운 영화 〈책 읽어 주는 남자〉를 보기도 합니다.


  이러다가 술 한잔 생각이 납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밤길을 자전거를 타고 면소재지에 다녀오기로 합니다. 자전거 앞등과 뒷등을 환하게 밝힙니다. 사람 발자국도 자동차 바퀴자국도 없는 고요한 시골길을 자전거로 달립니다. 자전거로 달리니, 자전거가 바람 가르는 소리만 가득합니다. 아니, 들판에서 풀벌레 노래하는 소리가 훨씬 크게 울려퍼집니다. 풀벌레 노랫소리 사이로 자전거가 지나가는데, 어느 풀벌레도 자전거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니, 모든 풀벌레가 자전거를 따사로이 품습니다. 그래 반갑구나 씩씩하게 달리렴, 하는 듯한 노랫소리입니다. 나는 밤길 시골길 논길을 자전거로 천천히 달리면서 밤노래를 듣습니다.


  면소재지 가게에 닿습니다. 보리술 한 병과 막걸리 한 병을 삽니다. 면소재지 가게 앞에 면내 고등학교 아이들 너덧이 앉았습니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으면서 가게 앞에 앉은 채 저희끼리 이야기를 나눕니다. 다시 자전거를 몰아 집으로 돌아갑니다. 면내 고등학교 교실에 불이 밝습니다. 그렇구나, 구월 한복판이지, 이곳 아이들도 입시나 취업을 맞딱드렸겠구나, 이 가운데 몇몇 아이들이 교실에서 몰래 빠져나와 가게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구나, 이 아이들은 무슨 꿈을 이야기할까, 교실에서 밝힌 불빛을 받으며 늦게까지 수험공부를 하는 시골 아이들은 무슨 꿈을 생각할까.


  군내버스 한 대 마주 달려옵니다. 이 늦은 때에도 버스가 있네, 하고 생각하다가, 읍내에서 저녁 여덟 시 반에 면내를 거쳐 지죽마을 바닷가까지 가는 막버스라고 떠올립니다. 읍내 고등학교를 다닐 지죽마을 아이들은 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테지요.


  아이들은 알까? 아이들은 느낄까? 자전거를 달리며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자라며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는 줄 아이들은 알거나 느낄까 궁금합니다. 이 아이들은 시골에서 태어난 보람을 얼마나 누리는지 궁금합니다. 도시에서 태어나지 못해 여느 도시처럼 온갖 물질문명과 문화시설을 못 누리는 삶을 안타까이 여길는지 궁금합니다.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고등학교를 마친 뒤부터는 도시로 가서 다시는 시골로 안 돌아오겠다고 다짐할는지 궁금합니다.


.. 한 할머니는 이름도 성도 없는 무지렁이라며 한사코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  (90쪽)

 


  면내에서든 읍내에서든 학교옷 입은 아이들을 봅니다. 이 아이들은 하나같이 수험공부에 바쁩니다. 어느 아이라 하든, 고흥군에는 대학교가 없으니 고흥군에 남아 젊은 나날을 보내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아이라 하든,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이웃 도시 순천이나 광양이나 여수에 가든, 또는 전남 광주에 가든, 아니면 대전으로 가든, 또는 부산으로 가든, 아니면 서울까지 가든, 되도록 커다란 도시로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도시이든 고흥 시골마을을 한 번 떠나면, 다시는 고흥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전남 고흥군 도화면에는 고등학교 한 곳 있습니다. 이곳에는 아직 백 명 넘는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데, 이곳 아이들이 해마다 졸업식을 하고 보면, 고3이던 아이들은 거의 모두 썰물처럼 고흥 바깥으로 나갑니다. 대학교를 가든 일자리를 얻든 더 큰 도시로 나가요. 이제부터 시골내기 아닌 도시내기가 돼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고3을 마치고 도시로 가기 앞서를 헤아리면, 아직 고흥에 남아 시골내기로 지낼 적조차 참말 시골내기인지 도시내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시골내기라면 ‘먹고 입고 자는 곳이 시골’이라는 뜻이 아니라, ‘일하고 놀고 살아가는 나날이 시골’이 되어야 걸맞아요. 흙을 만지고, 흙을 누리며, 흙을 아끼는 삶일 때에 비로소 시골내기입니다. 주민등록 주소지가 시골이라서 시골내기이지 않아요.


  한가을 바쁜 일철에 푸름이나 어린이는 들판에 없습니다. 겨울이 끝나고 새봄이 찾아들어 바쁜 일철에 푸름이나 어린이는 들판에 없습니다. 어린이나 푸름이 모두 저희 학교에서 중간시험이든 기말시험이든 치르느라 바쁩니다. 아이들은 ‘시험공부’로 바쁘고, 어른들은, 이 가운데 늙은 어른인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들판에서 흙을 만지느라 바쁩니다.


  면소재지 장날이든 읍내 장날이든, 장마당을 이루는 사람은 모두 할머니와 할아버지요, 장마당에서 무언가 장만하는 사람 또한 으레 할머니와 할아버지입니다. 장이 서든 말든, 아이들은 초등학생이건 고등학생이건 학교에 있습니다. 아이들 모두 학교에서 시험공부만 합니다. 일요일이나 토요일에 장날이 끼더라도, 아이들은 가까운 도시로 놀러가지, 면소재지 장터나 읍내 장터를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젊은 어버이는 자가용을 몰아 커다란 마트에서 물건을 사거나 이웃 순천으로 물건을 사러 가지, 읍내 장터나 면내 장터에서는 물건을 사지 않습니다.


  젊은 어버이는 몸은 시골에서 살지만, 삶은 시골내기가 아닙니다. 시골에 주민등록 주소를 두지만, 삶은 도시를 바라보는 흐름이기에, 이 흐름에 맞추어 ‘젊은 어버이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은 처음 태어날 적부터 ‘주소지만 시골일 뿐 삶은 도시내기’로 지냅니다. 이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될 적에 ‘시골을 벗어나 도시로 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하거나 꿈을 꾸는 모습은 너무 마땅합니다. 이 아이들은 비록 시골에서 산다 하지만, 마음이 온통 도시내기예요. 이 아이들은 ‘주민등록 주소지’까지 도시가 되고 싶어요. 시골마을 들일이나 바닷일은 해 본 적이 없고, 시골마을 앞메나 뒷메를 오른 적이 없으며, 시골마을 이웃 할매나 할배랑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운 적이 없어요. 아이들은 시골내기로 보이지만, 손전화나 컴퓨터로 도시 아이들하고 사귀어요. 겉차림은 시골학교 아이들이지만, 속알맹이는 도시학교 수험생일 뿐이에요.


  우리 집 두 아이를 데리고 면내 우체국이나 가게를 들를 때이든, 이 아이들과 읍내 저잣거리를 돌아다닐 때이든, 어디에서고 아이들을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시골에서조차 아이가 태어나면 일찌감치 보육원과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차근차근 보냅니다. 시골에서도 아이들은 보육시설에 들어가 영어를 배웁니다. 보육시설 시간이 끝나면 방과후학교나 방과후학원 같은 데에 갑니다. 시골마을이라서 시골아이답게 마음껏 뛰놀며 클 터전이 아닙니다. 시골마을에서 아이를 낳는 분들 스스로 아이하고 하루 내내 함께 들판에서 일하고 놀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한결같이 도시바라기로 클밖에 없습니다.

 

 

 

 


  (2) 살아온 날을 되짚는 사진


  소설을 쓰는 정영신 님이 내놓은 사진책 《한국의 장터》(눈빛,2012)를 읽습니다. 1980년대 끝무렵과 1990년대 첫무렵 한국땅 골골샅샅 장터 사진이 깃들고, 이때부터 스무 해를 건너뛰어 2010∼2012년 사이 한국땅 골골샅샅 장터 사진이 어우러집니다.


  사진책을 넘기며 자꾸 궁금합니다. 정영신 님 사진에서 1990∼2010년은 무엇일까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아니, 정영신 님은 소설을 쓰는 분이지만, 이에 앞서 ‘당신 집에서는 여느 어머니’이지는 않을까 싶습니다. 정영신 님이 아이를 낳아 돌보았는지 아닌지까지는 책날개 해적이에 안 적혔기에 모릅니다. 다만, 사내가 스무 해를 가로지르며 사진을 찍을 때하고, 가시내가 스무 해를 가로지르며 사진을 찍을 때에는 사뭇 달라요.


.. 장터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다양한 삶을 보게 된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것 같다 … 어느 날은 할머니가 찢어진 고무신을 갖고 나와 때워 달라고 했는데, 고치는 값이나 새로 사는 값이나 같다고 했다가 혼쭐이 났단다. 할머니는 몇 백 원이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고향을 찾아가듯이 오일장을 찾았다면 고향과 같은 색깔을 만날 것이다 ..  (24, 66, 387쪽)


  나는 사내이지만 집일을 도맡습니다. 우리 집 두 아이는 옆지기와 내가 함께 마주하고 서로 돌보며 살아갑니다. 이제껏 집에서 아이들 기저귀를 얼마나 빨았는지 모릅니다. 아이들 똥오줌을 날마다 만지고, 아이들 밥을 날마다 차리며, 아이들한테 자장노래를 불러 주고, 아이들이랑 복닥복닥 씨름을 합니다.


  나는 내 삶을 서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남녀평등이라 하지만, 정작 집일을 즐겁게 맡는 사내는 몹시 드뭅니다. 부부가 맞벌이라 할 적에도 집일은 으레 가시내가 한다고 하는 한국이에요. 명절이 되어 차례상이나 제사상을 차릴 적에 언제나 가시내만 부엌에 들어가는 한국이에요. 이 나라에서는 가시내가 소설을 쓰고 사진을 찍기란 참 빠듯합니다. 글도 쓰고 사진도 찍는 사내는 꽤 있을 텐데, 집일을 도맡고 아이를 돌보며 글쓰기와 사진찍기를 나란히 하는 사내는 얼마나 있을까요.


  언뜻 보기에는, 집일을 안 하고 아이를 안 돌보며 ‘겨를이 넉넉해’야 글쓰기와 사진찍기를 잘 할 만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일을 도맡고 아이를 돌보는 사내로 살아오며 돌아보면, 집일을 늘 하고 아이를 언제나 돌보는 사이, 내 눈썰미와 눈길과 눈빛이 차츰 거듭나요. 나는 ‘기록’을 하려고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지 않아요. 나는 문화를 꽃피우려는 글을 쓰지 않아요. 나는 예술을 빛내려는 사진을 찍지 않아요. 나는 내 ‘삶’을 좋아하기에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요.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싶으며 아끼고 싶어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요.


  집에서 으레 아이들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아이들과 부대끼는 삶을 글로 써요. 마땅한 노릇이에요. 나는 집에서 살아가니까요. 곧, 정영신 님이 이 나라 장터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쓸 수 있었다 한다면, 정영신 님한테는 장터 이야기가 ‘기록’이 아닌 ‘삶’이었으리라 느껴요. 정영신 님이 ‘사진기를 손에 쥐’기 앞서 누린 삶을 되짚는 사진입니다. 정영신 님이 ‘연필을 손에 쥐’기 앞서 보낸 삶을 톺아보는 글입니다.

 

 


.. 차들이 다니지 않았던 오래전 어린 시절의 장터를 상상해 본다. 사람들은 현대식 의복도 아닌 허름한 옷차림에 짐 보따리를 이고 지고 나와, 공터에 보따리를 풀어 놓았을 것이다 … 도계에서 왔다는 박씨(67) 아주머니는 마땅히 살 것도 없지만, 사람이 보고 싶으면 장에 나온다고 한다 … 할머니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소일거리는 농산물을 갖고 나와 장에서 친구를 만나는 일이다 ..  (60, 83, 408쪽)


  사진책 《한국의 장터》를 읽으며 1990∼2010년 사이 사진이 거의 비었네, 하고 느끼다가는, 앞으로 2020년이 되거나 2030년이 된다면, 2010∼2012년 사이에 바지런히 찍은 사진이 많이 실렸기 때문에, 오늘(2012년)을 돌아보는 뒷날(2020년대나 2030년대) 사람들한테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겠구나 싶어요.


  오늘 쓰는 글은 어제를 돌아보며 모레에 누리는 글이에요. 오늘 찍는 사진은 어제를 되짚으며 모레에 누리는 사진이에요.


  디지털사진은 찍은 그 자리에서 사진을 살펴볼 수 있다지요. 그러나, 사진기 화면으로 사진을 살필 뿐, ‘사진 누리기’는 하지 않아요. 사진을 누리는 일이란, 사진을 찍은 그 자리에서 하지 않아요. 사진을 찍고 한참 지나고서야 비로소 사진을 누려요. 사진을 찍든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오늘 삶을 가장 빛내기에 사진도 찍고 글도 쓰며 그림을 그리지만, 오늘 삶을 가장 빛내며 일군 사진·글·그림은 모레와 글피를 맞이하며 살아갈 기운이 새로 솟도록 이끌어요.


  즐겁게 어제를 돌아봐요. 즐겁게 지난해를 생각해요. 즐겁게 그러께를 되짚어요. 즐겁게 지난 옛일을 아스라이 떠올려요.

 

 


.. 장사하는 사람들은 나이와 상관없어 자유롭다. 보자기 위에 콩대 몇 개 갖고 나와 팔고 있는 할머니들도 여든이 넘는 사람들뿐이다 … 한편 도화장은 농촌의 현실을 읽을 수 있는 시골장의 모습 그대로다. 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자동차 대신 경운기를 끌고 나오고, 장 보는 사람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뿐이다 … 제주할망들은 또 다른 우리 엄마들을 이야기한다. 물질을 하고, 밭농사를 짓고, 남은 시간에는 장터에 나와 온갖 것을 팔아 가정경제를 살리고 자식을 교육시킨다. 이 땅의 엄마들이 있기에 산업이 발전해 가고 경제가 살아나고 농촌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  (149, 238, 459쪽)


  좋아하는 삶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 이 사진을 그러모은 사진책을 펼치면서 ‘참 좋구나’ 하고 느낍니다. 예쁘장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 이 사진을 그러모은 사진책을 펼칠 때에 ‘그림이 그럴싸하구나’ 하고 느낍니다.


  누군가는 ‘참 좋구나’ 하고 느낄 사진을 즐깁니다. 누군가는 ‘그림이 그럴싸하구나’ 하고 느낄 사진을 즐깁니다. 어느 사진을 즐기든 이녁 마음입니다. 어느 사진이 더 돋보이지 않고, 어느 사진이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내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으며 ‘즐거운 하루’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내 아이들을 사진으로 옮기며 ‘멋스럽거나 예쁜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버이마다 아이들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아이들을 찍는 사진이 달라집니다.


  내 아이들을 찍는 사진이니까, 더 값지거나 더 비싼 장비를 갖추어서 사진을 찍어야 할까요. 아마, 누군가는 이렇게 하겠지요. 내 아이들을 찍는 사진이기에, 언제라도 손전화를 꺼내어 사진을 찍는 분도 있겠지요. 내 아이들 살아가는 모습이기에, 늘 가슴에 살포시 담아 언제라도 가만히 떠올리며 이 아이들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곱게 그리는 분도 있겠지요.

 


.. 농촌 사람들은 땅이 주는 질서를 지키고 있다. 봄에는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물과 햇빛과 공기와 더불어 키우고, 가을이면 거둬들인다 … 여인들에게 있어 땅은 보물창고다. 온갖 씨앗에 수많은 비밀을 담아 봄이 되면 땅이라는 보물창고에 시간을 심어 넣는다 … 읍내에서 학교 다니는 아들을 국수집에 데려가 곱빼기 국수를 먹이고 차를 태워 보내면서도 여인은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장날이다 ..  (315, 345, 373쪽)


  예전에 사진기가 없을 무렵, 어버이는 누구나 아이들 모습을 가슴으로 담았습니다. 따로 사진기로 사진을 안 찍었어도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마음속에 아로새겨서, 언제라도 그립게 떠올렸습니다.


  한국땅 장마당을 지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가운데 ‘당신이 장사하는 모습’을 스스로 사진으로 찍어 건사한 분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어쩌면, 어느 할머니 할아버지도 당신 장사하는 모습을 사진 한 장으로도 안 찍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진작가들만 장마당을 돌며 당신들을 사진으로 더러 찍었겠지요.


  그런데, 장마당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예순 해 앞서 일을 환하게 떠올려요. 쉰 해 앞서, 마흔 해 앞서, 서른 해 앞서, 당신들이 지키는 장마당이 어떤 모습이었는가 그림으로 알뜰히 떠올립니다. 따로 사진기라는 기계를 쓰지 않았고, 따로 사진작품이라는 예술이나 문화를 빚지 않았으나, 당신들은 이야기를 일구었어요. 이야기를 일구는 나날을 사랑으로 누렸어요.


  장마당에서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는 이들은 바로 ‘할머니 이야기’를 가만히 살펴보며 사진을 얻습니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글을 얻습니다.


  집에서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아이들 이야기’를 찬찬히 돌아보면서 사진을 얻어요. 아름답다는 멧자락을 올라 사진을 찍을 때에도 ‘멧자락 이야기’를 가슴으로 시나브로 느끼며 사진을 얻어요. 우리들은 늘 이야기를 사진으로 되살립니다. 우리들은 늘 이야기를 사진꽃으로 다시 피웁니다. 우리들은 늘 이야기를 사진빛으로 다시 그립니다.

 


.. 장이 이미 폐쇄되었는데도 난장을 펼쳐 놓고 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반평생을 장터에서 살았는데 장은 없어져도 장바닥은 남아 있다며, 사람이 있는 한 장에 나온다는 여든다섯 살 된 할머니도 있었다 ..  (477쪽)


  이 나라 장터를 두루 돌아다녀도 두툼한 사진책 한 권 나옵니다. 여든다섯 할머니 이야기를 가만히 듣거나 사진으로 빚어도 사진책 한 권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남들을 살필 것 없이 나 스스로 내 하루를 차근차근 짚을 적에도 내 발자국을 사진책 한 권으로 엮을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살아온 날을 되짚는 사진입니다. 살아온 날은 웃음일 수 있고, 눈물일 수 있습니다. 살아온 날은 즐거움일 수 있으며, 괴로움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시원함이요 때로는 고단함입니다. 어느 때에는 망설임이요 어느 때에는 씩씩함입니다. 모든 모습이 실타래처럼 얽히고 이어지면서 삶이 이루어집니다. 삶이 이루어질 때에 책 하나 태어납니다. (4345.9.1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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