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풀빛,1984)을 다시 읽는다. 이 알쏭달쏭한 시집을 단숨에 다시 읽는다. 나는 《노동의 새벽》이라는 묵은 시집을 헌책방에서 마주할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하곤 한다. 오윤 님 판화가 ‘질 다른 종이’로 붙을 뿐더러, 책날개에 찍히는 ‘풀빛 판화시선’ 알림글이 다르고, 책을 찍은 종이가 달라 두께가 달라지는데에도 웬만한 책은 모두 ‘초판’이기 일쑤이다. 《노동의 새벽》 2쇄나 3쇄나 중쇄를 만나기란 아주 힘들기에 알쏭달쏭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노동의 새벽》을 어떻게 알았을까. 글쎄. 1991년에 《머리띠를 묶으며》(미래사)라는 시집이 나온 적 있다. 이무렵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인천 중구 인현동에 있는 〈대한서림〉에서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을 보면서 한 권씩 사서 읽곤 했는데, 100인선집이라 하고서는 101번과 102번이 있었고, 102번으로 박노해 님 시집이 있어 퍽 재미있다고 여겼다. 백 사람을 골랐다면서 백둘째 사람이 있으니 아리송했지만, 어쨌든 나는 102번째 《머리띠를 묶으며》를 맨 처음으로 장만했고, 학교로 걸어가는 길에 이 시집을 다 읽었다.


  고등학교에서는 곧잘 ‘소지품 검사’를 했기에, 이 시집을 가방에 챙겨 학교에 간 날은 몹시 조마조마했다. 가방에 챙겨 학교에 갔어도 교실에서는 섣불리 꺼내어 읽지 못했다. 학교로 가는 길, 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때에 비로소 책을 꺼내어 읽었다. 고등학생 때 ‘걸어서 학교를 오가는 겨를’조차 아깝다 여겨 책을 읽으며 살았다. 이때 이 시집을 몇 차례쯤 읽었을까. 스무 차례? 쉰 차례? 백 차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헌책방을 다닌다. 언제였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마 고등학교 2학년 겨울이나 고등학교 3학년 봄 무렵에 《노동의 새벽》을 헌책방에서 만났지 싶다. “머리띠를 묶으며”라는 책이름만으로도 학교에 책을 들고 가기 두렵다고 여겼기에, “노동의 새벽” 같은 책이름으로는 자칫 소지품검사에 걸리면 크게 말썽이 생겨 학교에서 쫓겨날 수 있겠다고 느꼈다. 이 시집은 집에서도 꽁꽁 숨기며 읽었다. 다른 책 뒤에 몰래 숨겼다. 헌책방에서 이 시집을 장만하던 날 가슴이 얼마나 벌렁벌렁 뛰었는지 모른다.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지켜보며 “학생, 가방 좀 봅시다.” 하고는 나를 붙잡을는지 모를 노릇이기 때문이다. 늦은 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며 이 시집을 읽는데, 책등이 안 보이게 하며 읽으려고 몹시 애를 썼다.


  이제 2012년. 헌책방 어느 곳을 가더라도 《노동의 새벽》은 아주 쉽게 만날 수 있다. 요즈음 이 시집을 애써 들추거나 살펴서 읽으려고 하는 손길은 거의 없지 싶다. 알쏭달쏭한 간기(판권)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노동의 새벽》은 헌책방에서 ‘고서’ 대접조차 못 받는다. 헌책방에 많이 들어오더라도 사는 손길이 드물다며 애물단지라 일컫기까지 한다.


  큰 문방구를 찾아가야 하기에 고흥 읍내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순천으로 간다. 큰 문방구를 들른 다음 순천 저전동 헌책방 〈형설서점〉에 들른다. 두 가지 판본 《노동의 새벽》이 보인다. 판본은 두 가지인데 간기는 ‘찍은 날’이 같다. 나는 소장품으로 살 마음이 아니라 읽을 책으로 살 마음이기에 조금 더 깨끗한 책으로 고른다. 시외버스를 타고 고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거리낌없이 시집을 펼친다.


  문득 생각한다. 고흥에서 자라다가 학교는 중학교도 미처 끝마치지 못한 채 열다섯 나이로 서울 어느 공장에 공돌이로 떠나야 하던 넋이 있는데, 이 넋이 빚은 빛글 한 자락이 시외버스를 타고 고흥으로 돌아간다. 순천을 떠난 시외버스는 벌교를 지나고 동강과 남양을 지나 과역에 선다. 과역을 다시 떠나 점암을 스치며 고흥읍에 닿는다. 나는 고흥읍에서 택시를 불러 포두를 지나고 도화로 들어선다. 내 사랑스러운 살붙이들이 기다리는 동백마을로 돌아온다.


  집에서 아이들은 늦게까지 잠들려 하지 않는다. 밤 열 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두 아이가 하나씩 곯아떨어진다. 너희들은 참말 대단하구나. 아니, 너희들은 참말 놀려고 이 땅에 태어났구나. 아니, 너희들은 이 좋은 어린 날 끝없이 놀고 뛰고 달리고 날아야 비로소 가장 빛나는 목숨이로구나.


  고등학생 때 박노해 님 시를 읽으며 한 가지만 생각했다. 나는 이 나이에 고등학교를 다니며 이 시집을 손에 쥐었다는 까닭 하나로 학교에서 쫓겨날까 벌벌 떠는데, 그러면서 마음 한켠으로는 학교에서 쫓겨나 이 숨막히는 제도권 울타리에서 홀가분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학교 교칙으로는 ‘불온도서’로 손꼽히는 박노해 시집을 일부러 가방에 자주 챙겨서 갖고 다니며 읽는데, 이런 내 나이에 공장에서 공돌이로 일하던 마음은 어떠했을까, 참으로 궁금했다. 내가 열일곱 나이에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아닌 공돌이 ‘3년차’라 한다면 어떤 나날을 살아갈 수 있을까, 더없이 궁금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살면서, 신문사지국 한쪽에 드러누워 《노동의 새벽》을 숱하게 다시 읽는다. 바야흐로 나도 신문배달 ‘일꾼(노동자)’ 마음으로 시를 마주한다. 신문배달을 하는 마음을 시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 하고 헤아려 본다. 이러던 1998년, 무기징역수로 감옥에서 옴쭉달싹 못하던 박노해 님이 풀려난다. 이른바 ‘사상전향서’를 쓰고 감옥에서 풀려났으니 변절을 했다느니 몹쓸 사람이 되었다느니 하는 손가락질이 곳곳에서 솟구쳤다. 학생운동을 하는 동무나 후배들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는 소리를 곁에서 듣는다. 나는 내 동무와 후배한테 시집을 한 권씩 사서 선물해 주었다. 대학교 둘레 헌책방 책시렁에 아무렇게나 꽂힌 채 찾아 주는 손길 없던 《노동의 새벽》을 삭삭 훑듯 모조리 사들여 선물한다. “얘들아, 우리 이 시집을 읽어 보고 나서 이야기하자, 응?”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 《머리띠를 묶으며》나 《노동의 새벽》을 나한테서 빌려 읽으려 하던 동무는 딱 하나 있었다. 다른 동무들은 ‘무서워’ 하며 아예 못 본 척하거나 고개를 홱 돌리곤 했다. 대학교에서는 학생운동을 하건 문학을 하건 뭐를 하건 시집을 읽으려는 벗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나를 잘 따르던 후배 몇은 내가 내미는 시집을 받아들고는 머리를 낑낑거리기는 하되, 이 시들이 무얼 말하는지를 하나도 못 느끼겠다고 했다. 삶이 달라 시를 못 읽을까. 생각이 없어 시를 받아들이지 못할까.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박노해’ 이름을 넣어 살핀다. “《머리띠를 묶으며》에 이르기까지 초기 시 세계는 현실의 사회 제도와 이념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투쟁적이고 선동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수필집 《사람만이 희망이다》 이후에는 생명과 포용과 화해의 길을 찾으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예술성과 정치성을 겸비한 대표적 노동자 시인으로 일컬어져 왔으나, 《사람만이 희망이다》 이후 그의 세계관을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같은 대목을 읽는다. 그런데, 인터넷 백과사전을 엮은 이는 박노해 님 시를 읽기는 읽었을까. 시집 《노동의 새벽》이나 《머리띠를 묶으며》가 ‘선동’하는 시이거나 ‘저항’하는 시이거나 ‘투쟁’하는 시일까.


  곰곰이 돌이키니, 내 둘레에서 오직 한 사람만 박노해 님 시집을 읽고는 ‘사랑’을 노래한다고 말했다. 그래, 맞아, 박노해 님 시는 ‘사랑’을 말해. 투쟁도 혁명도 파업도 분노도 저항도 아니야. 사랑이야.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 새벽 쓰린 가슴 위로 /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 아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하는 노래는, 그래 노래는, 그예 사랑이야. “네가 손꼽아 기다리며 동그라미 쳐논 / 빨간 휴일날 아빠는 특근을 간다.” 하는 노래는, 온통 사랑이야. “푸른 제복에 갇힌 3년 세월 어느 하루도 / 헛되어 버릴 수 없는 고귀한 삶이다.” 하는 노래는, 그야말로 사랑이야.


  삶을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했기에 시를 쓸 수 있겠지. 감옥에서 풀려난 뒤 오래도록 입을 꾹 닫고 슬프게 살다가, 레바논도 아체도 이라크도 찾아다니면서 눈물바람이 되었기에 비로소 다시 시를 쓸 기운을 찾았겠지. 일하는 사람들한테 새벽은 쓰린 찬소주와 같이 고달프지만, 사랑을 생각하며 다시금 기운을 내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새 햇살이야. (4345.9.1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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