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일반판) 문학동네 시인선 2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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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글쓰기
[시를 말하는 시 3]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 책이름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 글 : 허수경
- 펴낸곳 : 문학동네 (2011.1.20.)
- 책값 : 8000원

 


  어떻게 살아가는 재미로 시를 쓸까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생각하는 사랑으로 시를 쓸까 헤아려 봅니다.


  누군가는 시를 머리로 쓰겠지요. 누군가는 시를 이리저리 글과 지식을 엮어서 쓰겠지요. 누군가는 살아가는 하루가 고스란히 시로 태어나겠지요. 누군가는 꿈꾸는 삶이 하나둘 시로 거듭나겠지요.


  시 아닌 다른 글이라 해서 이러쿵저러쿵 찧고 빻듯 쓰지 못합니다. 시험문제를 만들면서 문제 글을 쓸 적이라 하더라도 아무렇게나 글을 만들거나 쓰지 못합니다. 아이들마다 따분하다고 일컫는 ‘교장선생님 아침모임 말씀’이라 한들 아무렇게나 만들거나 써서 읽지 못합니다. 대통령이 내놓는 글이나 경찰총장이 내놓는 글이나 대법원 판결글이라 해서 아무렇게나 만들거나 쓰지 못해요.


  그리운 벗한테 띄우는 글월을 아무렇게나 꾸미거나 쓰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어버이한테 띄우는 글월을 아무렇게나 짜깁기하거나 쓰지 못합니다. 반가운 옆지기한테 띄우는 글월을 아무렇게나 때우거나 쓰지 못합니다.


  어떤 글이라 하더라도 내 모든 삶을 기울여서 씁니다. 어떤 글이라 하더라도 내 모든 마음이 찬찬히 스며듭니다.


.. 유전인자 관리하던 실험실도 잠기고 그 안에서 태어나던 늑대들도 잠기고 / 나의 도시 나의 도시 울고 그 안에서 그렇게 많은 전병이나 만두를 빚어내던 이 방의 식당도 젖고 ..  (나의 도시)


  밤과 새벽에 빗줄기가 들었습니다. 밤에는 잠결에 빗소리를 들으며 생각합니다. 마당에 뭐 내놓아서 비에 젖을 만한 무언가 있나, 하고. 없지? 하고 생각하며 다시 차분히 꿈나라로 접어듭니다. 새벽에는 잠결에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새벽에 비가 와서 마당이 젖으면 빨래를 해서 널기 나쁜데.


  하늘에 낀 먼지를 씻고, 나무들 잘 자라라며, 비가 내려요. 하늘을 덮은 때를 벗기고, 풀들 잘 크라며, 비가 찾아와요.


  사람들은 나무와 이웃하면서 비를 즐깁니다. 사람들은 풀과 벗삼으며 비를 누립니다.


.. 차비 있어? / 차비는 없었지 / 이별은? / 이별만 있었네 ..  (수수께끼)


  오늘은 모처럼 빨래기계를 씁니다. 여러 날 바깥마실을 마치고 돌아온 터라 빨래감이 많습니다. 내 어버이와 옆지기 어버이, 곧 아이들 할머니랑 할아버지를 만나러 멀디먼 길을 버스와 기차에서 시달리느라 모두들 고단하고 지칩니다. 손빨래를 하며 몸을 풀고 마음을 가다듬을 만합니다만, 오늘은 늦잠을 자고 싶어요.


  늦잠을 자더라도 새벽에 쌀을 씻어서 불립니다. 게으름을 부리더라도 아침에 마른표고버섯 냄비에 넣고 물에 불립니다. 음성 할머니가 표고버섯을 손수 길러 따고는 예쁘게 말려서 봉지에 담아 주셨습니다. 마른표고버섯을 한손으로 움켜쥐어 냄비에 넣으며 내 할머니 손길을 떠올립니다. 내 할머니는 어떤 마음을 이 표고버섯에 담아서 기르고 따서 갈무리했을까요. 어떤 꿈을 지으면서 이 표고버섯을 예쁘게 말리셨을까요. 내 할머니가 품은 마음과 빚은 꿈은 옆지기와 아이들한테 솔솔 스며들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별도 구워 먹으리라 했어요 / 70년대 초반 / 가장 어린 나 가운데 하나가 별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어요 / 뒤에서 내려다보면 먹다 만 고구마 형상이었어요 /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곰별자리였어요 ..  (고구마별)


  먼 바깥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택시길에 참으로 홀가분합니다. 기차길을 끝내고 버스길을 끝낸 우리 식구는 읍내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옵니다. 짐이 무겁고 몸이 무거우며 군내버스가 끊기기도 합니다. 시골에서 택시를 타는 사람은 으레 할머니랑 할아버지라 하지만, 우리 식구는 자가용을 굴리지 않으니 즐겁게 택시를 탑니다. 굳이 우리가 자가용을 몰 까닭은 없으니까요. 애써 우리가 자가용을 굴리느라 이쪽에 마음을 기울일 까닭은 없으니까요.


  택시에서는 에어컨 아닌 창문바람을 쐽니다. 오랜만이로구나 싶습니다. 여러 날 기차와 시외버스에서 에어컨바람에 시달린 탓인지 창문바람이 더없이 싱그럽습니다.


  택시는 고흥읍을 벗어나 포두면을 달립니다. 포두면을 벗어나 도화면으로 접어듭니다. 포두면을 달릴 적까지도 창밖 풀숲에서 풀벌레 노랫소리를 못 듣습니다만, 도화면으로 접어드니 바야흐로 풀벌레 노래잔치입니다. 달리는 택시에서도 풀벌레 노랫소리가 온몸과 온마음으로 훌훌 스며듭니다.


  눈을 틉니다. 귀를 틉니다. 마음을 트고 몸을 틉니다. 그동안 갇히거나 막히거나 닫힌 구멍을 틉니다.


.. 석유를 찾기 위해 피곤한 사내들이 바닷속으로 철의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구멍을 뚫어야 지속되던 문명이 있었다고, 우주의 먼 곳에서 우주의 역사를 기록하던 빛이 있었다 // 콩나물시루도그곳에두었어요어떤콩은썩어서뿌리조차아기처럼젖을보채다잠이들었지만 ..  (오후)


  옆지기는 아이들을 씻깁니다. 나는 배앓이를 합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밥을 차리기 힘들 듯해 읍내 중국집에 들렀는데, 옆지기가 건넨 찬콩국수 가락이 속에서 부글거리며 괴롭힙니다. 찬국수도 동치미도 안 받는 내 배는 여러 날 바깥밥·바깥바람에 휘둘리다가 마지막에 찬기운 머금은 국숫가락을 만나니 펑 하고 터진 듯합니다.


  아이고 배야 하며 똥을 누다가 문득, 이렇게 뱃속을 시원스레 털면 한결 느긋하게 잠들면서 새 하루를 반가이 누리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그렇구나, 배앓이는 나를 보살피려고 찾아오는구나.


  아이들은 몸을 씻고 나서도 뛰어놉니다. 아이들도 고단한 몸일 텐데, 새롭게 땀이 돋을 만큼 뛰어놉니다. 참 놀라운 아이들이네, 하고 생각하다가, 나도 아이들 나이였을 적에는 그야말로 놀라운 아이들답게 끝없이 놀고 뛰고 날고 기며 살았잖니, 하고 떠오릅니다.


  놀 수 있을 때까지 놉니다. 놀다가 까무룩 잠들 때까지 놉니다. 놀 수 있는 모든 힘을 씁니다. 놀다가 까무룩 잠들도록 힘이 다 떨어질 때까지 놉니다.


.. 무리를 이루며 사는 우리들은 무엇보다 무리에 속할 이들의 안녕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살아남기 위한 미덕. 흩어지면 육식동물의 표적이 되므로 우리라는 종이 이 지상에서 태어나던 처음부터 배려라는 미덕을 우리는 본능처럼 갖는다. 그 본능은 인간이 우리를 사육화했던 역사 속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  (카라쿨양의 에세이)


  시를 쓰는 마음을 헤아립니다. 아이들과 같은 넋이 되어 시를 쓰는 이라면, 아이들이 온힘을 다 내어 놀듯, 온힘을 다 내어 시 한 줄을 쓰겠지요. 아이들 보살피는 어버이와 같은 넋이 되어 시를 쓰는 이라면, 아이들 노는 양을 말끄러미 지켜보며 하루를 더 기운내어 열고 누리듯, 씩씩하고 다부지게 시 한 줄을 쓰겠지요.


  어느 넋이 좋고 어느 넋이 나쁘다고 따질 수 없습니다. 그저 저마다 스스로 즐기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가난을 즐기고 재산을 즐깁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쳇바퀴를 즐기고 한갓짐을 즐깁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바쁜 톱니바퀴를 즐기고 따사로운 사랑을 즐깁니다. 즐기는 결이 고스란히 시로 태어납니다. 즐기는 꿈이 하나하나 시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즐기는 넋이 시나브로 시라는 옷을 입고 환하게 빛납니다.


.. 아마도 내가 당신을 잊어버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야 이렇게 잠 속에 든 당신 옆에 내가 누워 있겠는가. 이제 당신을 나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  (여기는 그림자 속)


  허수경 님은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2011)이라는 시집 하나 내놓습니다. 책이름에 ‘빌어먹을’이라니, 스스로 무엇을 ‘빌어먹을’이기에 이렇게 시를 내놓을까 아리송합니다. 그러나, 참말 허수경 님으로서는 ‘빌어먹을’밖에 없어 이렇게 시를 쓰고 시집을 내겠지요. 스스로 ‘차가운 심장’이라 느끼며 삶을 맞아들여 누리니까 ‘차가운 심장’ 이야기를 시로 쓰고 책으로 내겠지요.


.. 저녁에 흙을 돋우다가 나비를 보았네 / 저녁에 흙을 부드럽게 만져 / 막 나오는 달리아를 편하게 하려다가 / 나비를 보았네 ..  (저녁에 흙을 돋우다가)


  허수경 님 스스로 흙을 만질 때에는 ‘흙을 만지는’ 시를 씁니다. 허수경 님 스스로 누군가와 헤어질 때에는 ‘헤어지는’ 시를 씁니다. 눈물을 흘리는 날에는 ‘눈물 흘리는’ 시를 씁니다. 공항에 머물 적에는 ‘공항에 머물던’ 시를 써요.


  더 좋은 삶이란 없고 더 나쁜 삶이란 없습니다. 스스로 즐기는 삶일 뿐입니다. 스스로 즐기는 삶이 스스로 즐기는 시로 태어납니다.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기에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는 시를 쓰겠지요. 그리운 누군가를 잊기에 ‘그리운 누군가’를 잊는 시를 쓰겠지요.


  나는 고즈넉한 시골마을에서 두 아이랑 복닥이면서 요모조모 살림을 꾸립니다. 곧, 내가 시를 쓸 적에는 고즈넉한 시골마을 삶을 드러내고, 두 아이랑 복닥이는 사랑을 드러내며, 요모조모 꾸리는 살림을 빛냅니다. 그래요, 나는 이 삶을 좋아하기에 이렇게 살아요.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삶을 마음껏 누리면서 내 웃음꽃을 이곳에서 길어올려요. 내가 바라는 꿈은 내가 좋아하는 삶터에서 누리는 이야기 그대로 이루어져요. 시를 쓰는 사람은 삶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4345.9.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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