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숲’
[말사랑·글꽃·삶빛 24] 마음을 빛내는 말
언제부터인가 ‘자연보호(自然保護)’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자연을 돌보자, 자연을 지키자, 자연을 아끼자, 자연을 사랑하자, 이런 여러 가지로 쓰면 한결 좋았을 테지만, ‘자연보호’ 네 글자로 곳곳에 푯말을 세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한자로 된 네 글자 말마디를 쓰는 버릇은 퍽 옛날부터 ‘고사성어’라는 이름으로 흘러들었습니다. 그러니, 아주 스스럼없이 ‘자연보호’를 외쳤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자연(自然)’이란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라 합니다. 그러나, 이 한자말 ‘자연’을 한국사람이 언제부터 썼는지 아리송합니다. 조선 무렵에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고려나 백제나 신라나 고구려나 가야 무렵에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예전 지식인이 한자로 삶과 생각을 나타내던 때에는 어떠한 한자말로 ‘자연이 가리키는 무엇’을 나타냈을까요.
옛시조나 옛소설에는 ‘강산(江山)’이라는 한자말을 으레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강과 산이라는 뜻으로, 자연의 경치를 이르는 말”이라 하는데, 조선이나 고려 적 사람들이 ‘강산’이라는 한자말을 쓸 적에는 “자연의 경치”만 가리키지는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자연의 경치”라기보다 “자연”을 가리켰겠지요.
예전 지식인이 아닌 조선 무렵 흙일꾼이나 고려 무렵 흙일꾼, 또 고구려 무렵 흙일꾼이라든지 가야 무렵 흙일꾼, 여기에 옛조선 무렵 흙일꾼은 ‘자연’이든 ‘강산’이든 어떠한 낱말로 가리켰을까요. 옛사람이 바라보던 ‘자연’이나 ‘강산’이란 무엇이었을까요.
한자를 받아들이지 않던 무렵에는 어떠한 낱말로 우리 둘레 터전을 가리켰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처음으로 생겨 사람들 삶터를 하나하나 일컬을 무렵에는 어떠한 낱말로 ‘오늘날 자연이나 강산이라는 낱말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을까 헤아려 봅니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2000년대를 살아가는 내 몸뚱이가 아닌 천 해나 이천 해나 삼천 해나 오천 해 앞서 살던 내 넋으로 생각합니다. 오만 해나 십만 해 앞서 살던 내 얼로 헤아립니다.
그래, 그무렵에는 내 삶터이고 내 둘레 터전이고 온통 ‘숲’이었구나 하고 떠오릅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로 ‘숲’은 ‘수풀’을 줄인 낱말이요, “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지거나 꽉 들어찬 것”을 뜻한답니다. 그런데, 나무가 우거진 곳이란 나무만 있는 곳이 아니에요. 풀이 함께 있습니다. 벌레가 함께 있습니다. 새가 함께 있고, 온갖 짐승이 함께 있습니다. 풀과 나무가 있는 데에는 돌도 있고, 냇물이 흐릅니다. 돌과 바위와 모래와 흙이 얼크러져 골짜기를 이룹니다. 멧자락을 이루고 멧골이 이루어집니다. 먼먼 옛날, 한자도 한글도 없던 옛날, 스스로 사랑을 빛내어 삶을 일구던 사람들은 ‘숲’에서 살았어요. 숲이 곧 지구요, 숲이 곧 온누리요, 숲이 곧 우주였어요.
그렇다면 바다는? 하늘은? 바람은? 해는?
과학자가 밝히기도 하지만, 바다는 바다 홀로 있지 않습니다. 뭍보다 너른 바다입니다만, 바다는 숲이 있어 바다 구실을 합니다. 숲에서 모래와 흙과 돌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바다로 흘러들어 바다가 싱그럽게 숨쉽니다. 낱낱이 따로 떼내어 가리키자면 ‘나무’이고 ‘돌’이고 ‘메’이고 ‘냇물’이고 ‘바다’라 할 테지만, 가만히 헤아리면 이 모두를 아우르는 ‘숲’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터는 숲으로 이루어졌으며, 숲이 있기에 사람 누구나 숨을 쉽니다.
이 숲을 감싸는 하늘이 있고, 이 숲을 간질이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 숲을 살찌우는 해가 있어요. 하늘과 바람과 해를 찬찬히 헤아리고 보면, ‘숲’이라는 낱말로 가리킬 테두리가 참 작구나 여길 수 있지만, ‘자연’이라는 낱말이라고 해서 더 넓게 가리키지는 못해요. ‘자연’이라는 낱말로 ‘하늘’이나 ‘바람’이나 ‘해’를 아우를 수 없습니다. 달이나 우주를 ‘자연’이라는 낱말로 담을 수 없어요. ‘자연’이라는 한자말은 “사람 힘이 닿지 않고 이루어진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정작 ‘자연’이라는 낱말은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 테두리에서 가리킵니다. 곧, ‘숲’이에요.
이렇게 살피고 나서 새삼스레 ‘자연보호’라는 외침말을 들여다봅니다. 정치권력을 손에 쥔 이들이 외친 ‘자연보호’는 ‘숲을 지키자’였습니다. 숲을 살리고 숲을 가꾸며 숲을 돌보자고 외쳤습니다. 한 마디로 간추리면, 정치권력을 손에 쥔 이들 스스로 ‘숲사랑’을 외친 셈입니다.
한자가 한국땅에 깃들어 ‘글 권력’을 이루던 때에 ‘사자성어’나 ‘고사성어’도 태어납니다. 이러한 권력 언저리에서 가지를 치는 ‘자연보호’ 같은 낱말입니다. 글로도 정치로도 돈으로도 학문으로도 권력을 이루지 않으며 살아가는 여느 마을 여느 살림꾼 눈높이에서 다시금 짚어 봅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밟고 올라서지 않는 데에서는 ‘사랑’이 태어납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나를 사랑합니다. 삶이란 서로 사랑하며 빛납니다. 이리하여, 어버이는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는 어버이를 사랑합니다. 사내는 가시내를 사랑하고 가시내는 사내를 사랑합니다. 나무는 풀을 사랑하고 풀은 나무를 사랑합니다. 저절로 샘솟는 말마디 ‘숲사랑’입니다. 스스로 거듭나는 말마디 ‘숲사랑’이에요.
나무는 사람이 심는대서 널리 퍼지거나 자라나지 않습니다. 나무는 나무 스스로 씨앗을 맺습니다. 나무는 나무 스스로 꽃을 피우고 잎을 틔웁니다. 나무는 홀가분하게 살아갑니다. 나무는 씩씩하게 자라납니다. 나무는 사람 힘이 닿지 않아도 천천히 우거지며 숲을 이룹니다. 사람은 나무가 이룬 숲에 예쁘게 깃들며 서로 어깨동무합니다. 사랑입니다. 나무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은 나무를 사랑합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꿈입니다. 스스럼없이 빛나는 삶입니다. 홀가분하게 피어나는 사랑입니다. (4345.8.11.흙.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