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32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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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눈길
[시를 말하는 시 2] 문태준, 《가재미》

 


- 책이름 : 가재미
- 글 : 문태준
-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2006.7.21.)
- 책값 : 8000원

 


  바라보는 곳을 시로 씁니다. 바라보면서 느끼기에 시로 씁니다. 바라보면서 느끼고, 좋구나 아쉽구나 기쁘구나 슬프구나 재미있구나 놀랍구나 안쓰럽구나 아프구나 웃기구나 멋스럽구나 하고 느끼면서 시를 씁니다.


  한여름 무르익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신호리 시골 논길을 두 아이를 수레에 태워 자전거로 면소재지 우체국을 다녀옵니다. 가는 길에는 못 보았으나 오는 길에는 널따랗게 펼쳐진 논 가운데 한 곳은 벌써 이삭이 패고 알곡이 맺힙니다. 달리던 자전거를 멈추고는 한참 들여다봅니다. 작은아이는 잠들었으나 큰아이는 졸린 눈을 비비며 잠을 쫓습니다. 큰아이더러 여기 이 논에만 벌써 알곡이 맺혔다고 알려줍니다.


  면소재지로 가는 길은 살짝 내리막이라 수월히 달리는데, 외려 수월히 달린 탓인지 왼쪽도 오른쪽도 더 찬찬히 살피지 못했구나 싶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살짝 오르막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는데, 참말 힘들게 달리기에 천천히 지나가면서 왼쪽도 오른쪽도 조금 더 오래 더 찬찬히 살피는구나 싶습니다.


  땀이 줄줄 흐르지만, 때때로 노래를 부릅니다. 자전거수레에 타며 아버지하고 여름바람 쐬는 아이들이 느긋하게 쉬며 하늘빛을 느끼고 들빛을 느끼라며 온갖 노래를 부릅니다. 살짝 오르막인 길을 땀흘려 달리면서 노래를 부르다 보면 목이 컥컥 막힙니다. 숨이 가쁩니다. 이럴 때에는 빠르기를 더 늦춥니다. 더 천천히 달리며 숨을 고르고, 숨을 고르면서 노랫가락을 가다듬습니다.


.. 작은 독에 더 작은 수련을 심고 며칠을 보냈네 ..  (수련)


  스스로 바라보는 곳에 따라 생각이 달라집니다. 이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은 이곳 내음과 무늬와 결을 천천히 받아들입니다. 저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은 저곳 흐름과 깊이와 너비를 하나씩 맞아들입니다. 올림픽 이야기를 바라보는 사람은 어느 결에 올림픽 이야기에 마음을 씁니다. 달동네 이야기를 바라보는 사람은 시나브로 강제철거 이야기에 마음을 씁니다.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며 논밭을 늘 바라보는 사람은 스스로 흙을 일구지 않더라고 흙일에 마음을 씁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늘 바라보는 사람은 저절로 교육에 마음을 쓰겠지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는 사람은 지하철이나 버스가 언제 오는가에 마음을 쓰다가는 지하철 환경이나 버스가 막히거나 거칠게 달리는 모습에 마음을 씁니다. 어디를 가든 자가용을 모는 사람은 교통 정보에 마음을 써요.


  무엇을 바라보느냐는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보여줍니다.


  누군가는 하루를 온통 들여 밥을 하고 비질과 걸레질을 하며 아이들을 보살피다가는 빨래를 합니다. 밥을 해야 하니 저잣거리에 다녀와야 하고, 저잣거리에 다녀오면서 가게마다 물건을 어떤 값으로 파는가를 살핍니다. 집일이나 집살림을 하면서 집안과 집밖 흐름을 살핍니다. 아이들과 복닥이면서 아이들 눈빛이나 몸짓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누군가는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회사나 공공기관 얼거리에 젖어듭니다. 스스로 맡은 일을 훌륭히 해내면서 회사원답고 공무원답게 삶을 보냅니다. 스스로 선 자리에서 스스로 삶을 바라볼 뿐 아니라, 둘레에 있는 사람들도 스스로 선 자리에서 생각합니다.


.. 장대비 속을 / 멧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 彈丸처럼 빠르다 ..  (바깥)


  내 어릴 적을 돌이킵니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첫무렵에는 학교에서 ‘1일 생활권’이라는 낱말을 가르쳤습니다. 나라안 곳곳에 고속도로가 새로 뚫리며 ‘1일 생활권’이 되니 참 살기 좋은 나라라고 했습니다. 새로 뚫리는 고속도로 이름을 외워야 했고, ‘백지도’라는 데에 고속도로를 그려야 했습니다. 고속도로가 더 많이 더 길게 생겨야 ‘나라 발전’이라고 들었습니다. 고속도로를 새로 짓는 대통령 ‘님’인지 ‘각하’인지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 가을에 강원도 양구에 있는 군대에 들어가서 스물여섯 달을 지내며 이무렵에도 한국은 아직 ‘1일 생활권’이 아닌 줄 몸으로 느낍니다. 강원도 양구 깊은 멧골짝에 있는 군부대로 주말마다 온갖 사람들이 면회를 오시는데, 적잖은 시골사람들은 1박2일이나 2박3일에 걸쳐 찾아오셨어요. 전라남도 완도나 진도나 강진에서 찾아오는 분들이 으레 여러 날에 걸쳐 오시더군요.


  그러고 보면, 나도 이런 일을 흔히 겪습니다. 충청북도 음성에서 살던 때에 충청남도 홍성으로 나들이를 가느라 여덟 시간이 걸렸어요. 전라남도 고흥에서 살며 충청북도 음성에 있는 내 어버이를 뵈러 가는 데에 아홉 시간이 걸려요. 자가용 없이 ‘대중교통’이라 하는 시외버스나 기차를 여러 차례 갈아타면서 ‘가장 빠르다’는 길로 다녀도 ‘길그림으로는 그리 안 멀다’ 싶은 곳까지 참 오랜 시간을 들입니다. 전남 고흥에서 충북 음성까지 아홉 시간이니, 하루에 찾아갔다가 돌아오지 못해요. 열여덟 시간을 들이더라도 시외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움직일 수 없어요.


  오늘날에는 온갖 고속도로가 참 많은데, 초등학교에서 아이들한테 고속도로 이름을 외우도록 시키며 시험문제로도 내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 앞에 선 교사는 ‘나라 발전’이 무엇이라고 가르칠는지 궁금합니다. 공산품을 다른 나라로 많이 내다 팔아야 나라 발전이 될는지, 공장을 많이 짓거나 댐을 세우거나 발전소나 대기업이 많이 생겨야 나라 발전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주식투자와 자기계발과 무엇무엇이 얼마나 시끌벅적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  (극빈)


  새벽 세 시에 작은아이가 기저귀에 쉬를 눕니다. 작은아이 기저귀를 갑니다. 이윽고 큰아이가 끙끙거립니다. 큰아이 등을 쓸면서 쉬 마렵니, 쉬 마려우면 일어나렴, 하고 말합니다. 큰아이는 끙끙거리던 소리를 멎고 조용합니다. 이십 분쯤 뒤, 큰아이가 부시시 일어나며 묻습니다. “지금 몇 시예요?” 아이는 벌써 일어나서 하루를 열며 놀 마음일까요? 설마. “아직 일어나서 놀 때는 아니에요. 쉬 마렵니? 쉬 하자.” 하고 얘기하며 오줌그릇에 앉혀 쉬를 누입니다. 쉬를 다 눈 아이하고 방으로 들어와서 누워 자도록 하고 등을 다시 천천히 씁니다.


  큰아이하고는 어느덧 다섯 해째, 작은아이하고는 이제 두 해째, 낮 똥오줌을 치우고 밤 똥오줌을 가리거나 치웁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 언제나 아이들하고 찰싹 붙으며 살아갑니다. 이토록 찰싹 붙어 살아갈 줄 알았는지 몰랐는지 헤아릴 길은 없으나, 아이 둘이랑 옆지기하고 찰싹 붙어 살아가며 생각합니다. 이렇게 찰싹 붙어 살아가기에 ‘아이들 마음’을 한결 깊이 알거나 느낀다고는 할 수 없으나, 아이들과 함께 한 곳을 바라보는구나 하고는 느껴요. 내가 바라보는 곳을 아이들이 바라보고, 아이들이 바라보는 곳을 내가 바라봐요.


..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식은 재를 끌어내 그녀가 불의 감각을 잊도록 하는 것 // 저 먼 나라에는 눈보라조차 메밀꽃처럼 따뜻한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  (가재미 3)


  어버이인 나와 옆지기가 읊는 말은 아이들이 배우는 말입니다. 둘레 어른들이 아무렇게나 읊는 말이라 하더라도 아이들이 익히는 말입니다. 나와 옆지기가 살아가는 모습은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매무새입니다. 둘레 어른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아이들이 맞아들이는 몸짓입니다.


  아이들이 착하거나 슬기롭기를 바라면, 어버이로서 나부터 착하거나 슬기롭게 살아갈 노릇입니다. 아이들이 맑은 눈빛이나 밝은 말빛을 길어올리길 바라면, 어버이로서 나부터 맑은 눈빛이 되거나 밝은 말빛을 다스릴 노릇입니다.


  내 눈길이 내 삶이 됩니다. 내 삶이 내 눈길이 됩니다. 내 말마디가 내 사랑이 됩니다. 내 사랑이 내 말마디가 됩니다.


  내가 부르는 노래는 내 삶입니다. 내 삶이 내가 부르는 노래로 태어납니다. 내가 쓰는 시는 내 삶입니다. 내 삶이 내가 쓰는 시로 거듭납니다.


.. 개망초가 하얗게 피었다 / 잠자리가 날 때이다 / 너풀너풀 잠자리가 멀리 왼편에서 바른편으로 혹은 / 거꾸로 / 강이 흐르듯 누워서 누워서 ..  (번져라 번져라 病이여)


  더 좋거나 덜 좋은 시나 노래나 사진이나 만화란 없습니다. 나한테 더 반갑거나 즐거울 만한 시나 노래나 사진이나 만화란 없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결에 따라 받아들이는 시나 노래나 사진이나 만화가 있을 뿐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눈길에 따라 맞아들이는 시나 노래나 사진이나 만화가 있을 뿐이에요.


.. 작은 돌에 / 새가 / 지긋이 / 앉아 운다 ..  (작은 새)


  시를 쓰는 문태준 님이 내놓은 시집 《가재미》(문학과지성사,2006)를 읽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읽습니다. 아이들과 복닥이는 틈바구니에서 살짝 등허리를 쉬며 자리에 드러누울 적에 천천히 천천히 읽는데 하루만에 책을 덮습니다. 문태준 님은 “울퉁불퉁한 뼈 같은 시(시인의 말)”라고 말하는데, 문태준 님 스스로 바라보기에 당신 싯말은 울퉁불퉁한 뼈요 당신 삶 또한 울퉁불퉁한 뼈일 테지요.


  나한테는 시가 어떠할까 하고 곱씹어 봅니다. 나도 내 뼈를 들여다보며 살아가나 하고 고개를 갸웃해 봅니다. 나는 내 뼈를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뼈와 살점과 힘살과 물과 피와 세포와 털과 눈과 여러 가지가 골고루 얼크러져 이루어진 몸뚱이가 있고, 이 몸뚱이를 움직이는 마음(가슴)과 머리(생각)가 있습니다. 나는 내 뼈만 따로 바라보거나 생각한 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뼈가 울퉁불퉁한지 반반한지 곧은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내 살결이나 손마디가 어떠한지도 모릅니다. 나는 내 머리카락이나 발톱이 어떠한지도 모릅니다. 다만, 내 뼈도 살결도 손마디도 머리카락도 발톱도 모두 내 몸을 이룹니다. 곧, 나한테 시가 무엇인가 하고 밝히라 한다면, 내 시는 내 모두입니다. 내 시라면 내 삶이고, 내 시라면 내 사랑이며, 내 시라면 내 마음입니다.


  내 삶이 시로 드러나고, 내 사랑이 시로 스며들며, 내 마음이 시로 빛납니다.


.. 그믐달은 우물물처럼 차오르고 / 잠든 아이는 꿈에서도 자라나네 ..  (겨울밤)


  시집 《가재미》를 읽으며 “나는 노란 소국을 窓에 올려놓고(小菊을 두고)”라든지 “겨울밤 卍海도 東里도 언 잎에 싸락눈 치는 소리 듣다(그리운 밥 냄새)”라든지 “삯바느질로 끼니를 이어가던 貧女의 집안에(오, 가시등불!)”라든지, 톡톡 튀어나오는 한자가 무척 낯섭니다. 그런데 “이런 욱욱한 돌로(돌의 배)”라든지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누가 울고 간다)”라든지 “뜨막하게 소꿈을 꾸는(꿈)”이라든지, 툭툭 튀어나오는 토박이말이라는 낱말도 퍽 낯섭니다.


  그러나 이 모두 싯말을 이룹니다. 이 모두 문태준 님이 바라보고 들으며 읊는 삶에서 우러나오는 싯말을 이룹니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 나한테 낯익고 낯설고를 떠나, 문태준 님은 이러한 말마디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문태준 님은 이러한 낱말로 삶을 바라보고 사랑을 바라보며 마음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시란 무엇일까요. 시를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시를 읽는 사람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요.


  새벽 세 시 사십 분, 좀처럼 다시 잠들지 못하는 큰아이가 아버지를 찾아 옆방으로 또르르 와서는 품에 안깁니다. 나는 큰아이를 무릎에 누여 토닥토닥 재우면서 글 한 줄 씁니다. 큰아이더러 “왜에?” 하고 묻고, 큰아이는 “안아 주세요.” 하고 말하며, 나는 무릎을 내어주며 두 팔로 살포시 안습니다. 아직 많이 후끈거리는 한여름 새벽 세 시 사십팔 분, 아이가 내 무릎에 누우면 아이 등판은 퍽 뜨뜻할 테고 내 무릎이며 몸은 꽤 후끈거려 땀이 돋겠지요. 그래도 부채질을 하며 아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다시 잘 자렴 하고 마음속으로 말을 건네면 아이도 어버이도 좋은 새벽을 누리며 곧 틀 동을 맞이하리라 생각합니다. 새벽 세 시 오십팔 분, 이제 내 무릎은 찌릿찌릿 저립니다. 아이가 더 깊이 잠들 때까지 기다려야 할 텐데, 그무렵이 되면 내 무릎은 아주 저려 일어나지도 못할 듯합니다.


  새 하루를 새 마음으로 빚습니다. 새 마음으로 새 삶을 일굽니다. 새 삶으로 새 말을 영급니다. 새 말은 시 하나로 곱게 피어납니다. (4345.8.1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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