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수사학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85
손택수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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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이 이끄는 삶과 사랑과 꿈
 [책읽기 삶읽기 110] 손택수, 《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2010)

 


  새벽 네 시 갓 넘긴 아직 깜깜한 마을에서 저 멀리 싯누런 초승달을 바라봅니다. 들판마다 개구리 노랫소리 잦아드는 무렵, 밤을 밝히는 멧새 우는 소리 가늘게 들리고, 마당 한켠 후박나무 우거진 잎사귀는 하나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무척 고요합니다. 바람은 자취를 감추었고, 이웃집 마늘밭은 말끔하게 텅 비었습니다. 곧 새로운 싹이 돋아 새로 심은 씨앗이 천천히 자라겠지요.


  엊그제까지 꽤 높다랗게 자라던 상추풀을 떠올립니다. 이웃밭 할머님은 골을 따라 상추를 심으셨는데, 상추는 줄기를 높이높이 올리고 꽃송이를 벌렸더랬습니다. 상추꽃마다 흰나비 찾아들어 반짝반짝 춤추더랬습니다. 사람들은 으레 잎사귀만 달랑달랑 달린 상추를 보지만, 상추가 풀이 되도록 둘 때에는 이렇게 키가 크고 꽃이 맺히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웃 할머님은 손이 달리고, 딱히 뜯어 먹을 사람이 없다 하기에 높이높이 자랄 수 있었다지만, 사람들은 상추이건 당근이건 무이건 배추이건 마늘이건 양파이건 꽃대가 올라 봉오리가 해사하게 벌어지도록 두지 않습니다. 꽃을 보지 않고 꽃을 생각하지 않아요. 꽃과 열매와 씨앗 없는 푸나무는 없으나, 꽃도 열매도 씨앗도 어느 틀에 가두어 지식으로만 머리에 담습니다.


.. 책 앞에서 침이 고이는 건 / 종이 귀신을 아들로 둔 어머니의 쓸쓸한 버릇 /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같다고 / 아내도 읽지 않는 내 시집 귀퉁이에 / 어머니 침이 묻어 있네 ..  (육친)


  장미꽃도 꽃이고 튤립꽃도 꽃이며 나리꽃도 꽃입니다. 풀꽃도 꽃이고 들꽃도 꽃이며 나무꽃도 꽃입니다. 산초나무에는 산초꽃이 핍니다. 앵두나무에는 앵두꽃이 핍니다. 사람들이 씨를 받거나 얻어 심는 꽃이 있으나, 사람들 손을 타지 않으면서 널리 퍼지며 살아가는 꽃이 훨씬 많습니다. 아니, 지구별은 사람 손을 타지 않으며 스스로 퍼지고 이어가는 꽃과 풀과 나무가 있어 푸른 빛깔을 건사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도시를 세우고 공장을 지으며 찻길을 닦느라 함부로 망가뜨리는 손길을 애꿎게 뻗치더라도, 빙그레 웃으며 따사로이 이 땅을 보듬는 꽃씨 풀씨 나무씨가 푸른 숨결을 나누어 줍니다.


  이제 사람들은 옷을 손수 짜거나 깁지 않습니다. 가게에서 돈을 치러 사다 입습니다. 집에 재봉틀을 둔다 하더라도 실을 손수 얻지 않습니다. 실을 손수 얻고 천을 손수 마름하면서 옷을 짓는 사람은 얼마나 남았을까요. 앞으로 여느 살림을 꾸리면서 식구들 옷을 손수 지을 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남을 수 있을까요.


  시골마을 곳곳에 모시풀이 흐드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아마 예전에는 시골마을 누구나 손수 옷을 지어 입었을 테니, 이 모시풀이 이대로 흐드러지기만 하다가 시들어 죽도록 내버리지 않았겠지요. 논이나 밭을 일구며 낫으로 베어 버리거나 불에 태워 죽일 까닭이 없겠지요. 하나하나 알뜰히 건사해서 줄기를 째고 실을 얻으려 했겠지요.


.. 식육점 간판을 가리다 / 잘려 나간 가지 끝에 / 물방울이 맺혀 있다 ..  (나무의 수사학 2)


  우리 집 마당 한켠에서 우람하고 씩씩하게 자라는 모시풀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한겨레가 모시풀에서 실을 얻어 천을 짜고 옷을 지은 지 즈믄 해를 훨씬 넘었다 하는데, 처음에 어떤 사람이 모시옷을 생각했을까 궁금합니다. 어떤 넋으로, 어떤 얼로, 어떤 꿈으로, 어떤 사랑으로, 어떤 마음과 이야기로 모시옷을 그림으로 그리며 즐거이 실을 얻었을까요.


  아마, 맨 첫 사람은 온갖 일을 다 해 보았겠지요.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면서 차츰차츰 익숙해졌을 테고, 아이들한테 물려주고 또 아이들이 물려받으면서 시나브로 새로운 솜씨가 나타나고 더 낫거나 수월한 솜씨가 태어났겠지요.


  그러고 보면, 먼먼 옛날이 아니라 하더라도 풀줄기에서 실올을 깨닫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갓 돋은 풀은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손가락 한둘로 잡아당기면 톡톡 끊어집니다. 어린이 누구라도 민들레 꽃대를 톡 끊어 씨앗을 훌훌 날릴 수 있어요. 우리 집 아이가 세 살 적에도 강아지풀 줄기를 꺾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쉬 꺾이는 강아지풀이라 하더라도 어느 만큼 자랐거나 비쩍 말랐을 때에는 좀처럼 안 끊어지기도 합니다. 강아지풀 줄기를 여럿 한꺼번에 쥐어 꺾으려 할 때에도 되게 안 끊어집니다.


  유채 줄기를 꺾고 안을 들여다본다든지, 꽤 굵직한 줄기로 오르는 풀 ‘줄기 속’을 살펴본다든지 하면, 풀줄기 속이 가느다란 실처럼 촘촘히 이어진 모습을 헤아릴 수 있어요. 나도 국민학생 적에 ‘풀줄기 속 가느다란 실올’을 바라보며 ‘이렇게 가느다란 실올이 잔뜩 있으니 꺾기 힘들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식구들과 함께 먹을 풀물을 짜면서도 이런 ‘풀줄기 속 실올’을 봅니다. 첫여름 여린 칡싹을 꺾을 때에도 ‘풀줄기 속 실올’을 느낍니다.


.. 비지땀을 흘리며 몇 번씩 밭과 웅덩이 사이를 왕래하면서 / 나는 처음으로 머위와 감자와 방울토마토의 목마름을 생각한다 / 가문 여러 날 뿌리 끝에 쥐고 놓지 않는 한 방울 / 속에 든 구름과 하늘을 생각한다 ..  (물통)


  살아가려는 마음이란 사랑하려는 마음이리라 느껴요. 사랑하려는 마음이란 아름다운 마음이로구나 싶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가녀린 몸을 따뜻하게 덮을 옷을 생각할 수 있었고, 옷을 생각하며 풀줄기에서 옷감이 될 실을 얻는 길을 찾으며, 실 얻는 길을 찾으면서 천을 짜는 길을 생각하여 깨닫다가는, 천을 다시 옷으로 깁는 길을 찾았구나 싶어요. 가느다란 바늘도 생각해서 빚었을 테고, 조금 굵다란 바늘, 이른바 뜨개바늘 같은 바늘들, 대바늘이든 쇠바늘이든 빚는 길을 헤아렸겠구나 싶어요.


  생각이 삶으로 이어집니다. 삶이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은 꿈으로 이어지고, 꿈은 이윽고 지구별 곳곳에 푸른 잎과 맑은 꽃과 소담스러운 열매로 영급니다.


.. 아파트 옆 논에 모내기가 한창이다 ..  (아파트 모내기)


  손택수 님 시집 《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2010)을 읽습니다. ‘수사학’이 무얼까 생각하면서 시집을 들추다가는 이내 ‘수사학’이든 다른 무슨무슨 학이든 무엇이 대수이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시집 이름이 무엇이든, 또 시에 붙인 이름이 무엇이든, 나한테는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나는 시를 읽을 뿐이고, 나는 시를 즐길 뿐이에요. 나는 시를 좋아할 뿐이요, 나는 시와 함께 살아갈 뿐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동안 좋은 마음으로 시를 누립니다. 시를 읽거나 시를 쓰거나 나로서는 언제나 좋은 마음이 감돕니다. 슬픈 마음으로 살아가는 동안 슬픈 마음으로 시를 누립니다. 시를 읽든 시를 쓰든 나는 늘 슬픈 마음이 맴돕니다.


  홀가분한 마음일 때에는 홀가분하게 누리는 시입니다. 고단할 때에는 고단하게 누리는 시입니다. 바쁠 때에는 바쁘게 누리는 시요, 한갓질 때에는 한갓지게 누리는 시예요.


  손택수 님은 어떤 마음으로 시를 썼을까요. 손택수 님 시집을 읽을 사람들은 어떤 마음일까요. 아름다움을 찾는 즐거운 넋으로 시를 썼을까요. 아름다움을 찾는 즐거운 넋으로 시집 《나무의 수사학》을 읽을 만할까요. 시를 쓰는 사람은 어디에서 어떤 넋으로 삶을 짓는 사람일까요. 시를 읽는 사람은 어디에서 무슨 꿈을 키우며 삶을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달은 제법 크기에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올려다봅니다만, 별은, 작디작은 별은 시골이라 하더라도 모든 시골에서 언제나 올려다보지 못합니다. 공장과 골프장이 수두룩한 시골에서는 작은 별을 볼 수 없고, 자동차와 높직한 건물이 들어찬 도시에서는 큰 별조차 느끼기 힘듭니다. 달 또한 숱한 등불에 바래고 높은 건물에 가립니다. 달과 별, 해와 구름, 비와 눈, 바람과 흙을 누리지 못하는 터에서 어떤 목숨을 보듬으며 시를 쓰거나 읽을 수 있을까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4345.6.17.해.ㅎㄲㅅㄱ)

 


― 나무의 수사학 (손택수 글,실천문학사 펴냄,2010.6.30./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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