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오줌 못 가리는 아이들
“똥오줌도 못 가리네.”라 읊는 말을 어릴 적부터 들었다. 철이 없이 날뛰는 풋내기를 가리킬 때에 으레 읊는 말이라고 들었다. 어릴 적 동무들 사이에서 서로서로 놀리며 이 말마디를 읊기도 했다. 가만히 돌이키면, 어릴 적 나나 동무들 모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에다가 “아직 똥오줌 못 가릴 녀석”일 텐데, 우리들은 서로서로 이 말마디를 읊으며 스스로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깨닫지 못했다.
아이 둘을 보살피는 하루하루 누리면서 생각한다. 첫째 아이가 밤오줌을 다 가려, 이제 기저귀 빨래에서 홀가분해지는구나 하고 느낄 무렵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어느덧 다섯 해째 날이면 날마다 기저귀 빨래에 아이들 옷가지 빨래에 쉴 겨를이 없다. 어디 마실을 다니더라도 아이들 옷가지로 가방 하나 두툼히 챙긴다. 마실을 마치고 돌아오면 이동안 쌓인 빨랫감을 빨래하느라 부산을 떤다. 첫째 아이는 낮오줌도 밤오줌도 잘 가리지만, 어느 하루 아주 신나게 뛰논 날은 자다가 그만 바지에 살짝 쉬를 하기도 한다. 둘째 아이는 이제 돌을 갓 지났으니 똥이고 오줌이고 가리지 못한다. 아무 데나 아무 때나 스스로 누고플 때에 눈다. 책상맡에서도 밥상자리에서도 똥이고 오줌이고 눈다. 돌을 지난 아이 똥오줌 가리기를 하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저귀를 푼 채 돌아다니도록 하니까, 온 집안은 그예 똥내와 오줌내 가득하다. 첫째 아이 적하고 똑같은 일을 되풀이한다.
날마다 서너 차례씩 둘째 아이 똥바지 빨래를 하고, 날마다 스물∼서른 차례 오줌바지 빨래를 한다. 그야말로 “똥오줌 못 가리는 아이”하고 살아간다. 똥오줌 못 가리는 아이더러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주라 하는 심부름을 시키지 못한다. 똥오줌 못 가리는 아이더러 똥 마려우면 얘기해, 하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곰곰이 살피면, 아이가 똥이 언제 마려운가 느낄 수 있다. 아이가 오줌을 누고 싶어 할 때를 깨달을 수 있다. 스물네 시간 아이하고 붙어 지내는 어버이라면 누구나 알아챌 수 있다.
이리하여, 옛날 옛적부터 ‘아버지 구실 하는 사내’는 으레 잊거나 모르지만, ‘어머니 노릇 하는 가시내’는 으레 온몸과 온마음으로 헤아리면서 “똥오줌 못 가리는 아이들하고 얘기꽃을 피우”곤 한다. 똥오줌 못 가리는 아이들을 타이르는 길, 똥오줌 못 가리는 아이들을 달래는 길, 똥오줌 못 가리는 아이들을 따숩게 사랑하며 아끼는 길 들을 여느 가시내는 어머니 자리에 들어서면서 슬기롭게 맡는다. 아버지 자리에 들어서는 여느 사내는 으레 아이들하고 하루 내내 지내지 않으며 바깥으로 떠돌기만 하니까, 막상 “똥오줌 못 가리는 아이들과 어떻게 얘기를 나누어야 하는가”를 안 깨달을 뿐더러 알려고도 하지 못하기 일쑤이다.
사람은 갓난쟁이일 적에 똥오줌을 못 가린다. 그러나, 어느 모로 본다면, 사람은 나이를 제법 먹어 어른이 되었다 하더라도 똥오줌을 못 가리기도 한다. 왜 그럴까. 왜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도 스스로 철이 들려 하지 않을까.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철없이 살아가는가.
아, 그렇구나. ‘철’이란 여러 뜻이지. 사람이 철이 들자면, 날씨인 철부터 느끼며 살아야 한다. 봄에는 봄철을 느끼고 여름에는 여름철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온마음으로 아로새길 때에 철을 찬찬히 익힌다. 가을철을 모르거나 겨울철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은 ‘사람값’을 한다는 철 또한 익히지 못한다. 꽃철 모내기철 가을걷이철 나물철 김장철 들을 두루 살피며 사랑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사람철을 헤아리면서 사랑철과 믿음철을 하나하나 짚을 만하구나 싶다. 전남 고흥 시골마을은 요 한두 달 사이 제비철로 흐드러진다. (4345.6.10.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