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의 소원 비룡소의 그림동화 116
소피 블랙올 그림, 시린 임 브리지스 글, 이미영 옮김 / 비룡소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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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을 키우는 생각과 말과 몸짓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68] 소피 블랙올·시린 임 브리지스, 《루비의 소원》(비룡소,2004)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일은 때때로 ‘가르치기’가 될 수 있지만, 거의 모든 때에는 가르치기하고 동떨어지리라 느낍니다. 학교에 보내는 일이란 말 그대로 ‘학교 보내기’이지 ‘가르치기’는 아니니까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어버이들은 으레 ‘동무라도 잘 사귀’면 좋겠다고 여깁니다. ‘성적이 잘 나와 손꼽히는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다시금 손꼽히는 큰 회사에 돈 많이 받으며 다닐 수 있기’를 바라곤 합니다.


  예나 이제나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일이 좋다 나쁘다 그르다 옳다 하고 가르자는 소리가 아니라, 학교란 무슨 뜻이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하고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는 어버이들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익히’고 ‘어떤 삶을 배울’ 수 있기를 바라는가 헤아려 봅니다. 동무들과 착하게 서로 어깨동무하는 삶을 학교에서 배울 수 있기를 바랄까요. 이웃들을 따사로이 바라보며 내 삶을 아끼고 이웃 삶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가짐을 학교에서 익힐 수 있기를 바랄까요. 몸과 마음을 한결같이 곱고 튼튼히 돌보는 매무새를 학교에서 물려받을 수 있기를 바랄까요. 스스로 흙을 일구어 깨끗한 먹을거리를 얻고, 스스로 바느질을 해서 정갈한 옷가지를 얻으며, 스스로 나무를 다듬어 살림집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이어받을 수 있기를 바랄까요.


.. 중국에서 빨간색은 축하의 색이에요. 아이들은 설날에 행운의 돈이 들어 있는 빨간색 봉투를 받고, 신부들은 결혼식 날 빨간색 옷을 입어요. 그런데 루비는 날마다 빨간색 옷을 입겠다고 우겼어요. 엄마가 사촌들처럼 수수한 색 옷을 입혔을 때도, 루비는 새까만 머리에 빨간색 리본을 매곤 했지요 ..  (7쪽)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고 하는 여느 어른들은 어떤 꿈을 품을까 헤아려 봅니다. 교사가 되기까지 여느 어른들은 대학교를 비롯해 초·중·고등학교에서 무엇을 배울까요. 교사가 되려는 사람한테 대학교와 나라와 정부는 무엇을 가르칠까요. 교사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칠 때에 ‘교사답다’고 할 수 있을까요. 교과서 지식을 잘 집어넣을 때에 교사다운가요. 아이들이 삶을 삶다이 꾸리는 길을 스스로 찾도록 돕거나 이끌 때에 교사다운가요. 교과서란 어떤 지식을 담고, 교과서를 빚은 어른들은 어떤 넋이었을까요. 교과서 지식으로 치르는 시험은 아이들 삶을 어떻게 흔들까요.


  이모저모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오늘날 한국땅 학교란 무슨 뜻이거나 무슨 보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학교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며 아이들이 어떤 꿈·사랑·이야기를 배우면서 스스로 좋은 넋과 착한 얼과 참다운 슬기를 빛낼 수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 남자 애들만큼 공부를 잘 하려면 루비는 훨씬 더 열심히 해야 했어요. 남자 아이들은 공부가 끝나면 자유롭게 놀 수가 있었지만, 여자 아이들은 요리와 집안일을 배워야 했거든요. 사실 엄마들은 여자 아이는 이런 것만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여자 아이들은 하나둘 공부를 그만두었어요. 루비만 빼고 모두 그랬지요 ..  (12쪽)

 


  우리 집 두 아이를 학교나 시설에 맡기지 않으면서 내가 더 뛰어나거나 슬기롭거나 빼어나거나 훌륭하게 무언가를 가르치는지는 잘 모릅니다. 아니, 나는 아직 우리 집 두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두 아이가 얼마나 더 홀가분하게 놀며 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두 아이가 얼마나 더 풀과 흙과 들과 멧자락을 껴안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어버이 된 내가 얼마나 더 사람답게 살아가는 꿈을 키우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찬찬히 사랑하며 누릴 한삶으로 엮자고 생각합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바쁘면서, 하루하루 즐기자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생각은 아니고, 아이들이 천천히 씩씩하게 자라면서 저희 삶터를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은 생각입니다.


  다만, 어버이로서 내 몸가짐이 이리 흔들리거나 저리 고꾸라지곤 합니다. 이런저런 일로 아이들한테 골을 부리고, 요런조런 일로 나 스스로 더 기쁘게 내 일감을 갈무리하지 못하곤 합니다.


  아이들을 재우면서, 아이들한테 밥을 먹이면서, 아이들 손을 잡거나 아이들을 자전거수레에 태우거나 품에 안으면서 가만히 생각합니다. 나부터 싱긋 웃으면 아이들도 웃고, 나부터 얼굴 찌푸리면 아이들도 얼굴 찌푸립니다. 나부터 노래하면 아이들이 노래합니다. 나부터 풀내음 맡으면 아이들도 풀내음 맡습니다.


  제비집을 올려다보며 날마다 인사합니다. 빨래를 널고 개면서 옷가지 결을 쓰다듬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과 별한테 손을 흔듭니다. 바람이 건드리는 나뭇잎을 살살 어루만집니다.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나 또한 내 삶입니다. 나 스스로 내 나이 마흔이거나 예순이거나 여든이거나 새롭게 느끼며 새롭게 배우고 새롭게 깨달으면서 새롭게 즐기는 하루입니다.

 


.. 어느 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시를 써 보라고 했어요. 루비는 이렇게 썼지요. “아, 슬프다! 여자로 태어난 이 몸, 그보다 더한 불행은 남자만을 위하는 집에서 태어난 것이다.” ..  (15쪽)


  소피 블랙올 님 그림과 시린 임 브리지스 님 글이 어우러진 그림책 《루비의 소원》(비룡소,2004)을 읽습니다. 빨간 옷을 좋아하는 그림책 ‘루비’는 날마다 새롭게 배우는 일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한집안 다른 사내들처럼 배우기에만 온마음을 쏟을 수 없습니다. 루비는 가시내이기 때문에 사내들과 달리 집안일을 함께 배워야 합니다. 루비한테 주어진 집안일을 날마다 맡아야 합니다. 루비는 루비 마음대로 이것저것 신나게 배울 수 있지만, 이것저것 신나게 배우려면 날마다 주어진 집일을 치러야 합니다.


  곰곰이 돌이킵니다. 루비네 집안은 살림이 넉넉하니까 ‘집안 어린 사내’들이 가정교사한테서 느긋하게 배운 다음 홀가분하게 놀 수 있습니다. 루비네 집안 살림이 가난하다면, 가정교사는커녕 제도권학교조차 못 다닐 만합니다. 가난한 집 어린 사내들이라면 어버이하고 함께 들일을 하거나 바닷일을 하거나 장사일을 하거나 함께하겠지요. 이때에는 어린 사내들뿐 아니라 어린 가시내들도 제도권학교는커녕 글을 배우거나 책을 읽을 엄두를 못 내리라 느낍니다.

 


..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말했어요. “아가, 네가 왜 이런 시를 썼는지 정말로 알고 싶구나. 남자 아이들에게 어떻게 더 잘 해 준다는 거니?” … 루비가 자신의 빨간색 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했어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남자 애들은 대학에 가고 여자 애들은 결혼하게 된다는 거예요.” (17, 21쪽)


  돈이 넉넉한 집안이라서 더 넉넉히 배울 수 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돈이 넉넉한 집안에서는 집일이나 돈벌이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 하겠으나, 그만큼 어버이와 함께하는 겨를이 적구나 싶어요. 돈이 적은 집안에서는 집일이나 돈벌이를 오래오래 살펴야 한다 하겠으나, 그래도 어버이와 함께하는 겨를이 많을 수 있어요. 저잣거리 장사를 하더라도 어머니 아버지하고 나란히 앉아 이야기꽃 피울 수 있겠지요. 들판에서 논밭을 일구더라도 어머니 아버지하고 나란히 서서 일노래 부르며 땅을 갈 수 있어요.


  아이들은 어버이와 함께하면서 배운다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어버이 살결을 스치고 어버이 손을 맞잡으면서 배운다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어버이 목소리를 듣고 어버이 품에서 따스함을 느끼면서 배운다고 느낍니다.

 


.. 루비는 (설날) 행운의 빨간 봉투를 열 때 온 가족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여러분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알겠어요? 그건 돈이 아니었어요. 돈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었지요 ..  (24쪽)


  그림책 루비는 대학교에 들어갑니다. 그림책 루비는 다른 자매들이나 이웃 자매들과 달리 ‘시집살이’ 아닌 ‘대학살이’를 합니다. 더 넓다는 누리를 누리고, 더 깊다는 학문을 파고듭니다. 더 너른 나라를 돌아다니고, 더 깊은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꿈을 키우는 생각과 말과 몸짓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루비네 집안이 가난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텐데, 가난한 루비네 집안이라 한다면 루비는 또다른 모습으로 또다른 삶을 꾸리면서 또다른 배움길을 걸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루비가 배움길을 못 걷고 살림길을 걸었다 하더라도, 루비는 집안일을 하면서 얼마든지 또다른 배움자리를 찾아 또다른 배움빛을 누렸으리라 생각합니다.


  루비한테는 돈도 이름도 무엇도 대수롭지 않아요. 루비한테는 날마다 좋은 생각과 기쁜 꿈과 맑은 사랑이 대수롭습니다. 루비한테는 제도나 사회나 문화가 대단하지 않아요. 루비한테는 고운 이야기와 환한 웃음꽃과 싱그러운 눈빛이 대단하게 자리해요. 따스한 바람이 봄날 시골마을 들판을 골고루 보듬으며 산들산들 붑니다. (4345.5.13.해.ㅎㄲㅅㄱ)

 


― 루비의 소원 (소피 블랙올 그림,시린 임 브리지스 글,이미영 옮김,비룡소 펴냄,2004.3.15./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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