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한테 들려줄 말
[말사랑·글꽃·삶빛 7] 동화는 어떻게 쓰는가

 


  대학교에 문예창작학과가 있습니다. 대학교 바깥에 글쓰기 강좌라든지 문예창작 강의가 무척 많습니다.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키우는 분들이 대학교를 다니거나 여러 강좌나 강의를 찾아서 듣습니다. 글을 쓰고 싶다면 스스로 마음껏 쓰면 될 노릇이지만, 글을 쓸 때에 어떤 틀이나 솜씨가 있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대학교에 들어가려 한다든지 강좌나 강의를 들으려 한다고 느낍니다.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다니며 글쓰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강좌나 강의를 들으며 글쓰기를 북돋울 수 있습니다. 어디를 얼마 동안 다니든 누구나 새롭게 바라보는 눈길을 틔우고, 새삼스레 느끼는 마음을 다스릴 만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라 할 텐데, 어디를 얼마 동안 못 다니거나 안 다니더라도 스스로 새롭게 바라보는 눈길을 틔울 뿐 아니라, 새삼스레 느끼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글쓰기란 삶쓰기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일이란 삶을 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를 배운다 할 때에는 삶쓰기를 배우는 셈입니다. 곧, 남한테서 무언가 따로 배우거나 이야기를 들으며 스스로를 살피거나 다스릴 수 있다고 여기는 분이라면, 대학교를 들어가거나 강좌랑 강의를 찾아 들어야 합니다. 굳이 남한테서 무언가 따로 배우거나 이야기를 듣기보다, 스스로 제 삶을 찬찬히 곱씹거나 톺아보면서 제 삶을 깨닫거나 느끼려 하는 분이라면, 하루하루 깊이 헤아리면 넉넉합니다.


  글을 쓰는 일이란 삶을 쓰는 일이기에, 내 삶이 있어야 내 글을 씁니다. 그리고, 내 삶을 나 스스로 느낄 줄 알아야 내 글을 써서 내놓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삶을 꾸립니다. 누구나 날마다 새롭게 삶을 일굽니다. 내 하루를 곰곰이 되새긴다면, 내가 누리는 하루 이야기로 긴 소설 하나 쓸 수 있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이루어지는 일 하나로 얼마든지 긴 소설 하나 쓸 만합니다. 내 하루살이를 긴 소설로 쓸 수 있을 때에, 이 기나긴 소설 줄거리 가운데 하나를 간추려 짤막한 싯말 하나로 선보일 수 있습니다. 거꾸로, 내 하루살이를 짤막한 싯말 한 줄로 간추려 선보일 줄 아는 이라면, 이 이야기에 살을 붙여 기나긴 소설 하나로 다시 엮을 수 있어요.


  ‘문예창작’이라는 말마디를 생각합니다. ‘문예’란 ‘글 예술’을 일컫습니다. ‘창작’이란 ‘새로 짓기’를 가리킵니다. 곧, ‘글을 예술이 되도록 새로 짓기’가 문예창작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면, 예술이란 무엇이라 할까요. 우리 삶에서 어떤 모습이 예술이라 할 만할까요. 어느 이야기는 예술이 되고, 어느 이야기는 예술이 안 될까요.


  아이들을 토닥토닥 재우며 부르는 자장노래 어버이 목소리와 낯빛과 손길은 얼마나 예술답다 할 만할까 생각합니다. 식구들 밥상을 차리는 집일꾼 몸짓과 매무새와 넋은 얼마나 예술답다 할 만할까 생각합니다. 빨래를 손으로 하는 몸짓은, 빨래기계 단추를 눌러 옷을 건사하는 매무새는, 해바라기 하도록 빨래줄에 빨래를 너는 몸가짐은, 다 마른 빨래를 찬찬히 개어 옷시렁에 놓는 모습은 얼마나 예술답다 할 만할까 생각합니다. 아이 손을 잡고 들길을 거닐며 꽃송이 바라보며 꽃내음 맡는 일은 얼마나 예술답다 할 만할까 생각합니다. 걸레를 빨아 방바닥을 훔치는 일은 얼마나 예술답다 할 만할까 생각합니다. 마당 한켠 물꼭지를 틀어 물놀이 즐기는 아이를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예술답다 할 만할까 생각합니다.


  글을 쓰려 하는 분들은 어떤 삶을 어떤 꿈으로 어떤 사랑을 실어 어떤 줄거리로 엮고 싶을까 궁금합니다. 글을 쓰려 하는 분들 가운데 아이들과 함께 읽는 동화를 쓰려 하는 분들은 어떤 삶을 어떤 꿈으로 어떤 사랑을 실어 어떤 줄거리로 엮으며,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우는 이야기를 빚으려 할까 궁금합니다.


  어떤 글을 쓰든 글에는 글쓴이 삶을 싣습니다. 어떤 글을 쓰든 글마다 글쓴이 꿈을 담습니다. 어떤 글을 쓰든 글줄에 글쓴이 사랑을 아로새깁니다. 어떤 글을 쓰든 글쓴이가 누리는 즐거움과 웃음과 햇살과 바람을 살포시 깃들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읽는 동화를 쓰는 삶을 헤아립니다. 아이들과 함께 어떤 말로 삶을 북돋우면 즐거울까요. 아이들과 함께 읽는 동화를 쓰는 어른은 ‘동화를 쓰는 오늘에 이르도록’ 내 삶을 담는 내 말을 얼마나 곱고 착하고 참답고 맑고 올바르고 곧고 정갈하고 깔끔하고 산뜻하고 싱그럽고 빛나도록 다스렸을까요.


  아이들과 함께 읽는 동화에 “-ㄹ 것 같아요”나 “할아버지의 아치형 나무뿌리”나 “시작된 여정”이나 “뱀을 향해 말했어요”나 “왕과의 만남”이나 “해골만 남은 몰골에도 치장하고”나 “구하기 위해”나 “-려는 거예요”나 “친구가 필요하잖아”나 “도대체”나 “감히”나 “여왕의 방”이나 “몇 명의 왕”이나 “자기”나 “자신”이나 “미소 짓는다”나 “정답다”나 “날고 있다”나 “공손히” 같은 말마디를 적바림하는 일은 얼마나 ‘동화 글을 쓰는 일’이 될까 하고 돌아볼 노릇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읽을 동화를 어떤 낱말 어떤 말투 어떤 말씨로 엮는지 하나하나 짚을 노릇입니다.


  어른으로서 널리 쓰는 낱말이라 하더라도 아이들한테까지 함부로 쓸 수 없습니다. 수많은 어른들이 아이들 앞에서 ‘bye bye(바이 바이)’나 ‘安寧(안녕)’ 같은 말을 생각없이 쓴다 하더라도 ‘잘 가’나 ‘잘 있어’나 ‘다음에 봐’처럼 동화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느껴요.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아이들한테 이처럼 말할 수 있어야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어른들이 아이들 앞에서 ‘생일party(파티)’ 같은 말을 생각없이 읊더라도 ‘생일잔치’나 ‘귀 빠진 날 잔치’처럼 동화 글을 쓸 수 있어야 어여쁘다고 느껴요. 수많은 어른들이 ‘操心(조심)해’ 같은 말을 생각없이 말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동화 글을 쓰려는 이라면 ‘잘 살펴’나 ‘찬찬히 살펴봐’나 ‘마음을 써 봐’나 ‘마음을 기울여 봐’처럼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에 아리땁다고 생각해요.


  잘 살피고 옳게 생각할 수 있어야 즐겁게 동화 글을 씁니다. ‘微笑(미소)’나 ‘始作(시작)’ 같은 한자말은 일본 한자말입니다. ‘都大體(도대체)’나 ‘감(敢)히’나 ‘필요(必要)’ 같은 한자말을 어른들이 거리끼지 않고 쓰는데, 참말 아이들 앞에서 이런 말마디를 거침없이 쓰며 보여주어도 즐거이 누릴 삶이 될까 궁금합니다.


  동화 글을 쓰려는 어른이라면 말부터 깊이 살피고 옳게 짚으며 착하게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여느 어른들 사이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 말마디라 하지만, 또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에 널리 나타나는 말마디라 하지만, 이런저런 말마디를 동화 글에 버젓이 넣어도 될 만한가 하고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참말 어른들은 “微笑 속에 비친 그대”처럼 노래를 부릅니다. 어른들은 “只今부터 始作이야” 같은 말을 흔히 씁니다. 어른들은 “네가 必要해” 같은 말을 쉽게 씁니다. 여느 자리에 익숙하게 어른들끼리 이런 일본 한자말과 저런 중국 한자말을 쓸 뿐 아니라, 이런 영어와 저런 프랑스말과 그런 외국말을 너무 생각없이 씁니다. 어른들이 일한다는 막일판에는 일본말이 많이 쓰인다지요. 책을 만드는 사람들 또한 책마을에서 일본말을 아주 많이 쓴다지요. 이른바 전문직이라 하는 자리에서는 몽땅 일본말투성이라지요. 우리 아이들이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익히며 쓰도록 이끌자는 생각을 거의 안 한다 할 텐데, 말에 앞서 삶부터 아이들이 아이답게 삶을 꾸리도록 돕지 못하기 일쑤예요. 초등학교에 들기 앞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부터 영어를 가르칩니다. 학원을 끝없이 보냅니다. 입시지옥 굴레에 몰아세웁니다. 아이들 삶을 사랑하지 않으니 입시지옥을 만듭니다. 아이들 꿈을 아끼지 않으니 입시지옥에 허덕이다가 대학교에 들어가도록 내몰기만 해요. 아이들 스스로 하루하루 예쁘게 누리며 즐기도록 손을 내밀지 않아요. 아이들 스스로 온 하루를 어여쁜 꿈과 사랑으로 빚도록 어깨동무하지 않아요.


  오늘날 한국땅에서 동화를 쓰는 일이란 어떤 뜻이 될는지 아리송하곤 합니다. 말만 예쁘장하게 가다듬으면 동화가 될까요. 무언가 배울 만한 대목을 집어넣어 “고개숙여 배우는 작품”이나 “지식을 쌓는 작품”이나 “재미있는 작품”이나 “가슴 뭉클한 작품”을 쓰는 일은 어떠한 보람이나 뜻이 있을까요.


  동화 글에 “印象的(인상적)인 表情(표정)”이나 “或是(혹시)”나 “구멍을 通(통)해”나 “巨大(거대)한”이나 “氣色(기색)” 같은 낱말을 넣는 일은 알맞을까 헤아려 봅니다. 그런데, 이런 낱말을 슬기롭게 가다듬어 알맞고 바르게 동화 글을 추스른다 할지라도, 사랑스레 나눌 이야기를 꿈꾸도록 돕는 줄거리로 빚지 못한다면, 어떤 값이나 구실을 할까 잘 모르겠어요. 동화 글이란, 글줄부터 하나하나 잘 삭히고 엮으며 빚어야 합니다. 동화 글이란, 줄거리와 이야기 모두 환히 빛나도록 잘 건사하고 갈고닦으며 세워야 합니다. 두 갈래를 오롯이 추스르면서 동화를 쓰는 어른 삶부터 해맑게 사랑하고 꿈으로 빛내야 합니다. 봄날 제비 노랫소리를 맑게 들으며 좋은 넋 누리고, 가을날 파란하늘 바람소리를 곱게 들으며 좋은 얼 품을 때에 동화 글이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4345.5.1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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