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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봄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64
고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7년 9월
평점 :
동백마을에 찾아든 봄
[시를 노래하는 시 16] 고정희, 《지리산의 봄》
- 책이름 : 지리산의 봄
- 글 : 고정희
-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1987.10.5.)
- 책값 : 7000원
새벽 네 시 사십 분, 둘째 아이가 칭얼칭얼 소리를 내더니 뽀직뽀직 소리를 냅니다. 아하, 똥을 누네. 둘째가 밤똥을 누네.
첫째 아이는 밤똥을 참 자주 누었습니다. 첫째 아이는 도시인 인천에서 태어났고, 도시 물과 바람과 햇살을 먹고 자랐습니다. 둘째 아이는 시골에서 태어났고, 시골 물과 바람과 햇살을 먹으며 자랍니다.
곰곰이 돌이킵니다. 첫째 아이가 자라는 동안 애먼 것을 따로 먹으려 하지 않았으나, 삶터에서 늘 받아들여야 하는 물이나 바람이나 햇살은 자연스럽지 않았습니다. 아이뿐 아니라 어른이 늘 듣는 소리도 자동차 소리가 훨씬 클 뿐더러, 사람들마다 손전화를 갖고 다니니, 온갖 곳에서 시끄럽습니다. 전철이나 버스를 탈라치면 온몸에서 기운이 쪽 빠질 만큼 힘들었습니다. 이러한 기운이 아이한테 스며들어, 아이 몸이 헝클어지는 나머지, 자꾸자꾸 밤똥을 누며 속앓이를 했겠구나 싶습니다.
..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 (땅의 사람들 6―봄비)
방에 불을 켭니다. 둘째 아이를 살포시 안습니다. 속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바지와 기저귀를 벗깁니다. 마침 저녁에 저녁똥을 눈 아이를 씻기느라 보일러를 돌렸기에 새벽에도 따신 물을 조금 쓸 수 있습니다. 잘 되었네.
밑을 말끔히 씻깁니다. 아이를 내 어깨에 기대도록 하고는 똥기저귀와 똥바지를 살짝 빨아 뜨신 물에 담급니다. 아이를 안고 나와 물기를 닦습니다. 새 바지를 입힙니다. 내 무릎에 누입니다. 새벽 다섯 시를 지납니다.
아이는 무릎에서 새근새근 잠듭니다. 어제 하루 일을 돌이킵니다. 어제는 면내 우체국에 다녀온다며, 네 식구가 천천히 걸어서 마실했습니다. 구비구비 봄논 마늘밭 사이를 돌아서 걷는다며 오십 분 넘게 걸었고, 면내 풀숲에서 삼십 분 즈음 쉰 다음, 다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첫째 아이는 가는 길에 신나게 뛰고 달리며 놀다가는, 집으로 오는 길에 수레에서 잠들었습니다. 둘째 아이는 가는 길에 수레에서 달게 잠들다가는, 집으로 오는 길에 방실방실 웃으며 놀았습니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오늘 좀 힘들게 마실한 탓에 둘째가 밤똥을 누었구나 싶습니다. 둘째는 내내 안긴 채 다녔다지만, 아직 많이 어려서 힘들겠지요.
.. 아무도 네 시체 위에 궁전을 지을 수는 없으며 / 아무도 네 봉분 깔고 앉아 / 면죄부를 나눠 가질 수는 없으리 / 즈믄 가람 스치는 소소한 바람에도 / 가던 길 옷깃을 여며야 하리 .. (땅의 사람들 12―그대 봉분 위에 민주깃발 꽂으니)
아침에 옆지기가 논둑 풀을 뜯었습니다. 아침에 뜯은 논둑 풀로 우리 네 식구 두 끼니를 꾸렸습니다. 싱그러운 봄풀을 먹을 수 있는 하루가 고맙습니다. 이때에 첫째 아이는 온 논둑을 뛰고 달리며 뒹굽니다. 둘째 아이는 척척 기며 따라나오더니 논으로 씩씩하게 들어갑니다. 논 한켠에 고인 물을 철푸덕철푸덕 칩니다. 진흙을 밟습니다. 진흙을 손으로 움켜쥐다가는 툭툭 던집니다.
옆지기가 풀을 다 뜯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둘째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논에서 나와 다시 기어 마당으로 갑니다. 너 참 용한 아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며 둘째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옷이야 갈아입히고 빨면 되지, 너야 네 마음껏 놀면 되지.
씩씩하게 노는 아이를 안아 번쩍 들어올립니다. 마당가에서 자라는 후박나무가 비로소 꽃을 틔우려 하기에 후박꽃 빛깔을 보고 후박꽃 냄새를 맡도록 합니다. 겨우내 몽우리를 꽁꽁 닫더니, 봄이 되어 동백꽃이 터질 때에도 그저 꽁꽁 제 속살을 감추더니, 사월이 저물 무렵 바야흐로 활짝 흐드러집니다.
모두 때를 맞추어 꽃을 피울 테지요. 모두 철을 살피며 열매를 맺을 테지요. 모두 해를 먹고 나이테가 굵어지겠지요.
.. 돌들도 일어나 옥문을 열어제치고 / 나무들도 일어나 한쪽으로 한쪽으로 길을 내는 대낮 / 엄숙하여라, 사람의 소리 / 어여뻐라, 사람의 발바닥 .. (땅의 사람들 13―강물이여, 사람의 강이여)
품에 안긴 아이는 깊이 잠듭니다. 이제 무릎에서 내려놓아도 될까 궁금합니다. 이제 혼자 바닥 담요에 누워도 잘 자려나 궁금합니다. 아버지 무릎도 좋을 테지만, 두 다리를 곧게 쪽 펴고는 마음껏 활개를 쳐도 되는 방바닥도 좋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새벽 다섯 시 십오 분, 우리 집 처마에 둥지를 튼 제비들 지저귀는 소리를 듣습니다. 봄을 맞아 찾아온 제비들이 아니더라도 이무렵이면 다른 들새와 멧새가 마을을 이리저리 드나들며 지저귑니다. 봄에 앞서 겨울에도 새벽 다섯 시가 지날 무렵이면 새들은 지저귀었습니다. 가을에도 이와 같았습니다. 여름에도 이와 같았어요.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 아니라면, 어느 새라 하더라도 동틀 무렵이면 깨어 돌아다닙니다. 동이 트지 않더라도 거의 같은 때에 거의 같이 깨어나 부산히 돌아다니는구나 싶어요.
나는 시계를 보며 잠을 깨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이 내 잠을 깨웁니다. 내가 일어나고 싶을 때에 내 몸이 저절로 일어나 줍니다. 그래서 나는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들새나 멧새보다 먼저 일어납니다. 도시에서는 깊은 새벽에 자동차 시끄럽게 오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시골에서는 깊은 새벽에 고즈넉하며 정갈한 개구리 소리를 듣습니다. 요즈막에는 개구리 소리에 섞이는 풀벌레 소리도 곧잘 듣습니다. 여기에 바람 소리, 바람이 나뭇잎과 풀잎 흔드는 소리, 바람을 가르는 새들 소리를 나란히 듣습니다.
.. 숲에 별 뜨고 // 바람 부는 밤 // 모든 언어에 빗장을 지른 뒤 // 찔레꽃 향기가 심장을 가릅니다 .. (천둥벌거숭이 노래 1)
서른여덟 해를 살며 유채잎이나 유채줄기 먹는 줄 생각한 적 없습니다. 서른여덟 해째 살아가며 비로소 유채잎을 먹으며 냄새와 빛을 느낍니다. 유채줄기를 잘근잘근 씹으며 맛과 결을 헤아립니다.
유채꽃 노랗게 물든 논둑이나 밭둑에서 유채를 먹습니다. 자운영꽃 발그스름 물든 논둑이나 밭둑에서 자운영을 먹습니다. 꽃송이도 먹고 몽우리도 먹습니다. 잎도 먹고 줄기도 먹습니다.
풀을 뜯기 앞서, 또 뜯고 나서, 또 입에 넣으며, 가만히 생각합니다. 내 몸에 들어와 주어 고맙구나. 네 목숨이 내 목숨이 되었구나. 반갑다. 좋다. 즐겁다.
풀을 뜯어 먹을 때에는 풀을 코앞에서 바라봅니다. 풀하고 얼굴을 맞댑니다. 풀하고 말을 섞습니다.
풀은 나한테 먹히고 싶지 않을는지 모릅니다. 풀은 언제까지나 푸르게 땅에 뿌리박고플는지 모릅니다. 나는 풀을 먹지 않아도 목숨을 이을는지 모릅니다. 나는 이슬이나 바람만 마시더라도 목숨을 이을는지 모릅니다.
.. 귀뚜라미 우는 쪽에 // 사랑을 묻었지요 .. (천둥벌거숭이 노래 6)
어쩌면 그래요.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참말 그래요. 내가 뜯어서 먹는 풀은 오직 이슬, 빗물, 흙기운, 햇살, 바람, 이렇게만 먹습니다. 풀은 겨울이 되어 시들어 죽으며 씨앗을 남길 테지만, 시들어 말라죽는 풀은 그동안 뿌리내린 흙으로 돌아가 흙하고 한몸이 됩니다. 흙하고 한몸이 된 풀은 제가 남긴 씨앗이 이듬해에 새롭게 돋아 싱그럽고 푸른 빛을 뽐내며 햇살을 듬뿍 받을 수 있게끔 흙을 북돋웁니다. 해마다 새로운 풀이 새롭게 흙이랑 한덩어리가 됩니다.
아무래도 우리들 사람 또한 흙이랑 한덩어리 아닌가 싶습니다. 흙이랑 한덩어리인 풀하고도 한덩어리 아닌가 싶습니다. 흙과 풀을 살찌우는 햇살이랑 한덩어리이기도 할 테며, 지구별을 감도는 바람하고도 한덩어리이기도 할 테지요.
사람은 물하고도 한덩어리입니다. 사람은 밤하늘 가득 채우는 별빛하고도 한덩어리입니다. 달하고도, 우주하고도, 모든 넋하고도 한덩어리입니다.
하늘을 날거나 물을 밟으며 걷는다는 말이란, 사람 스스로 어떠한 목숨하고 한덩어리인가를 깨달으며 스스로 홀가분한 몸뚱이가 되었다는 뜻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곧, 사람 스스로 나무와 한덩어리라고 느낄 때에는, 나무가 푸른 숨을 내뿜듯, 사람 또한 푸른 꿈과 푸른 사랑과 푸른 글과 푸른 노래와 푸른 춤사위를 내놓습니다. 이를테면, 사람 스스로 물과 한덩어리라고 느낄 때에는 아주 홀가분하며 아름다이 헤엄을 칩니다. 사람 스스로 햇님과 한덩어리라고 느낄 때에는 아주 따사로우며 맑은 눈빛으로 활짝 웃습니다.
.. 여자 속에 든 어머니가 매를 맞는다 / 여자 속에 든 아버지가 매를 맞는다 / 여자 속에 든 형제자매지간이 매를 맞고 쓰러진다 / 여자 속에 든 할머니가 매맞고 쓰러지고 피를 흘린다 / 여자 속에 든 하느님이 매맞고 쓰러지고 피를 흘리며 비수를 꽂는다 / 여자 속에 든 한 나라의 뿌리가 / 매맞고 피 흘리고 비수를 꽂으며 윽 하고 죽는다 // 깊은 밤 사내는 폭력의 이불 밑에 잠들고 / 세상도 따라 들어가 잠들고 .. (매맞는 하느님―여성사 연구 4)
고속도로 없는 시골마을에 봄이 찾아듭니다. 고속도로 없기에 자동차 싱싱 달릴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섣부른 길손이나 나그네나 구경군이 드나들지 않는 호젓한 시골마을에 예쁘며 구성진 봄이 찾아듭니다. 봄은 구름이랑 바람이랑 햇살이랑 무지개랑 소나기랑 이끌고 찾아듭니다. 봄은 냄새로도 찾아들고, 빛으로도 찾아들며, 무늬와 이야기로도 찾아듭니다.
들판과 멧등성이를 포근하게 덮습니다. 냇물과 바닷물을 넘실넘실 감쌉니다. 하늘은 맑습니다. 땅은 푸릅니다. 나무는 새 기운을 뿜습니다. 풀은 새 잎과 꽃을 틔웁니다.
여기에, 사람은 땀을 흘립니다. 사람은 기지개를 켭니다. 사람은 이야 좋구나 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사람은 마음껏 들판을 노닐고 멧자락을 달립니다. 하늘을 껴안고 땅을 쓰다듬으며 바다를 얼싸안습니다.
..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씨, / 그래 저 십 분은 / 간밤 아기에게 젖 물린 시간이고 / 또 저 십 분은 /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 든 시간이고 / 그래그래 저 십 분은 /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 (우리 동네 구자명씨―여성사 연구 5)
기찻길도 공항도 없는 시골마을 봄은 한갓집니다. 더 빨리 달려야 하는 기차가 꼭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차만으로도 참 빠를 텐데, 알맞게 달릴 수 있고, 역마다 어여삐 꾸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왜 기차역은 더 커지면서 쇼핑센터 같은 건물이 들어서야 하나 궁금합니다. 마을과 마을을 알뜰히 이어 서로 어깨동무하며 사귈 수 있을 때에 기쁠 텐데, 왜 큰도시는 더 커다랗게 되려 하고, 시골 읍내는 도시가 되고파 하는지 궁금합니다.
왜 아파트를 지어야 할까요. 왜 마당 예쁘게 둔 작은 집을 짓지 않을까요. 왜 아파트를 비싸게 사고팔아야 할까요. 왜 텃밭과 앞논 멋스레 둔 시골집을 오래도록 대물림할 보금자리로 삼지 못할까요.
도시에서 아파트를 홀가분히 내려놓고 텃밭 시골집으로 살림을 옮길 줄 아는 사람이 하나둘 늘면 좋겠습니다. 도시에서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이는 길은 살며시 내려놓고 앞논 시골집으로 삶자락을 바꿀 줄 아는 사람이 열스물 늘면 좋겠습니다. 도시에서 더 피터지게 싸우기보다 시골에서 더 사랑스레 메와 내와 들을 보듬으며 돌볼 줄 아는 마음씨를 기를 사람이 백 이백 삼백 사백 생기면 좋겠습니다.
.. 당신 칠십 평생 동안에 열린 산과 들의 숨소리가 / 마지막 포옹에 화인처럼 박힙니다 / 얘야, 나는 이제 너의 담벼락이 아니다 / 나는 네가 머물 반석이 아니다 / 흘러라 / 내가 놓은 짐검다리 밟고 가거라 .. (수의를 입히며)
도시에서는 빈집이 드뭅니다. 시골에서는 빈집이 많습니다. 내 집 없다고 푸념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왜 집이 없겠어요. 집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파트가 없는 사람’들이겠지요. 왜 일거리가 없겠어요. 일자리이든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연봉 높은 쇠밥그릇 직장이 없는 사람’들이겠지요.
삶은 목숨입니다. 하루하루 꾸리는 삶은 하루하루 누리는 내 목숨입니다. 날마다 챙겨 먹는 밥은 내 넋입니다. 내가 먹는 밥대로 생각하고, 내가 먹는 밥대로 말하며, 내가 먹는 밥대로 일합니다.
꿈을 꾸는 어른은 꿈을 꾸는 아이를 낳습니다. 꿈을 빚는 어른은 꿈을 꾸는 동무를 사귑니다. 꿈을 꾸는 어른은 꿈을 꾸는 이웃하고 어깨동무합니다.
내 좋은 이웃은 옆집 할머니와 할아버지이기도 하고, 내 좋은 이웃은 후박나무와 모과나무와 매화나무와 감나무이기도 합니다. 내 좋은 이웃은 제비이기도 하고 개구리나 까마귀나 사마귀나 달팽이나 마늘이나 배추이기도 합니다.
따스히 사랑하고 싶은 사람한테 따스히 찾아드는 봄입니다.
.. 오 하느님, / 칼을 쳐서 밥을 만들고 / 창을 쳐서 떡을 만들던 손 / 그가 여기 잠들었나이다 / 우리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 우리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며 / 우리가 곤궁했을 때 기댈 등을 주던 몸 / 그가 여기 잠들었나이다 .. (하관)
시집 하나 읽습니다. 1991년에 마흔셋까지 나이테를 이루다 지리산 어느 결에서 고이 잠들었다던 고정희 님 시집 하나 읽습니다. 아침에 아이들 조잘조잘 복닥이고 저녁에 아이들 시끌시끌 부대끼는 시골집에서 둘째를 가슴에 눕히고 시집 하나 읽습니다. 첫째를 옆에 팔베개 하며 시집 하나 읽습니다.
.. 순전한 흙에서 태어나 // 흙과 더불어 흙을 일구고 / 온전한 흙으로 돌아간 생애 .. (비문)
시쓰는 고정희 님은 당신 나이 서른일곱에 비로소 당신 살림집을 마련했다 이야기합니다. 문득 돌아보니 고정희 님 시집을 읽는 나 또한 내 나이 서른일곱에 비로소 내 살림집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나한테 이 살림집은 살림집일까 아닐까 잘 모르겠습니다. 나로서는 살림집이라기보다 보금자리요, 고향이고 싶거든요. 나부터 스스로 몸이랑 마음을 살포시 눕히며 쉬기도 하고 일하기도 하고 놀기도 하며 즐기는 나날이 되고픈 보금자리요 고향이고 싶어요. 아이들 언제나 마음껏 박차고 뛰놀다가는 멀디먼 마실을 떠날 수 있고 다시금 돌아와 예쁘게 뿌리내릴 수 있는 좋은 품, 보금자리이면서 고향이고 싶거든요.
.. 왜 그닥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불현듯 상경하신 지난가을, 얘야, 이승길 마지막 나들이다 네가 사는 문지방 넘어보고 싶구나 왜 단호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바쁘다 매정하게 돌아서는 저에게 그냥 탈진한 사람처럼 손 흔들며 그래 내년 봄에 다시 오마 해놓고선 정작 꽃삼월엔 아주 가시다니요 이게 살아 있는 날들의 아둔함인가 싶어 하염없는 눈물만 못이 되어 박힙니다 .. (집)
봄날 봄빛 시를 읽습니다. 봄날 읽는 봄빛 시는 겨울을 살아낸 이야기 아닌가 생각합니다. 봄날 읽는 봄빛 시는 여름과 가을을 온몸으로 무르익히며 온마음 구수하게 삭힌 튼튼하고 알찬 빛덩어리 아닌가 헤아립니다.
봄을 누리는 가슴은 사랑을 꽃으로 틔웁니다. 봄을 즐기는 가슴은 꿈을 잎사귀에 푸르게 새깁니다. 봄을 지내는 가슴은 눈물과 웃음을 줄기마다 차곡차곡 담습니다.
새 아침 새 빛살 창호지문으로 곱다라니 스밉니다. (4345.4.28.흙.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