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맑은’ 사람 노래하는 고정희 시인
[말사랑·글꽃·삶빛 6] 생각으로 빛내는 말
고정희 시인이 남긴 시집 《지리산의 봄》(문학과지성사,1987)이 있습니다. 이 시집에 실린 〈이별―편지 3〉이라는 시를 읽으면, 첫머리에 “새벽 다섯시면 / 수유리 옹달샘 표주박 속에 / 드맑게 드맑게 넘치고 있는 사람 / 드맑게 넘치다가 / 아침 나그네 목 축여주고”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드맑게 드맑게 넘친다는 사람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깨닫습니다. ‘드-맑게’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드높은 사랑입니다. 드날리는 깃발입니다. 드센 기운입니다. 드솟는 꿈입니다. 드넓은 품입니다.
앞가지 ‘드-’를 붙이는 낱말을 하나하나 떠올립니다. 여러 가지 낱말이 떠오르고, 여러 곳에 곧잘 썼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드-’를 붙여 크거나 대단하다는 느낌을 나타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구나 싶습니다. 초등학교에서든, 중·고등학교에서든, 교사가 학생한테 ‘드-’라는 앞가지를 잘 살려 생각을 북돋우라고 이끄는 일이란 없구나 싶어요.
학교 문법 수업에서는 왜 이 대목을 가르치지 않았을까요. 학교에서 교사는 학생한테 왜 이러한 말짜임을 이야기하지 못할까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잘 살릴 뿐 아니라 한국글을 살찌우는 길을 가르치지 못하는 까닭을 생각해 봅니다.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살리지 못할 때에 어떤 외국말을 제대로 배울 만한가 궁금합니다. 한국사람이면서 한국글을 알맞고 기쁘게 쓸 줄 모른다면 어떠한 이야기꽃을 펼칠 만한가 궁금합니다.
드넓은 바다라 한다면, 드깊은 바다이기도 합니다. 드높은 하늘이라면 드파란 하늘이기도 합니다. 드맑은 꽃잎은 드보드라운 꽃잎입니다. 드좋은 일이나 드나쁜 일이 있을 테지요. 드기쁘거나 드즐거운 꿈을 꾀할 수 있겠지요. 드밝은 불빛처럼 드너른 사랑빛이 됩니다.
드하얀 빛깔이나 드까만 빛깔을 헤아립니다. 드푸르거나 드빨간 빛깔을 그립니다. 고운 빛깔을 어루만지듯, 고운 말결을 어루만집니다. 좋은 무늬를 쓰다듬듯, 좋은 말넋을 쓰다듬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던 어느 날 국어사전을 뒤적이다가 ‘도차지’라는 낱말을 보았습니다. ‘독차지’ 아닌 ‘도차지’라니, 처음에는 국어사전이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어요. 어느 국어사전에는 ‘都차지’라고 적지만, ‘獨차지’와는 다르며, 어쩌면 한국사람 스스로 잊거나 잃은 낱말이 되겠다고 느꼈어요. 왜냐하면, 혼자 맡는다는 뜻으로 ‘도맡다’가 있거든요. 국어학자는 ‘도-차지’에서 ‘도’를 ‘都’로 적어야 한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도-맡다’처럼 ‘도-’가 앞가지 되어 여러 곳에 쓰였다 할 수 있어요. ‘도-’를 앞에 붙여 새롭게 여러 낱말을 빚는 얼거리를 살필 만합니다. 도-보다, 도-살피다, 도-주다, 도-듣다, 도-쓰다, 도-걷다, …… 여러모로 말가지를 칩니다.
이런 낱말을 꼭 써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반드시 새 한국말을 빚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할 수 있을 때에 즐겁습니다. 한국말로 생각하고 한국말로 꿈꾸며 한국말로 사랑할 때에 아름답습니다. 어여삐 드빛나는 말을 빚을 수 있어요. 홀가분하게 드날리는 말꽃을 널리 흩뿌릴 수 있어요.
더 좋거나 더 낫다 싶은 말을 찾지 않아도 됩니다. 내 삶을 내 손으로 빛내는 말을 내 마음을 기울여 아끼면 됩니다.
시집을 즐겁게 읽습니다. 나도 시를 즐겁게 씁니다. 싯말을 즐겁게 되뇝니다. 싯말을 노래하듯 즐겁게 엮습니다. (4345.4.26.나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