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표 한자말 171 : 정밀(靜密)

 


조릿대 숲을 지나 동백나무와 섬개야광나무의 터널을 통과하는데 햇빛 미끄러지는 그 두꺼운 청록 이파리 아래는 없는 시심(詩心)이 일어날 만큼 정밀(靜密)하다
《박기성·심병우-울릉도》(대원사,1995) 56쪽

 

  “동백나무와 섬개야광나무의 터널(tunnel)을 통과(通過)하는데”는 “동백나무와 섬개야광나무 사이를 지나가는데”나 “동백나무와 섬개야광나무 사잇길을 지나가는데”로 다듬습니다. “청록(靑綠) 이파리”는 “푸른 이파리”나 “싯푸른 이파리”나 “짙푸른 이파리”로 손보고, “없는 시심(詩心)이 일어날”은 “없는 시마음이 일어날”이나 “없는 마음이 일어나 시를 쓸”이나 “절로 우러나 시를 쓸”로 손볼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한자말 ‘정밀(靜密)’은 “아주 정교하고 치밀하여 빈틈이 없고 자세함”을 뜻한다 합니다. 국어사전 뜻풀이가 흐리멍덩해 다시 ‘정교(精巧)’를 찾으니 “솜씨나 기술 따위가 정밀하고 교묘하다”를 뜻한다 하고, ‘치밀(緻密)’을 찾으니 “(1) 자세하고 꼼꼼하다 (2) 아주 곱고 촘촘하다”를 뜻한다 합니다. ‘정밀’을 풀이하며 ‘정교’라 말하고, ‘정교’를 풀이하며 ‘정밀’이라 말합니다. 이래서야 낱말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치밀’에 이르니 ‘꼼꼼함-촘촘함’이라 일컫습니다. 곧, ‘정밀-정교’는 나란히 ‘빈틈없음’을 가리키는 셈이요, ‘치밀’은 ‘꼼꼼함-촘촘함’을 나타내는 셈이로구나 싶어요. 한자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거나 써야 한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말뜻과 말쓰임을 옳게 살피자면, ‘정밀-정교-치밀’은 그닥 쓸 만하지 않으며, 이 세 가지 한자말은 ‘빈틈없다-꼼꼼하다-촘촘하다’를 밀어내며 쓰인다 하겠습니다.

 

 없는 시심(詩心)이 일어날 만큼 정밀(靜密)하다
→ 없는 시마음이 일어날 만큼 놀랍게 빽빽하다
→ 없는 마음이 일어나 시를 쓸 만큼 매우 촘촘하다
→ 절로 우러나 시를 쓸 만큼 대단하다
 …

 

  깊은 숲으로 들어가니 짙푸르거나 싯푸른 잎사귀가 흐드러지는 모습이 참 대단하다 합니다. 참 대단한 숲이니 ‘대단하다’ 말할 만합니다. 어느 모로 보면 참 놀라운 숲이니 ‘놀랍다’ 말할 수 있습니다. 푸른 잎사귀가 우거진 모습일 테니 ‘정밀하다’가 아닌 ‘우거지다’ 같은 낱말이 어울립니다. “나무가 빽빽하다”라든지 “푸른 빛(잎사귀)으로 촘촘하다”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이 보기글을 살피면서 헤아리기도 하지만, 한자말 ‘정밀’을 넣는대서 얼마나 빈틈이 없도록 잎이 들어찼는지 밝힐 만하지 않습니다. 묶음표를 치고 한자를 밝힌대서 얼마나 촘촘하거나 빽빽한가를 나타낼 만하지 않아요.


  꾸밈없이 글을 쓰면 됩니다. 수수하게 느낌을 적바림하면 넉넉합니다. 내 느낌을 나 스스로 가장 알맞거나 가장 사랑스럽다 여길 만한 쉽고 또렷한 낱말로 즐거이 풀어낼 때에 더없이 싱그럽게 빛납니다. (4345.4.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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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릿대 숲을 지나 동백나무와 섬개야광나무 사잇길을 지나가는데, 햇빛 미끄러지는 그 두꺼운 짙푸른 이파리 아래는 시가 절로 우러날 만큼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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