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 보는 마음

 


  다섯 해 앞서까지 내가 두 아이 어버이로 살아가는 나날을 따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았다기보다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해야 옳다고 느낍니다. 나는 모든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생각하니까요. 생각은 하지만 늘 마음을 기울이지는 못하고, 때로는 마음을 기울이다가 그만 다른 데에 바쁘게 몸을 쓰며 깜빡 잊기까지 합니다.

 

  처음 우리한테 찾아온 아이를 보살피는 나날을 보내며, 이 어린 아기를 어떻게 재우고 먹여야 하는가 하는 대목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살피지 못했다는 말은 옳지 않아요.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해야 옳아요.


  두 아이를 홀로 씻기고 달래고 재우고 하며 옆에 나란히 눕습니다. 나는 왜 이 아이들이 날마다 더 즐겁고 더 신나며 더 예쁘게 하루를 누리는 데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가 하고 생각하다가는 어느새 곯아떨어집니다.


  내 가슴에 포개어진 채 자던 둘째는 내 팔베개를 하다가 내 바로 옆에 누워 잡니다. 한두 시간 가슴에 얹고 자다 보면 숨이 막혀 살짝 옆으로 누여 팔베개를 시키고 얼마쯤 지나 팔이 저리면 슬슬 한팔을 뺍니다. 이렇게 조금 있자면 둘째가 잠꼬대나 잠투정을 하며 나를 깨웁니다. 둘째를 다시 팔베개 하거나 가슴에 얹으며 첫째 때를 돌이킵니다. 첫째가 갓난쟁이로 보내던 나날을 곱씹으면 둘째는 참 수월한 셈입니다. 그러나, 둘째가 무얼 바라고 첫째가 무얼 받아먹으며 자랐는가 하는 대목에 마음을 기울인다면, 내가 어느 만큼 어버이 몫과 구실과 자리를 사랑했느냐 싶어 부끄럽습니다.

 

  자장노래를 열 가락쯤 부르는 동안 첫째는 깊이 잠듭니다. 둘째는 더 기다려야 합니다. 둘째를 가까스로 깊이 재우고서는 가슴에 머리를 댑니다. 아이들을 깊이 재우자면 가슴맡을 지긋이 눌러 주어야 한다고 옆지기한테서 배웠습니다. 곰곰이 생각할 수 있다면, 나부터 누군가 곁에서 이렇게 재워 준다면 한결 잘 잘 테고, 나 또한 어린 나날 이렇게 잠들었을 테니, 내가 생각해 낼 수 있으면 나도 모르는 일이 아니에요. 다만, 나는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던 삶인 나머지, 미처 되새기거나 떠올리거나 알아채거나 느끼거나 몸을 먼저 쓰지 못합니다.


  아이 어머니는 어떻게 아이한테 젖을 물리고 사랑스레 쓰다듬으며 곱게 자장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꼭 어느 학교를 다니거나 누구한테서 배워야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줄 수 있나요. 따로 학교를 다니지 않거나 누구한테서 배우지 않았다면 아이한테 사랑을 먹일 수 없나요.


  콩닥콩닥콩닥 뛰는 둘째 숨결을 느낍니다. 자다 깨고 또 자다 깨고 하면 마당으로 나와 밤하늘을 나란히 느끼고는 다시 집으로 들어옵니다. 내가 어버이로서 마음을 기울이면 아이들은 하루하루 느긋합니다. 내가 집식구로서 마음을 기울이면 옆지기는 날마다 좋은 삶입니다. 내가 좋은 넋이라고 스스로 마음을 기울이면 내가 다스리는 내 일놀이는 늘 아름다운 꿈입니다. 두 아이를 보고 옆지기를 보며 나를 보는 눈길은 내가 피우고 싶은 꽃송이입니다. (4345.4.1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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