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쓴다
바람이 고요한 날 햇살이 따사로우면 한겨울에도 한겨울 아닌 봄과 같구나 하고 느낀다. 바람이 매서운 날 햇볕마저 구름에 가리고 빗방울까지 들으면 한봄에도 한봄 아닌 겨울과 같구나 하고 느낀다.
며칠 동안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세차게 부는 바람은 우리 마당가 후박나무 가지를 뒤흔들 뿐 아니라 동백나무 새 꽃봉우리까지 뒤흔든다. 이 바람에 꽤 많은 꽃봉우리가 떨어진다. 활짝 피어난 꽃봉우리가 떨어지고, 이제 막 터지려던 꽃봉우리가 떨어진다. 퍽 일찍 꽃봉우리 터뜨리고 나서 시든 녀석도 떨어진다.
우리 집 뒤꼍에서 자라는 매화나무는 다른 집보다 훨씬 늦게 꽃봉우리를 터뜨린다. 가지마다 촘촘하게 피어난 꽃송이를 올려다보면서, 우리 집에서 매실을 잔뜩 얻을 수 있겠네 하고 생각했는데, 이 된바람을 여러 날 겪고 보니, 매실로 달리려 하다가 그만 여물지 못한 채 바람에 떨어지는 알맹이도 꽤 되겠다고 느낀다. 매실을 얻는다면, 바람을 견딘 매실을 얻는 셈이요, 매실을 누린다면, 바람을 고스란히 맞아들인 매실을 누리는 셈이다.
논둑을 걷는 내 몸을 휘감아 나를 멀리 날려 보내려 하던 바람을 떠올린다. 작은 아이들은 논둑을 걷다가 이 바람을 맞았다면 그만 논바닥으로 폴싹 자빠졌을까. 늙은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 모진 바람에도 마늘밭 김매기를 하다가 그만 아이구야 하면서 옆으로 풀썩 넘어지기도 할까. 드센 바람이 온 마을을 휩쓰는 동안 들새와 멧새 지저귀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새들은 대단한 바람이 감돌 적에는 잔뜩 웅크리고 서로서로 기대면서 포근한 햇살과 살가운 바람이 되기를 기다릴까. 새들은 대단한 바람이 휘몰아칠 적에 이 바람을 따라 하늘 높이 휘휘 돌면서, 가벼운 몸뚱이를 바람한테 맡기며 너른 마음이 될까.
산들바람도 좋고, 칼바람도 좋다. 한들바람도 좋고, 마파람과 하늬바람도 좋다. 바람이 뚝 그친 아침녘 노랗게 빛나는 해를 바라본다. 이른아침부터 새들 노랫소리 가득하다. (4345.4.4.물.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