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생각
― 사진과 사회

 


  신문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담는 그릇 가운데 하나입니다. 맨 처음, 신문은 글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제 신문은 ‘사진 없는 신문’으로 나오리라고는 여길 수 없습니다. 이 나라 모든 신문은 어느덧 ‘사진 있는 신문’이 되었고, ‘사진을 보여주는 신문’으로 아주 바뀌기까지 합니다.


  사진 없이 글만 있는 신문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진 한 장 안 넣고 글만 넣은 신문을 사람들이 얼마나 즐거이 읽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바야흐로 사진이 없다면 신문이 아니라고 여길 만합니다. 학교나 학급에서 조그맣게 꾸리는 신문조차 사진을 넣습니다.


  사진이 쓸모 많기에 사진을 넣는다 할 만하겠지요. 그렇지만, 신문에 사진을 굳이 넣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애써 사진을 넣어야 비로소 ‘신문글’을 잘 읽도록 돕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문에서 사진을 써야 한다면 ‘신문글 읽기를 돕는 사진’이 아닌 ‘신문사진으로서 읽을 사진’이어야 걸맞으리라 느낍니다. 곧, 이제 신문은 ‘신문글’과 ‘신문사진’과 ‘신문그림’으로 엮어야 한다고 느껴요.


  신문에 싣는 글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입니다. 이와 함께, 신문에 싣는 사진은 ‘따로 이야기를 보여주는 사진’이 되어야 합니다.


  이야기를 보여주기에 따로 신문에 깃들 만합니다. 대통령 얼굴이라든지 정치꾼 얼굴을 보여주는 노릇이라면 신문사진 노릇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진은 없어도 되는 사진이며, 처음부터 안 찍어도 될 사진입니다. 운동경기 소식을 들려줄 때에도 그래요. 야구선수이든 체조선수이든 농구선수이든, 이런 사람들 얼굴이나 몸매를 보여줄 까닭이 따로 없어요. 오직 ‘이 사진 하나로 새롭게 보여주거나 나눌 이야기’가 있을 때에 사진을 실어야 걸맞아요.


  오직 사진 하나로 이야기를 밝혀야 합니다. 사진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사진으로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며 ‘어떠한 이야기가 담겼구나’ 하고 읽으며 알아챌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글에 덩그러니 곁달리는 사진으로는 이 나라를 밝히지 못합니다. 글에 슬그머니 덧붙는 사진으로는 온누리 삶자락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합니다. 글 한 줄이 사회를 바꾼다든지, 사진 한 장이 사회를 바꾸지는 않아요. 다만, 사회를 바꾸는 힘을 북돋우거나 부추기는 노릇을 할 수 있는데, 글 한 줄이나 사진 한 장이 사회를 바꾸는 힘을 북돋우거나 부추긴다 할 때에는 저마다 외따로 가장 깊고 가장 너르며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믿음직한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누구나 사진을 찍는다 하는 오늘날이요, 누구라도 글을 쓴다 하는 요즈음입니다. 학자나 지식인이나 권력 계급만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먼 옛날 봉건 계급 사회 때처럼, 돈이나 이름이나 권력을 거머쥔 사람 아니고서는 붓을 쥘 수조차 없는 나날이 아닙니다. 어린이도 글을 쓸 수 있어요. 어린이도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학교 문턱을 안 밟아 보았어도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큰도시 아닌 두메 시골마을 할아버지도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이름난 예술쟁이만 사진을 찍으란 법이 없고, 손꼽히는 사진쟁이만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름나거나 손꼽히거나 대단하다거나 놀랍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빚는 사진이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사진은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사회를 바꾸는 사진을 찍을 수 있지는 않다는 소리입니다. 나 스스로 내 삶터에서 내 이야기를 옳게 깨닫고 곧게 담으며 즐거이 나눌 수 있다면, 바로 이렇게 담아 나누려는 사진 하나가 사회를 바꾸도록 이끄는 힘을 보여줘요.


  멋스러이 보이도록 찍는대서 사진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습니다. 멋스러이 보인다면 그저 멋스러이 보일 뿐입니다. 놀랍게 보이도록 찍기에 사진이라는 이름이 알맞지 않습니다. 놀랍게 보이도록 하면 그냥 놀랍게 보일 뿐입니다.


  어떠한 글이든 스스로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합니다. 스스로 즐겁게 누리는 삶이요, 스스로 즐겁게 나누는 사랑이면서, 스스로 즐겁게 빛내는 이야기일 때에, 비로소 글 스스로 문학이라는 자리에 함께 놓여요.


  사진은 사회를 비추지 않습니다. 사진은 사회를 담지 않습니다. 사진은 사회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글이 사회를 비추지 않으며, 글이 사회를 담지 않고, 글은 사회를 보여주지 않듯, 사진이든 그림이든 노래이든 춤이든 영화이든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으로 일구는 이야기가 사회를 비춥니다. 글로 엮는 이야기가 사회를 담습니다. 그림으로 빚는 이야기가 사회를 보여줘요.


  사진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이러한 갈래마다 어떻게 갈무리해서 어떻게 일구는가에 따라, 이들 이야기로 사회를 비추거나 담거나 보여줘요. 잘 찍은 사진이기에 사회를 비추겠습니까. 잘 쓴 글이기에 사회를 담겠습니까. 잘 그린 그림이기에 사회를 보여주겠습니까. 이야기를 일구며 사회를 비춥니다. 이야기를 엮으며 사회를 담습니다. 이야기를 빚으며 사회를 보여줘요.


  이리하여, 이야기를 가리거나 숨기면서 사회를 가리거나 숨기려 들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누르거나 짓밟으면서 사회 한켠을 누르거나 짓밟아 그늘이나 어둠을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들 스스로 이야기를 누리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즐겁게 나눌 글도 그림도 사진도 태어나지 못합니다. 사람들 스스로 이야기를 꽃피우지 못하게끔 제도권으로 꽁꽁 싸매고 입시지옥으로 꽉 틀어쥔 사회에서는 글도 그림도 사진도 주눅들거나 그만 시들고 맙니다.
 (4345.3.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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