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희낙락


장마철의 습기며 삼복의 무더위가 작은 산중이라고 어디 피해 가겠는가. 문을 열면 퀴퀴한 냄새, 내 낡은 방 안의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자리잡은 거미, 좀벌레, 다리 많은 그리마, 희고 푸른 곰팡이들이 저마다의 한철을 희희낙락거리며 있을 테지만 너희를 어찌하기엔 난 이미 충분히 지쳐 있다
《박남준-꽃이 진다 꽃이 핀다》(호미,2002) 90쪽
미국의 할렘의 가난뱅이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약탈한다면 그건 괜찮을까요? 그때도 똑같이 희희낙락하며 반길까요
《아룬다티 로이-9월이여 오라》(녹색평론사,2004) 139쪽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짝을 잃고 비탄에 빠져 있는 곁을 제가 남편과 손을 잡고 희희낙락하면서 지나갔다고 호소할는지도 모르겠읍니다
《미우라 아야코/박기동 옮김-여인의 사연들》(부림출판사,1984) 157쪽

 

  “장마철의 습기(濕氣)며”는 “장마철 축축함이며”로 다듬고, “삼복(三伏)의 무더위가”는 “삼복 무더위가”나 “여름철 무더위가”로 다듬으며, ‘산중(山中)’은 ‘산속’이나 ‘멧골짝’으로 다듬습니다. ‘피(避)해’는 ‘비껴’나 ‘돌아’로 손보고, “방 안의 구석구석”은 “방 안 구석구석”으로 손보며, “저마다의 한철을”은 “저마다 한철을”이나 “저마다 맞이한 한철을”로 손봅니다. “이미 충분(充分)히”는 “이미”나 “이미 아주”나 “이미 옴팡”이나 “이미 몹시”로 손질해 줍니다. “지쳐 있다”는 “지쳤다”로 고쳐야 올발라요.


  “미국의 할렘의 가난뱅이가”는 “미국 할렘에 사는 가난뱅이가”나 “미국 할렘 가난뱅이가”로 다듬고,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나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으로 다듬어 줍니다. ‘약탈(掠奪)한다면’은 ‘유물을 턴다면’이나 ‘유물을 훔친다면’이나 ‘유물을 빼앗는다면’으로 손보고, ‘그건’은 ‘이는’이나 ‘이러한 일은’으로 손봅니다.


  ‘자기(自己)가’는 ‘당신이’로 다듬고, “비탄(悲歎)에 빠져 있는”은 “슬픔에 빠진”으로 다듬으며, ‘호소(呼訴)할는지도’는 ‘하소연할는지도’로 다듬어 줍니다.


  ‘희희낙락(喜喜樂樂)’은 “매우 기뻐하고 즐거워함”을 뜻한다고 해요.

 

 희희낙락거리며 있을 테지만
→ 기뻐할 테지만
→ 기뻐 웃을 테지만
→ 기뻐서 히히거릴 테지만
→ 좋아하며 즐길 테지만
→ 반기며 즐길 테지만
 똑같이 희희낙락하며
→ 똑같이 기뻐하며
→ 똑같이 즐거워하며
→ 똑같이 좋아서 웃으며
 희희낙락하면서
→ 웃고 떠들면서
→ 즐겁게 시시덕거리면서
→ 하하호호 웃으면서

 

  네 글자 한자말 ‘희희낙락’을 뜯어 살피면, ‘기쁘다’를 뜻하는 한자 ‘희(喜)’와 ‘즐겁다’를 뜻하는 한자 ‘락(樂)’을 둘씩 붙였습니다. 말뜻 그대로 돌아본다면, “기쁘고 기쁘며 즐겁고 즐겁다”입니다. “기쁘디기쁘며 즐겁디즐겁다”입니다.


  그러니까, 한문을 쓰며 살아가는 중국사람한테는 ‘喜喜樂樂’일 터이나, 한글을 쓰며 살아가는 한국사람한테는 “기쁘디기쁘며 즐겁디즐겁다”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꼭 중국사람이 아닐지라도 네 글자 한자말 ‘희희낙락’을 쓰고 싶다면 얼마든지 쓸 노릇입니다. 사람들이 ‘고맙다’라 안 하고 ‘땡큐’라 말하고, ‘잘 가’라 안 하며 ‘바이바이’라 흔히 말하듯, ‘희희낙락’ 또한 얼마든지 쓰고프면 쓸 일입니다.


  그런데, ‘고맙다’를 안 써 버릇하는 동안 참말 이 한국말은 하루하루 우리한테서 잊혀지거나 멀어집니다. ‘잘 가’를 말하지 않고 ‘바이바이(byebye)’나 ‘안녕(安寧)’만 말하면, 참으로 ‘잘 가’라는 한국말은 어느덧 우리 입에서 낯선 말투가 되고 맙니다. 갓난쟁이나 어린이 앞에서 “잘 가, 또 보자, 잘 지내. 살펴 가.” 하고 말하는 어르신이 얼마나 있는가요. 아이들은 서로서로 손을 흔들며 무슨 말을 하는지요.

 

 즐겁고 즐겁다 / 즐겁디즐겁다
 기쁘고 기쁘다 / 기쁘디기쁘다
 기쁘고 즐겁다 / 즐겁고 기쁘다
 즐겁게 웃다 / 기쁘게 웃다
 웃음꽃이 활짝 피다
 (기뻐서 /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다
 (기뻐 / 즐거워) 죽으려고 하다
 (기쁨이 / 즐거움이) (넘치다 / 가득하다)
 …

 

  우리 말글을 돌아보면 느낌을 담는 말마디가 무척 많다고 합니다. 아니, 우리 말글은 우리 느낌을 거의 끝없이 담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온누리 다른 어느 나라말이나 겨레말을 살펴보더라도 우리 말글처럼 우리가 나타내고픈 숱한 느낌을 알뜰살뜰 담을 만한 말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초등학교이든 중학교이든 고등학교이든, 또 대학교이든 어디에서든 우리 말글이 아름답게 빛나도록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이 나라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빛나는 우리 말글을 물려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대목을 잘 가르치면서, 어딘가 허전하다 싶은 대목 또한 꾸밈없이 가르치고 북돋우는 한편, 우리 뒷사람이 스스로 갈고닦거나 가다듬도록 도와야 한다고 느낍니다. 고인 말글이 아닌 움직이는 말글이라면, 먼 옛날 어른들이 닦은 틀로만 쓸 말글이 아니라 앞으로 새 삶을 일굴 어린이와 푸름이가 새롭게 갈고닦으며 빛낼 말글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웃음을 나타내는 느낌말이란 얼마나 많을까 궁금합니다. 기쁨을 나타내거나 슬픔을 나타내는 느낌말이란, 또 울음을 나타내는 느낌말이란 얼마나 많을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이런 갖가지 느낌말 가운데 우리가 쓰는 낱말은 몇쯤 될까요. 우리는 한겨레 느낌말을 제대로 아는가요. 우리 말소리가 노래가 되도록 가꾸는 손품은 어느 만큼 들이는가요.  글월 한 자락이 시 한 자락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일구는 마음품은 어느 만큼 쏟는가요.


  말은 곧 노래이고, 글은 바로 시입니다. 말은 곧 삶이며, 글은 바로 넋입니다. 아무래도 사람들 스스로 메마르거나 팍팍하게 살아가니까, 사람들이 저마다 내놓는 말마디마다 메마르거나 팍팍하고 말아 노래하고 동떨어지는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사람들 스스로 거칠거나 차갑게 지내니, 저마다 펼치는 글월마다 거칠거나 차갑고 말아 시하고 등돌리는지 모릅니다.

 

 똑같이 웃음을 머금으며
 똑같이 웃음을 지으며
 똑같이 웃음을 띄우며
 똑같이 웃으며
 …

 

  우리는 우리 말을 해야 합니다. 때때로 멋을 부리거나 치레를 한다면서 바깥말을 끌어들여 쓸 수 있습니다만, 우리는 우리 말을 해야 합니다. “아, 맛있어!”라 하지 않고 “딜리셔스!”라 하거나 “굿!”이라 말할 수 있다지만, 한 번 이렇게 말하고 그치는 일이란 없습니다. 자꾸자꾸 다른 얄딱구리한 말투가 뒤따르며 우리 넋을 잃습니다. 처음부터 소도둑은 없습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으로 바뀝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을 가지, 여든 살에 갑작스러운 버릇이 생기지 않습니다. 어린 나날부터 섣불리 영어를 배우고 한자 지식을 머리속에 집어넣는 아이들이 올바르고 알맞으며 곱게 우리 말글을 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아이들한테 참되고 착하며 고운 우리 말글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한테 참되고 착하며 고운 우리 말글을 물려주자면, 어른들부터 스스로 참되고 착하며 곱게 우리 말글을 알뜰살뜰 살려서 써야 합니다.


  즐겁게 쓰는 우리 말이 되도록 마음을 쏟고, 기쁘게 나누는 우리 글이 되도록 힘을 보태야 합니다.

 

 혼자만 신이 나서
 저희끼리만 즐거워 하면서
 아주 좋아 죽겠다면서
 깨가 쏟아지면서

 …

 

  즐겁게 살아갈 수 있어야 좋은 우리 삶이라고 느낍니다. 저마다 한 번 선물받은 고운 삶을 즐겁게 일구어야 하지 않느냐고 느낍니다. 돈이 모자라 팍팍하게 살아간다 해서 슬프거나 괴롭기만 하지 않습니다. 돈이 넘쳐 펑펑 쓰며 살아간다 해서 기쁘거나 넉넉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 소담스레 살필 대목은 내 즐거움이고 내 사랑이며 내 믿음입니다. 나 스스로 즐거울 여러 가지를 찾을 노릇이고 나부터 사랑할 사람을 찾을 노릇이며 나부터 내 둘레 삶터를 믿음으로 섬길 노릇입니다.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은 즐겁게 생각하면서 즐겁게 말합니다. 즐겁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즐겁게 생각하지 못할 뿐더러 즐겁게 말하지 못합니다.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은 홀가분하게 받아들이며 홀가분하게 헤아리는 한편, 홀가분하게 말과 글을 다룰 수 있습니다. 즐겁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삶이며 넋이며 말이며 홀가분하게 받아들이거나 다루지 못합니다.


  그예 웃는 삶에서 웃는 넋이고 웃는 말입니다. 내 삶에 괜스러운 빈 껍데기를 씌울 까닭이 없다면, 내 넋이나 말에도 괜스러운 빈 껍데기를 덮을 까닭이 없습니다. 꾸밈없이 살아가며 아름다움을 즐기고, 꾸밈없이 말하거나 글쓰면서 아름다움을 나누면 됩니다. 사랑스레 살아가며 아름다움을 꽃피우고, 사랑스레 말하거나 글쓰면서 아름다움을 북돋우면 됩니다.


  나 스스로 즐겁게 살아갈 때에는 ‘즐겁다’고 말합니다. ‘희희낙락’하는 내 삶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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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철 축축함이며 삼복 무더위가 작은 멧골짝이라고 어디 비껴 가겠는가. 문을 열면 퀴퀴한 냄새, 내 낡은 방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 자리잡은 거미, 좀벌레, 다리 많은 그리마, 희고 푸른 곰팡이들이 저마다 한철을 누리며 킥킥 웃을 테지만 너희를 어찌하기엔 난 벌써 많이 지쳤다
- 미국 할렘 가난뱅이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깡그리 턴다면 이런 일은 괜찮을까요? 이때에도 똑같이 웃고 떠들며 반길까요
- 또 어떤 사람은 이녁이 짝을 잃고 슬픔에 빠진 곁을 제가 남편과 손을 잡고 활짝 웃으면서 지나갔다고 하소연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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