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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새 9
데즈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어딘가 일그러진 사람들
[만화책 즐겨읽기 134] 데즈카 오사무, 《불새 (9)》
이웃마을에서 잔치를 벌입니다. 이웃마을 어느 집 둘째아들이 무슨무슨 박사 학위를 땄다며 크게 잔치를 벌입니다. 잔치를 벌이는 만큼 인사를 할까 싶어 아이를 데리고 찾아갑니다. 잔치는 면내 중학교 체육관에서 엽니다. 체육관 앞에서는 커다란 돌판에 고기를 신나게 굽습니다. 체육관 안쪽에는 책상이 가득하고 무대가 마련됩니다. 다음달에 국회의원을 뽑는다 해서 그런지, 국회의원 예비후보자까지 꽤 외진 시골마을 잔치마당으로 찾아와 ‘남자 어르신’한테 손을 내밀며 꾸벅꾸벅 인사합니다.
국회의원 예비후보자가 ‘남자 어르신’하고만 손을 잡고 허리 숙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리를 살짝 비킵니다. 나는 저 사람하고 손을 잡을 마음이 없습니다. 이녁이 시골마을 국회의원 예비후보자 아닌 도시 국회의원 예비후보자라 하더라도 이와 같지 않았겠지요. 도시에서라면 아줌마이고 아저씨이고 할머니이고 할아버지이고 누구한테고 손을 내밀었겠지요.
그나저나, 박사학위가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우며 기쁜 일이기에 면내 사람들을 몽땅 부른 듯한 큼지막한 잔치를 열 만한가 궁금합니다. 석사가 되거나 박사가 되는 일이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아요. 그러나 이 일을 놓고 이렇게까지 큰돈을 들이는 큰잔치로 삼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이를 안고 이리저리 돌아보다가 면내 중학교 건물을 죽 살펴봅니다. 생각해 보니, 시골마을에서는 아이 가운데 누군가 대학교에 들어가도 마을 어귀에 걸개천을 걸어요. 시골마을에서는 아이 가운데 누군가 ‘서울에 있는 큰회사’, 이를테면 삼성이나 현대나 엘지나 에스케이 같은 큰회사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걸개천을 걸어요.
- “물이 나올까요?” “나오기만 한다면, 땅에 몇 만 번이라도 키스해 줄 텐데.” “덜컹덜컹.” “쳇. 기계가 기계 흉내를 내다니! 너는 마음 편해서 좋겠구나. 물을 안 마셔도 50년은 살 수 있겠지?” (26쪽)
면내 중학교는 건물이 여럿입니다. 참 크구나 하고 생각하며 어느 건물 한가운데에 적힌 ‘교내 현황’을 읽습니다. 이 면내 중학교에는 학생이 모두 아흔하나요, 교사는 모두 열넷입니다. 학년마다 한 학급이 있고, 한 학급이자 한 학년이 서른 안팎인 셈입니다. 곧, 교무실 하나랑 교실 셋을 빼고는 모두 빈 교실이라 할 만합니다.
예전에 이 시골마을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던 때에는 이 교실이 꽉 찼겠지요. 예전에 이 시골마을 면에 장터가 설 때에는 교실마다 쉰 예순 아이들이 바글거리지 않았을까 싶어요.
빈 교실 가득한 커다란 중학교 건물이 휑뎅그렁하다고 느낍니다. 중학교 건물처럼 크고 많은 사택을 바라봅니다. 예전에는 이 사택이 꽉 찼겠지요. 사택으로도 모자라, 면내 곳곳에서 하숙하거나 자취하는 교사가 있었겠지요.
그러고 보니, 시골마을 시골학교이지만, 막상 시골사람이 시골학교 교사 노릇을 할 수 없어요. 교사는 고향마을에서 교사 노릇을 못하고 자꾸 다른 데로 옮겨 다닙니다. 시골 우체국 일꾼도, 시골 면사무소 일꾼도, 시골 보건소 일꾼도, 시골 파출소 일꾼도, 하나같이 이웃 도시에서 이곳으로 ‘발령’이 나서 일하러 올 뿐입니다. 시골살이를 모르고, 시골살이를 헤아리지 않았으며, 시골살이를 꿈꾸지 않는 도시사람이 시골 공무원이 되어 시골사람하고 마주합니다.
- ‘우리 아버지는 섬의 가난한 어부였답니다. 하지만 늠름하고 남자다웠고, 나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거예요, 틀림없이. 나는 10살 무렵까지 자연 속에서 자라 일본이, 세계가, 얼마나 변했는지 전혀 몰랐었죠.’ (86쪽)
- “코무야, 떠날 때가 되었구나.” “엄마! 금방 돌아올게요, 엄마! 여왕님이 엄마더러 자신의 모습으로 궁궐에 가 달라고 하셨어요. 엄마, 돌아올 때까지만이에요.” “이 엄마가 걱정하는 것은 너란다. 네가 이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코무, 네가 지구에 가도 좋은 일은 없을 거야. 여왕님에게는 고향이라도 너에게는 다른 세계니까.” “엄마, 걱정 마세요. 나, 내 힘을 시험해 볼래요!” (167쪽)
아이를 품에 안고 마을잔치 자리에서 슬쩍 빠져나옵니다. 박사가 되었다는 사람 얼굴은 못 보았고, 박사 아들을 두었다는 할아버지 얼굴 또한 못 보았습니다. 고기 굽는 냄새와 술담배 냄새 넘치는 자리에서 비껴나 아이하고 샛길로 빠집니다. 얕은 멧등성이 옆에 낀 작은 길을 걷습니다. 멧등성이 옆에 낀 중학교 울타리 길가에 멧새와 들새가 지저귑니다.
새소리를 가만히 듣습니다. 이 새들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을까요. 참 작은 새 조금 큰 새 꽤 큰 새가 멧자락과 들판을 넘나들며 아침을 열고 낮을 누립니다. 저마다 먹이를 찾고, 저마다 둥지를 틀며, 저마다 삶을 잇습니다.
시골 면내에서 젊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중학교에 아흔 아이가 다닌다 하고, 중학교 교사가 열넷이라 하지만, 또 시골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도 있다지만, 아이가 되든 어른이 되든 면내에서 마주치는 일은 드뭅니다. 모두들 어디에서 일하거나 놀거나 쉬거나 마실을 할까요.
마을잔치가 벌어지지만, 마을잔치 자리에 아이들이 복닥거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이리 뛰거나 저리 달리지 않습니다. 온통 할머니와 할아버지뿐입니다. 어찌 되든 잔치 자리인데, 이 잔치 자리에 젊은이와 어린이는 왜 보이지 않을까요. 젊은이와 어린이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잔치자리에서 아무것도 얻어먹지 않고 슬쩍 빠져나왔기에 배고픕니다. 배고픈 아이를 걸려 집으로 돌아오기는 힘드니, 면내 택시를 불러 사천 원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조용한 집에서 조용히 낮밥을 먹고 조용히 부대낍니다. 살몃살몃 비추는 햇살을 머금으며 보송보송 마르는 빨래를 걷습니다. 둘째가 푸지게 눈 똥을 치우며 새 빨래를 합니다. 바람소리를 듣고 새소리를 듣습니다. 조용히 흐르는 하루를 돌아봅니다.
- “나는 당신을 지켜보다가 동정심이 생겼습니다. 이 별이 좋죠?” “네, 좋아요! 내 남편이 잠들어 있으니까요. 난, 다른 여자가 없어서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 별은 남편과 나의 세계. 이 별에 자손을 남길 때까지 죽을 수가 없어요!” “좋아요. 당신은 지구인을 버린 거죠? 그러면 다른 별의 여성을 받아들여요. 다른 별 여성과 당신 아이들을 맺어 주세요!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런 건 싫어요!” “다른 별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즉, 이 별에 새로운 종족을 만드는 거예요.” (118∼119쪽)
- ‘포근한 침대는 졸고 있는 코무가 깨지 않도록 살며시 에워쌓습니다. 그것은 마치 자고 있는 아기를 이불로 살짝 덮어 주는 엄마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181쪽)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불새》(학산문화사,2002) 아홉째 권을 되읽으며 생각합니다. 우리 지구별 사람들은 어디를 바라보며 어디로 걸어가는 사람들인지 가만히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어느 결로 예쁘고, 어느 무늬로 미우며, 어느 모양으로 아름답거나, 어느 모습으로 슬플까 생각합니다.
나는 내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아 태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집 두 아이는 나와 옆지기한테서 사랑을 받아 태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집 두 아이는 옆지기와 나한테서 받는 사랑을 즐거이 물려받은 가슴에 저희끼리 새 사랑을 일구어 새롭게 아이를 낳아 새로운 살림을 꾸릴 테지요.
좋은 꿈이 아닐 때에는 좋은 사랑을 빚지 못한다고 느껴요. 좋은 넋이 못 될 때에는 좋은 믿음을 누리지 못한다고 느껴요. 좋은 눈이 아닐 때에는 좋은 흙을 건사하지 못한다고 느껴요. 좋은 손과 발이 아닐 때에는 좋은 일과 놀이를 펼치지 못한다고 느껴요.
오늘날 사람들은 왜 자꾸자꾸 비틀어질까 싶어 슬픕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왜 자꾸 서로서로 겨루거나 다투거나 빼앗거나 윽박지르거나 괴롭히는가 싶어 슬픕니다. 왜 전쟁무기를 만들면서 평화를 억누를까요. 왜 공장을 지으면서 삶터를 망가뜨릴까요. 왜 권력자와 공무원을 만들면서 스스로 삶을 무너뜨릴까요.
대통령이나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지 못해요. 왜냐하면 ‘나라’라는 울타리는 처음부터 없으니까요. 없는 울타리를 짐짓 있는 척 만들며 대통령이나 임금이 생기고, 대통령이나 임금을 모신다며 공무원이나 신하가 생겨요. 대통령이나 임금을 지킨다며 군대가 서요. 곧, 군대란 나라와 평화를 지키는 무리가 아니라 대통령이나 임금이나 공무원을 지키는 무리일 뿐이에요. 군대가 있을 때에는 이웃한 ‘나라’ 여느 사람들을 짓밟아요. 군대가 이웃한 ‘나라’ 임금님이나 공무원만 노리는 일이란 없어요. 군대란 이웃한 ‘나라’ 여느 사람들이 일군 기름진 땅을 노리고, 기름진 땅에서 거둔 열매를 노리며, 기름진 땅을 일구는 사람들을 노예로 부릴 생각뿐이에요.
‘나라’에서는 아이들 숫자가 줄어드는 일을 걱정하지 않아요. ‘나라’에서는 ‘군인이 될 젊은 사내’ 숫자가 줄어들까 걱정해요. ‘군인이 될 젊은 사내’ 숫자가 줄지 않도록 애쓰면서, 이들 ‘군인이 될 젊은 사내’가 더 좋은 터전을 누리도록 애쓴다든지, 아니면 ‘군인이 될 젊은 사내’ 머리를 텅텅 비워 바보가 되도록 이끌면서 이들이 ‘나라’가 시키는 일을 고스란히 따르도록 애써요.
- “코무, 그래, 에펠의 30번째 아이였지. 엄마는 잘 계시니?” “다, 다, 당신은 로미죠?” “그래, 로미란다.” “아, 다행이다. 난 좀더 이상하고, 예민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따뜻한 분이시네요.” “…….” “저, 로미,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들어주실래요?” “뭔데?” “그 눈과 귀라는 거 만져 봐도 돼요? 신기해서요.” “만져 봐.” “아, 물이 나온다. 와, 눈에서 물이 나오네요.” “울면 자연히 나오는 거야. 눈물이라고 하지.” “우리들은 울어도 소리만 나는데, 이상해. 역시 지구인이구나. 목아 미를 때 울어서 물을 마시면 좋겠다.” (148∼149쪽)
사람은 누구나 사랑이 없으면 일그러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품지 못할 때에는 죽은 목숨입니다. 몸뚱이는 숨을 쉬고 밥을 먹는다 하더라도, 사랑을 거느리지 않을 때에는 죽은 살덩이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사랑을 꽃피우기에 사람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살붙이를 사랑하며 내 이웃과 동무를 사랑합니다. 내가 디딘 땅을 사랑합니다. 흙땅에서 자라나는 풀과 꽃과 나무를 사랑합니다. 흙땅에서 자라나는 풀·꽃·나무에 기대는 뭇 벌레와 짐승을 모두 사랑합니다. 이들이 아름다이 어우러지는 물과 바람과 햇살을 하나하나 사랑합니다.
어우러지기에 사랑이 됩니다. 어우르며 어깨동무하기에 사랑입니다. 어울리고 노래하며 살아갈 때에 사랑입니다.
입을 맞추거나 살을 섞을 때에만 사랑이 되지 않아요. 입맞추기는 입맞춤으로 끝나기 일쑤요, 살섞기는 살섞기에서 맴돌기 일쑤예요. 참사랑으로 다시 태어나자면, 서로를 아낄 줄 아는 맑은 꿈이 깃들어야 해요. 참사람으로 살아가자면, 나와 모두를 곱게 어루만질 줄 아는 밝은 숨이 함께해야 해요.
- “이 사람들은 불완전해.” “그래. 몸이 반밖에 없어!” “그쪽이 이상한 거지. 한 명이야? 두 명이야?” “물론 한 명이죠!” “안 그러면 아기가 생기지 않잖아요?” (196쪽)
어딘가 일그러진 사람들은 지구별을 자꾸 일그러뜨립니다. 어딘가 망가진 사람들은 지구별을 자꾸 망가뜨립니다.
사랑을 물려받아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지구별을 찬찬히 사랑합니다. 사랑을 물려주며 사랑을 꽃피우는 사람은 지구별을 한결같이 사랑합니다.
좋은 생각은 좋은 생각을 빚습니다. 나쁜 생각은 나쁜 생각을 빚습니다. 좋은 손길은 좋은 손길로 이어집니다. 나쁜 손길은 나쁜 손길로 이어집니다.
어딘가 일그러진 사람들은 둘레 사람들을 자꾸 일그러뜨립니다. 사랑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둘레 사람들한테 시나브로 사랑을 나누어 줍니다. 지구별 한쪽은 끝없이 일그러지지만, 지구별 다른 한쪽은 아주 천천히 되살아납니다. 앞으로 이 지구별은 어떻게 될는지 모릅니다. 스스로 일그러지면서 지구별을 일그러뜨리는 사람만 가득하며 끝내 뻥 하고 터질는지, 스스로 사랑을 북돋우면서 지구별을 사랑스레 보듬는 사람이 늘어 시나브로 사랑이 감돌는지, 참말 알 길이 없습니다. (4345.3.18.해.ㅎㄲㅅㄱ)
― 불새 9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최윤정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2.5.25./4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