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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chester Days (Hardcover)
Richards, Eugene / Phaidon Inc Ltd / 2000년 11월
평점 :
품절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사진과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47] 유진 리차즈(Eugene Richards), 《Dorchester days》(Phaidon,2000)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사진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내가 살아가는 곳을 내 눈길로 읽고, 내 옆지기 눈길로 읽으며, 내 이웃 눈길로 읽습니다. 아이들을 낳아 살아가며 아이들 눈길로 새삼스레 읽습니다. 눈을 낮추고 키를 낮추며 마음을 낮춥니다. 눈길을 넓히고 마음길을 넓히며 생각길을 넓힙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사진과 숨결을 나눕니다. 내가 살아가는 곳에서 이웃한 사람들 숨결을 헤아리고, 내 숨결을 헤아리며, 내 살붙이 숨결을 헤아립니다. 내가 사진기를 쥐었대서 아무 모습이나 아무렇게나 찍을 수 없습니다. 내가 연필을 쥐었대서 아무 모습이나 아무렇게나 쓸 수 없습니다. 내가 찍고 싶으니까 찍는 사진이 아니고, 내가 쓰고프니까 쓰는 글이 아닙니다.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찍는 사진이요, 내 가슴속에서 샘솟는 사랑으로 쓰는 글입니다.
내 숨결이 내 사랑입니다. 내 사랑으로 이웃들 사랑을 헤아립니다. 이웃들 사랑을 헤아리면서 이웃들 숨결을 생각합니다. 이웃들 숨결을 생각하면서 내 사진을 생각합니다. 서로서로 따숩게 맞잡을 손을 살피고, 서로서로 따숩게 어우러지는 자리에 사진기 하나 놓습니다. 서로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일을 하고 놀이를 즐깁니다. 서로서로 웃고 울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사진과 춤을 춥니다. 사진은 마음껏 춤을 춥니다. 사진은 다른 이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스스로 가장 빛나는 춤사위를 떠올리며 스스럼없이 몸을 움직입니다. 다른 사람 춤사위를 흉내낼 까닭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 발놀림을 따라할 까닭이 없습니다. 나는 내 굼뜬 춤사위를 하하 웃으며 즐깁니다. 나는 내 더딘 발걸음을 킬킬 웃으며 누립니다. 부채춤이든 휴지춤이든, 왈츠이든 탱고이든, 막춤이든 칼춤이든, 어떠한 춤이든 나 스스로 땀을 흥건히 흘리며 놀리는 손짓 발짓 낯짓 궁둥짓이 어여쁩니다.
유진 리차즈(Eugene Richards) 님 사진책 《Dorchester days》(Phaidon,2000)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유진 리차즈 님한테 ‘미국 도체스터(Dorchester)’는 어떠한 터였을까요. 미국 도체스터는 유진 리차즈 님한테 어떤 빛깔과 무늬와 결과 내음으로 스며들었을까요. 유진 리차즈 님이 담은 미국 도체스터 마을살이는 다큐멘터리일까요, 보도사진일까요, 고발일까요, 생활기록일까요. 또는, 그예 사진일까요. 미국 도체스터에서 만나거나 스치거나 어깨동무한 사람들 자취를 사진으로 적바림하는 일은 ‘들여다보기’일까요 ‘훔쳐보기’일까요. 또는 ‘네 삶을 비추며 내 삶을 비추기’일까요 ‘이웃 삶을 살피며 내 삶을 살피기’일까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우리 집 네 식구는 시골살이를 사진이나 글이나 그림으로 담습니다. 두 아이와 복닥이는 나는 두 아이하고 복닥이는 나날을 사진이나 글이나 그림으로 담습니다. 옆지기하고 살림을 꾸리는 나는 내 나름대로 옆지기하고 생각을 맞추어 살림을 꾸리는 하루를 사진이나 글이나 그림으로 담습니다.
사진은 돋보이지 않습니다. 도체스터는 돋보이지 않습니다. 사진 작품은 글 작품보다 돋보이지 않습니다. 뉴욕이나 도쿄나 파리이기에 한결 돋보이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사진기를 손에 쥐었으니 사진을 찍습니다. 살아가며 부지깽이를 쥐었으니 부지깽이로 하루를 그립니다. 살아가며 바늘과 실을 쥐었으니 뜨개질이나 바느질로 이야기를 빚습니다. 살아가며 두 발로 흙을 디디고 섰으니 호미질을 하며 꿈을 키웁니다.



사진이라서 대단하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보여주기에 역사나 사회나 문화나 예술로 남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사람들이 역사나 사회나 문화나 예술로 남습니다. 그러나, 역사로 남기 앞서 삶입니다. 사회로 비추기 앞서 삶입니다. 문화로 꽃피우기 앞서 삶이에요. 예술로 피어나기 앞서 삶이랍니다.
유진 리차즈 님 “도체스터 나날”은 도체스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이면서, 미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이고,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는 내 삶이면서, 내 옆지기와 내 아이 삶입니다. 내 어버이가 살아가며 꾸는 꿈은 내 어버이 꿈이면서, 내 꿈이고 내 아이들 꿈입니다.
소나무와 잣나무와 동백나무가 뿜는 맑은 숨결은 냇물에 녹아들어 송사리도 마시고 바람에 흩날리며 직박구리도 마십니다. 전라남도 고흥 유자나무와 석류나무가 뿜는 고운 숨결은 바닷물 따라 인천 갯벌로 스미고 일본 후쿠시마로도 스밉니다. 바람 따라 대구나 밀양이나 안동으로도 퍼집니다. 포항에 있는 제철소 쇳바람은 해남으로 퍼집니다. 인천에 있는 자동차공장 쇳바람은 춘천으로 퍼집니다. 음성에 있는 고추밭 내음은 여수로 퍼집니다. 상주에 있는 감나무 내음은 서울로 퍼집니. 사진책 《Dorchester days》에 깃든 하루하루 이야기는 도체스터에서 살던 유진 리차즈 님 삶과 넋과 말로 스며들다가는, 뉴욕과 런던으로 퍼지고, 파리와 부다페스트를 거쳐, 카이로와 이스탄불을 지나다가는, 팀부와 라사 눈바람에 살짝 얼었다가 연길과 훈천에서 먼지바람을 마시고, 파주와 고양에서 또아리를 틉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사진과 어깨동무를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내 사진이랑 이웃 할머니 사진이랑 어깨동무를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이웃 고장 사진하고 이웃 나라 사진하고 어깨동무를 합니다. 고운 삶결을 따라 고운 숨결이 퍼집니다. 슬픈 몸짓을 따라 슬픈 몸짓이 퍼집니다. 고운 삶결은 고운 꿈으로 새로 피어나고, 슬픈 몸짓은 슬픈 사랑으로 열매를 맺으며 새 옷을 입습니다.
꿈은 꽃처럼 피었다가 집니다. 시든 꽃을 본대서 꿈이 시들지 않습니다. 피는 꽃을 본대서 꿈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시들면서 씨앗을 맺고, 씨앗을 땅에 드리우면서 새 목숨을 키웁니다. 사진 한 장 두 장 알뜰히 건사한 《Dorchester days》는, 수수하면서 빛나고 빛나면서 수수한 이야기를 작고 크게 들려줍니다. (4345.1.29.해.ㅎㄲㅅㄱ)









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