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시외버스에서 책을 읽을 수 있나
설날을 맞이해 길을 나선다. 버스표를 모두 미리 끊을 수는 없고, 광주에서 청주 가는 시외버스 하나만 미리 끊을 수 있다. 고흥에서 광주 가는 버스하고 청주에서 무극 가는 버스는 표를 끊을 수 없다. 두 버스는 자리번호가 따로 없다. 서울에서 시골로 가는 길이 아닌, 시골에서 서울을 바라보며 가는 길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하며 길을 나선다. 그러나, 길을 나서기 앞서 여러 날에 걸쳐, 갈 수 있나, 못 가나, 하고 자꾸자꾸 망설였다. 아이들 몸이 힘들 일이 뻔하며, 옆지기도 몸에 그닥 좋지 않았기 때문. 토요일 새벽 여섯 시에 옆지기가 비로소 “가자!” 하고 말해서 바지런히 짐을 꾸려 길을 나섰다.
음성 할머니 할아버지 댁으로 가는 길에 내 짐가방에 책을 두 권 챙겼다. 이 책을 한 번이라도 꺼내어 펼칠 수 있나 없나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책 두 권 챙겼다. 고흥에서 광주로 가는 두 시간 이십 분 버스길에서는 아이들 달래고 무릎에 누여 재우느라 바쁘다. 광주에 내려 오십 분쯤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 오줌 누이고 무언가 먹이고 달래느라 금세 지나간다.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청주로 가는 길, 버스에 오른 지 이십 분쯤 될 무렵 첫째 아이가 우웩 하고 게운다. 세 차례 차근차근 잇달아 게우는 아이를 달래고 토닥이며 수건으로 받아 치우고 닦으며 옷 벗기고 내 무릎에 누인다. 배를 살살 쓰다듬고, 팔 다리 가슴 배 등 목 어깨 골고루 주무른다.
골이 띵하다. 광주부터 청주 가는 버스는 쉬지 않고 달리나. 두 시간 가까이 달리면서 쉴 낌새가 없다. 후유, 힘들구나, 생각하면서 맥주깡통을 딴다. 맥주 한 모금 홀짝 마시면서, 내 무릎에서 자는 아이를 바라보고, 옆지기 무릎에서 자는 아이를 바라본다. 세 식구는 고단하게 잔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멀뚱멀뚱 뻑적지근한 팔다리와 등허리로 버틴다. 시외버스가 흔들흔들 한 시간 이십 분쯤 달릴 무렵 맥주깡통을 따면서 책 한 권 꺼낸다. 어지러운 머리로 어질어질 책을 읽는다. 한 쪽이나마 펼치겠느냐 싶더니 이럭저럭 마흔 쪽쯤 읽는다. 그러나, 마흔 쪽으로 끝. 더는 넘기지 못한다.
책을 덮는다. 나도 눈을 감아 본다. 신탄진에서 십오 분을 쉰단다. 한숨을 돌린다. 아이를 안고 내린다. 찬바람을 쐰다. 아이 쉬를 누인다. 아이를 안고 실비 흩날리는 바깥에서 아이를 달랜다. 아이가 핑 도는 머리에서 조금씩 맑은 머리로 돌아가는 듯하다. 조잘조잘 떠드는 소리를 듣고는 버스로 들어간다. 버스는 한 시간을 더 달려 청주에 닿는다. 청주에 닿아 비를 맞으며 고속버스역에서 시외버스역으로 길을 건넌다. 표를 끊는다. 아이가 자꾸 노래부르는 얼음과자 하나를 사서 들린다. 버스에 오른다. 그리 먼길이 아니었을 텐데, 구불구불 진천과 맹동과 꽃동네 둘레를 돌고 돌아 무극에 닿는다. 속이 메스껍고 그야말로 어지럽다. 더구나, 지치는 몸으로 지친 아이를 안고 내리다가, 아이가 목에 걸다가 아이가 어느 결에 목에서 풀어 자리에 내려놓은 아이 사진기를 내가 못 챙기고 내렸다.
무극에서 택시를 잡는다. 택시를 타고 할머니 할아버지 댁으로 간다. 할아버지가 문을 열어 준다. 바리바리 들고 안고 찾아온 짐을 내려놓는다. 아이들 옷을 벗기고 빨래할 옷가지를 씻는방에 풀어놓는다. 아아, 왔구나. 닿았구나. 생각보다 삼십 분이 더 걸려, 꼭 일곱 시간 걸려 왔구나. 고흥에서 서울까지는 다섯 시간쯤인데, 고흥에서 음성까지 일곱 시간 길이라니.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는 아이들 지켜보고 빨래하고 이야기 나누면서 책을 들출 겨를이 조금도 없다. 깊은 저녁 잠자리에 들며 겨우 넉 쪽쯤 펼치고 불을 끈다. (4345.1.22.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