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고니의 하늘
테지마 케이자부로오 글.그림, 엄혜숙 옮김 / 창비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리사랑과 치사랑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27] 테지마 케이자부로오(데지마 게이자부로), 《큰고니의 하늘》(창비,2006)


 

 살살 잠들었다 싶은 둘째가 울먹울먹하더니 으앙 하고 울어댑니다. 조금 더 잠들어 주면 얼마나 좋겠니, 삼십 분쯤 시원스레 잠들고 일어나면 얼마나 좋겠니, 한두 시간쯤 느긋하게 잠들고선 깨어나 주면 얼마나 좋겠니, 하고 생각합니다. 어쩜 이렇게 조금 잠든다 싶으면 깨고, 또 잠들었다 싶으면 일어나니.

 

 아침부터 쉴새없이 뛰고 달리고 노래하고 춤추던 첫째가 부엌에서 어머니 부침개 굽는 저녁나절 밥상에 엎드려 스르르 잠든 지 얼마 안 된 무렵, 아버지는 모처럼 두 아이한테서 홀가분하게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해 보지만, 둘째가 곧바로 깨어나 이 꿈은 물거품이 됩니다.

 

 그러나, 첫째 아이 이맘때에도 비슷했어요. 첫째 아이는 둘째 아이보다 훨씬 엉겨붙거나 달라붙었을 뿐 아니라, 밤새 어머니랑 아버지가 잠들지 못하게 했어요. 둘째 아이는 밤에 오줌을 적게 누고, 꽤 오래 새근새근 잔다고 할 수 있어요.

 

 아이를 안거나 업고서 한동안 돌아다니거나 일을 하면, 팔이며 등떼기이며 허리이며 없는 듯하곤 합니다. 나는 형이랑 둘만 있는 집에서 살았기에 나보다 어린 동생을 업거나 돌보며 지낸 일이 없어요. 어린이가 갓난쟁이를 돌보던 일이 없습니다. 아이들도 어린 동생을 곧잘 업으며 달래거나 어르곤 하는데, 아이들이 제아무리 어린 동생을 잘 업거나 달랠 수 있다 하더라도, 고 작은 몸으로 더 작은 동생을 업거나 안으며 달래면 얼마나 뻑적지근할까요.

 

 두 형제 가운데 동생이었던 나는 어린 나날부터 ‘어린 내가 동생을 업거나 안으며 달래는 일’이란 어떠한 느낌일까 하고 생각에 잠기곤 했습니다. 동생을 돌보느라 같이 놀지 못하는 동무라든지, 동생을 끼고 함께 노는 동무를 볼 때에, 또 언젠가 이야기책에서 동생을 업고 돌보는 언니 모습을 읽거나 들으며, 이렇게 동생을 돌보는 언니나 형이나 오빠 노릇이란 어떠한 나날일까 하고 궁금했어요.


.. 넓은 호수의 여기저기에서 반갈아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오늘은 산에 쌓인 눈이 보통 때보다 더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봄이 아주 가까이 온 것이지요 ..  (4쪽)


 색색 소리내며 잠든 아이를 바라보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고 예쁩니다. 눈물이 톡 떨어질 만큼 어여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잠든 아이를 한 시간쯤 안은 채 꼼짝을 못할라치면, 어버이 품에서 말고 바닥에서도 고이 잠들어 주면 얼마나 좋겠니, 하고 생각합니다. 사랑스럽고 예쁘지만 힘들기는 힘들거든.

 

 바깥에서 움직일 때에는, 이를테면 시골집에서 음성이나 일산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댁을 찾아가는 먼길에서는 아이들을 안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버스나 기차나 전철을 탑니다. 이때에는 몇 시간씩 안거나 업으며 등허리와 다리에 힘이 풀려도 꿋꿋하게 다닙니다. 어디에서 이런 힘이 솟는지 모르나 참 씩씩하게 다녀요. 이러다가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닿아 아이들을 내려놓으면 어느새 눈이 감기거나 풀립니다.


.. 해질녘이 되었습니다. 어두워졌지만 아직 출발하지 못한 여섯 식구가 있습니다. 아이가 병이 나서 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동료들이 없는 호수는 조용합니다 ..  (9∼10쪽)


 저녁 열 시가 넘습니다. 둘째를 안고 첫째를 걸리며 동네 한 바퀴를 돕니다. 이 늦은 때에도 잠자리에 들지 않는 두 아이를 달래려고 밖으로 나옵니다. 자, 얘들아, 이렇게 깜깜한 밤이지, 다들 모두 코 자는데 너희는 왜 아직 안 자려 하니, 이제 너희들도 예쁘게 코 자자, 하고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둘째는 오줌기저귀를 한 장 갈고 나서 아버지 무릎에서 꾸벅꾸벅 좁니다. 고개를 까딱까딱 하다가는 아버지 팔에 기대고, 이내 목에 힘이 탁 풀리며 고개를 뒤로 젖힙니다. 둘째 겉바지와 웃옷을 벗기지 않았기에 잠자리에 눕히지 못합니다. 한동안 이렇게 눕히다가 옷을 벗기니 꼼틀 하며 실눈을 뜹니다. 옷을 마저 벗기고는 다시 그대로 무릎에 누인 채로 토닥이고 이불을 덮습니다.

 

 이제 슬슬 첫째 아이도 잠들면 좋겠지만, 첫째 아이는 더 놀 생각인지, 꽤 졸린 모습이지만 잠자리에 들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 그러면 네 마음대로 하렴. 아직 안 자겠다는데 억지로 재울 수야 없지, 우리 네 식구 이듬날 새벽부터 시골버스 타고 읍내에 가서 광주를 거쳐 충청북도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가야 하는데, 너 새벽에 두고보렴. 새벽에 못 일어나면 너만 두고 갈 테니. 크.

 

 어쩌면, 새벽에 잠을 못 깨는 두 아이를 하나씩 업거나 안고 길을 나서야 할는지 모르지요. 새벽부터 아이들 칭얼거림을 고스란히 받아들으며 먼길을 가야 할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어버이라면, 아버지이고 어머니라면, 이와 같은 아이들 매무새를 하나하나 받아들일밖에 없습니다. 잠든 아이는 포근하게 감싸서 재웁니다. 졸린 아이는 토닥거리며 재웁니다. 배고픈 아이는 밥을 차려 먹입니다. 지저분한 아이는 옷을 갈아입히고 씻깁니다. 아이들한테는 어버이 온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 산 위에서 날개를 치는 하얀 그림자가 나타났습니다. 식구들이 되돌아온 것입니다 ..  (25쪽)


 테지마 케이자부로오(데지마 게이자부로手島圭三郞) 님 그림책 《큰고니의 하늘》(창비,2006)을 읽습니다. 철을 따라 삶터를 바꾸는 큰고니들이 나누는 사랑을 찬찬히 보여주는 그림과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 이 이야기는 어릴 적부터 곧잘 들었구나, 하고 떠올립니다. 어디에서 들었더라, 내 어릴 적 나한테 그림책은 없었으니까 책으로 읽지는 않았을 테지만, 동화책에서 읽었을까, 텔레비전 만화영화로 보았을까, 아니면 학교에서 선생님한테서 들었을까,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틀림없이 어디에선가 보거나 읽거나 들었을 테지만 제대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마, 일본에서건 한국에서건, 이들 큰고니 식구들 이야기는 차근차근 이어졌을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서양 어느 나라 옛이야기가 개화기라 하는 때에 슬그머니 들어와서 이때부터 두루 알려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일본이든 한국이든 철새가 있어요. 철새를 곁에서 지켜보던 여느 흙일꾼이나 고기잡이가 있었겠지요. 일본이나 한국이나 철새들 가운데 큰고니라든지 다른 철새들이 식구들하고 어떤 사랑을 이루는가를 애틋하게 지켜본 사람이 있었겠지요.


.. 그러자 그때, 북쪽 나라의 추운 하늘에 죽은 아이의 모습이 반짝반짝 빛나며 떠올랐습니다 ..  (37∼38쪽)


 어버이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하던가요. 그러나 이 내리사랑이라는 어버이 사랑이란, 가만히 헤아리면 내 어버이한테서 받은 내리사랑이 나한테서 내 아이한테 이어집니다. 내 어버이는 당신 어버이한테서 내리사랑을 받았을 테며, 내 어버이는 치사랑을 당신 어버이하고 나누었겠지요. 나는 내 어버이한테서 내리사랑을 받고 내 아이한테는 치사랑을 받습니다. 내 아이는 나한테서 내리사랑을 받고 나중에 저희 아이한테서 치사랑을 받겠지요.

 

 곧, 서로서로 사랑입니다. 가고 오는 사랑이 아니라 한결같이 흐르는 사랑입니다. 주고받는 사랑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랑이에요.

 

 어느 큰고니 식구는 철이 바뀌었지만 새 터로 떠나지 않고 아픈 아이하고 남았겠지요. 어느 큰고니는 애틋한 짝꿍이랑 떨어지지 않고 둘이 그대로 남았겠지요. 어느 큰고니 식구는 가슴으로 눈물을 삭이며 떠났겠지요. 어느 큰고니는 애틋한 짝꿍을 뒤로 남기고 홀로 떠났겠지요.

 

 남는대서 더 큰 사랑이 아니에요. 떠났다가 돌아왔대서 더 큰 사랑이 아니에요. 아주 떠난대서 모진 사랑이 아니에요. 모두 같은 사랑입니다. 어버이도 아이도 가슴에 깊이 아로새기는 슬픔과 아픔과 눈물이 얼룩지는 사랑이에요. 어버이도 아이도 가슴으로 얼싸안는 빛나는 사랑입니다.

 

 늦은밤, 아이 손과 얼굴을 씻깁니다. 손톱과 발톱을 깎습니다. 이제 잠자리에 누입니다. 이마와 머리카락을 쓸어넘깁니다. 나는 내 아이들 이마와 머리카락을 쓸어넘깁니다. 나는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내 이마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을 테니까, 이 느낌이 내 몸과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졌겠지요. 나로서는 언제 얼마나 쓸어넘겼을는지 조금도 떠올리지 못하더라도, 몸과 마음으로 깊이 스며든 사랑이 있어 내 아이들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겠지요.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요, 말해도 사랑입니다. 함께 있어도 사랑이며, 떨어져도 사랑입니다. 편지를 띄워도 사랑이고, 아련한 눈빛으로 그려도 사랑이에요. (4345.1.20.쇠.ㅎㄲㅅㄱ)


― 큰고니의 하늘 (테지마 케이자부로오 글·그림,엄혜숙 옮김,창비 펴냄,2006.11.15./98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