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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주렁주렁 ㅣ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69
아놀드 로벨 지음, 애니타 로벨 그림, 엄혜숙 옮김 / 시공주니어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꽃이 사랑나무에 주렁주렁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26] 아놀드 로벨·애니타 로벨, 《돼지가 주렁주렁》(시공주니어,2006)
아이들하고 즐거이 살아가는 나날이란 어떤 삶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두 아이가 새근새근 잠들고 나서야 비로소 잠드는 밤에, 또는 아이들보다 먼저 곯아떨어질 만큼 지치고 힘든 밤에, 아이들 모두 일찍 깨어 아침부터 부산스레 떠들고 노는 아침에, 언제나 아침이면 똥을 두어 차례 누며 속을 비우는 갓난쟁이 둘째 밑을 씻기고 기저귀를 빨며, 나 스스로 아버지다이 아이들하고 예쁘게 어울리는 나날인가 하고 찬찬히 생각에 잠깁니다.
무얼 먹어야 좋을까, 먹을거리는 어디에서 얻을까, 내 땅뙈기는 어떻게 돌보거나 건사할까, 이 아이들이랑 무슨 이야기 길어올리는 삶을 돌보는가, 하나하나 짚으면서 좋은 나날인가 하고 생각에 잠깁니다.
아이들은 놀고 뛰고 먹고 자고 칭얼대고 웃고 웁니다. 아침이 찾아오고 낮이 환하며 저녁이 저물다가는 밤이 깊습니다. 새벽이 밝고 동이 틉니다. 늘 되풀이하는 날입니다. 아이들은 몸피와 키가 무럭무럭 클 테며, 어른들은 하루하루 늙는다 하겠지요. 늙는다고 생각하기에 참말 늙을 수 있고, 늙는다는 생각 없이 날마다 고마운 삶이라 받아들일 수 있어요. 날마다 좋은 날로 삼으며 날마다 좋은 살붙이하고 날마다 좋은 꿈을 빚는구나 하고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고요.
오늘 아침 하루를 하나하나 짚어 봅니다. 오줌을 눈 둘째가 아침에 깨며 아버지랑 어머니가 나란히 깹니다.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5초쯤 먼저 깨어 기저귀랑 바지를 갈아 줍니다. 기저귀를 채웠어도 다시 잠들지 않고, 곧이어 똥을 눕니다. 졸린 몸이면서 버티더니 어머니 등에 업힙니다. 둘째가 내는 시끄러운 소리에 첫째도 그예 일찍 깹니다. 첫째는 아버지 말을 듣고 쉬를 눈 다음 긴치마를 입습니다. 어머니가 마련한 뜨개치마를 입으며 신나게 춤을 춥니다. 이에 앞서 어제 빨아서 다 말리고는 아직 개지 않은 옷가지를 하나씩 잡아 뽑습니다. 첫재는 옷가지 가운데 제 옷가지를 잡아당기며 “내 바지, 내 팬티.” 하면서 하나씩 갭니다. 아직 서툴지만 제법 모양 나게 갭니다.
아침에 조용히 마음을 다스려 글 한 줄 쓰려 하던 아버지는 조용히 마음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마땅한 일이에요. 네 식구 복닥이는 삶인데, 어쩌 혼자 조용히 마음 다스릴 꿈을 꾸나요. 복닥이니까 복닥이는 대로 이 삶을 어여삐 즐기면서 글을 쓰든 말든 해야지요. 그래, 셈틀은 끄고 아이하고 옷가지를 갭니다. 한숨 폭폭 쉬면서.
.. 어느 날 농부와 아내가 장에 갔단다. 거기서 팔려고 내놓은 돼지들을 보았어. “통통하게 살찐 돼지로군. 저 돼지들을 사야겠어.” 농부가 말했지. 그랬더니 아내가 말했어. “이 돼지들을 키우려면 할 일이 엄청 많을 거예요.” “그리 힘들지 않을 거요. 우리 둘이 같이 하면 되지 않소.” .. (7쪽)
빨래를 다 개고 오늘 하루 읍내에 다녀와야 하나 생각하다 보니, 아이들이 이렇게 일찍 깨어 부산을 떠는 모습이 고맙다 할 만합니다. 이렇게 아침부터 옷가지 개고, 어젯밤 나온 빨래를 하고, 아이 어머니는 당근물을 짜고 해야, 비로소 아침 열한 시 십오 분 버스를 탈 수 있거든요. 아이 아버지가 하는 글쓰기란, 읍내마실을 마치고 나서도 할 수 있어요. 아이들하고 예쁘게 놀고 나서도 할 수 있어요. 빨래를 다 마친 뒤에도 할 수 있어요. 아니, 오늘 못하면 이듬날 하면 되지요. 이듬날도 못하면 그 이듬날 하면 돼요. 나한테 주어진 일이기에 애써 억지스레 해야 하지 않아요. 즐거이 받아들여 즐거이 누려야 좋아요.
게으름을 피우며 미적미적 미루어도 좋다는 말이 아니에요. 할 수 있는 만큼 신나게 해야 좋아요. 좋은 일이니, 좋은 마음으로 좋게 즐기면서 할 수 있어야 해요. 아이들과 좋은 밥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라면, 좋은 먹을거리를 내 좋은 땀을 흘려 마련한 다음, 내 좋은 손길을 담아 예쁘게 차려서 내놓을 수 있어야 해요.
입으로 넣으면 배를 채우는 똑같은 밥이지만, 밥은 배를 채우려고 먹지 않아요. 하루하루 사랑할 내 삶을 빛낼 좋은 목숨으로 받아들이는 밥이에요. 곧, 우리 살붙이들은 날마다 부대끼거나 복닥이면서, 아이고 힘들어, 소리 절로 나오지만, 이런 소리 절로 나오도록 어여쁘며 즐거운 삶동무입니다.
.. 아침에 농부가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았어. 돼지들이 마당에 꽃처럼 활짝 피어 있었지. 하지만 농부는 다시 베개를 베고 내처 잠을 잤어. “우리 남편은 너무 게을러!” 하고 말하고, 농부 아내는 혼자 옥수수를 심었지 .. (11쪽)
아놀드 로벨 님이 글을 쓰고, 애니타 로벨 님이 그림을 그린 《돼지가 주렁주렁》(시공주니어,2006)을 읽습니다. 그림책 《돼지가 주렁주렁》은 그야말로 돼지들이 능금나무에 주렁주렁 맺혔다는 이야기를 담는데, 참말 돼지들은 능금나무에 주렁주렁 달려요.
돼지들은 꽃밭에 예쁘게 핍니다. 돼지들은 비처럼 쏟아집니다. 그러다가 이 돼지들은 감쪽같이 사라져요. 어찌 된 일일까요.
.. “우리 남편은 너무 게을러!” 하고 말하고, 농부의 아내는 혼자 구멍을 파고 진흙을 채워 넣었지. 머지않아 농부의 아내가 농부에게 와서 말했어. “여보, 우물에 가서 양동이로 물 긷는 걸 도와줘요. 그래야 우리 돼지들이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어요.” 농부가 말했어. “당신이 오늘 양동이로 물을 긷는다면, 나는 언젠가 다른 날 당신을 도와주리다.” “그게 언제예요?” 농부의 아내가 물었어. “돼지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주룩주룩 내릴 때 말이오. 그때는 당신을 도와주지.” .. (16쪽)
그림책 《돼지가 주렁주렁》에 나오는 아주머니는 참 바지런합니다. 아니, 바지런하다기보다 당신 삶을 예쁘게 누릴 줄 알아요. 날마다 할 몫을 기쁘게 생각하고, 날마다 치를 일을 즐거이 헤아립니다.
기쁘게 밥을 먹고, 기쁘게 밥을 차립니다. 기쁘게 돼지들 돌보고 기쁘게 돼지들 보살핍니다. 더구나, 이렇게 온갖 일을 치르면서 “꽃밭에 돼지꽃을 피우고, 능금나무에 돼지열매를 맺히며, 지붕을 따라 돼지비가 쏟아지게끔” 하기까지 해요.
아, 이런, 놀라운 사랑이란.
늦잠을 잘 뿐더러, 일은 하나도 안 하려는 옆지기한테 윽박지른다거나 빗자루로 두들겨팬다거나 모진 말을 퍼붓는다든가 …… 아무런 해코지 다그침이 없어요. 오직 보드라운 손길로 비추는 따순 사랑을 나눕니다.
.. 농부 아내는 바깥으로 달려 나가 지하실 문을 열었어. 돼지들이 모두 햇살 아래 팔짝팔짝 뛰어올랐지 .. (29쪽)
나그네 옷을 벗긴 이는 비바람이 아닌 햇살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나는 이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들으며 썩 내키지 않았어요. 왜 억지스레 나그네 옷을 벗기는 놀이를 해야 했을까요. 나그네는 옷을 벗고 싶지 않은데, 비구름과 해는 왜 서로 잘난 척 겨루기를 해야 했나요.
굳이 겨루기를 하지 않아도 나그네는 옷을 벗을 수 있어요. 비구름은 시원스러우면서 맑은 골짜기 물을 빚으면, 나그네는 이 사랑스러운 골짜기에 옷 훌렁 벗고 기쁘게 뛰어들겠지요. 해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아름다운 햇살 받아 아름다운 밭을 일구는 보금자리를 빚으면, 나그네는 이 아름다운 시골마을 시골집 시골 아가씨하고 사랑에 빠져 거추장스러운 옷 훌렁 벗고는 아름다운 살림을 꾸리겠지요.
차가움보다는 따스함이 훨씬 좋다는 이야기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습니다. 아니, 못마땅해요. 차가운 손길보다야 따스한 손길이 좋다 하지만, 그저 온도만 높은 손길로는 즐겁지 않아요. 사랑이 감도는 손길일 때에 즐거워요. 손이 차서 으스스 떨린다 하더라도 이 손이 사랑이 어리는 손길이라면 즐거우면서 고맙습니다. 추위에 바들바들 떨면서 내미는 찬손이라지만, 이 손이 사랑이 가득한 손길이라면 눈물과 웃음이 함께 쏟아져요.
그림책 《돼지가 주렁주렁》에 나오는 아저씨는, 당신 아주머니가 베풀고 나누며 빛내는 사랑을 날마다 듬뿍듬뿍 받습니다. 빛나는 사랑을 날마다 널리널리 받으면서, 시나브로 사랑꽃을 안 피울 수 없습니다. 사랑으로 살아가고, 사랑으로 생각하며, 사랑으로 꿈꿉니다. (4345.1.18.물.ㅎㄲㅅㄱ)
― 돼지가 주렁주렁 (아놀드 로벨 글,애니타 로벨 그림,엄혜숙 옮김,시공주니어 펴냄,2006.4.30./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