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칭찬 안 하는 리뷰’를 쓴다?
 ― 최규석 님 만화책 느낌글에 달린 댓글을 읽다가

 


 최규석이라는 분이 내놓은 만화책 《울기에 좀 애마한》이 있다. 나는 지난 2011년 11월에 이 만화책을 장만했고, 차근차근 읽고 나서 내 나름대로 느낀 이야기를 달아 2011년 12월 4일에 느낌글을 하나 적었다.

 

 나는 이제 어떠한 누리신문에도 글을 보내지 않으니까 ‘책소개 기사’라든지 ‘리뷰’라든지 ‘서평’을 쓰지 않는다. 나는 내가 바라보는 책을 내가 살아가는 나날에 비추어 헤아리면서 ‘느낌글’을 쓴다.

 나는 책을 읽는 사람 누구나 ‘서평’이든 ‘새책 소개’이든 ‘리뷰’이든 ‘독후감’이든 ‘서평단 숙제하기’ 같은 재미없는 글을 쓰지 않기를 바란다. 누구나 저마다 좋아하는 삶에 비추어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책을 읽고, 이러한 느낌을 글이라는 밭에 예쁘게 실으면 아름다우리라 생각한다. 한 번 누리고 흙으로 돌아가는 삶인데, 왜 숙제하기 같은 글을 쓰느라 시간을 흘리는가. 너무 안타깝고 슬픈 노릇이다.

 

 오늘 2012년 1월 6일 낮, 첫째 아이랑 마당에서 공차기 놀이를 하다가 방으로 들어와 살짝 셈틀을 켰다가, 누군가 내 느낌글에 붙인 토를 읽는다. 내 느낌글에 토를 단 이는 “사랑이 없으면 다 훌륭하지 않은 만화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마땅히 “네.”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나는 만화뿐 아니라 사진도 그림도 글도 노래도 춤도, 사랑을 실어 펼쳐 보이며 나누지 않는다면 훌륭할 수 없을 뿐더러 쓸모도 값어치도 없다고 느낀다. 사랑 없는 영화를 무슨 재미로 보나? 사랑 없는 영화가 어찌 훌륭할 수 있는가?

 

 내 느낌글에 토를 단 이는 “최규석 씨 만화에도 소외받는 자, 억압받은 자, 잊혀진 자들에 대한 사랑이 철철 넘치게 있습니다” 하고 말한다. 모르는 일이 아니다. 최규석 님은 당신 만화에 이런저런 사람들 이야기를 담는다. 그러면 궁금한데, 따돌림받는 사람이랑 억눌린 사람이랑 잊혀진 사람들 이야기를 그리면 다 ‘훌륭한’ 작품이거나 ‘사랑 깃든’ 작품이 될까?

 

 그림감, 곧 ‘소재’를 무엇으로 고르느냐는 하나도 대수롭지 않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그림감으로 다룬다고 더 사랑스럽지 않다. 발레하는 사람 이야기를 그린 《moon》은 사랑스럽지 않은 만화라 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아이들 마음밭을 깊이 다루는 《너에게 닿기를》은 한낱 ‘연애’ 만화이고 ‘사랑 보여주는’ 만화가 아니랄 수 있을까. 데즈카 오사무 님은 《불새》라는 마무리 못 지은 만화에서 삶과 죽음과 사랑과 미움과 하늘과 우주를 그렸기에 ‘훌륭한’ 작품으로 손꼽을 수 있는가. 《블랙잭》이나 《우주소년 아톰》을 손꼽는 까닭은 무엇일까.

 

 대수로이 돌아볼 대목은 ‘소재’, 곧 “누구를 그리느냐”가 아니다. 한진중공업 일꾼을 그린대서 “따돌림받는 사람”을 애틋하게 그리는 작품이 아니다.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를 다룬대서 “억눌린 사람”을 올바로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는 할머니들 삶을 보여준대서 “잊혀진 사람”을 착하게 그리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

 

 더 빗대자면, ㅈㅈㄷ이라 하는 신문에서도 수요집회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면 ‘기사로 다루었’으니 훌륭한 셈인가?

 

 사람들이 김관식 시집을 좀 읽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권정생 동화를 좀 읽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이원수 동시를 좀 읽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박경리 소설을 좀 읽으면 좋겠다. 우리는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삶이어야 한다. 지식으로는 목숨을 지키지 못한다. 소재주의라든지 이름을 내세우는 진보나 개혁이라는 껍데기로는 아름다운 삶을 함께하지 못한다.

 

 우체국 일꾼은 ㅈㅈㄷ 신문사로도 편지를 나른다. 햇살은 대통령한테든 어린이한테든 떨꺼둥이한테든 곱고 따스하게 내리쬔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픈 사람들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이란 무엇인가? 사랑스레 마주하며 사랑스레 나눌 만화책이란 무엇인가?

 

 전태일을 말하는 사람이기에 모두 훌륭하지 않다. 전태일 이름 석 자를 모르면서도 훌륭하게 삶을 짓는 사람이 많다. 전태일처럼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나 스스로 내가 선 땅에서 튼튼하고 씩씩하며 아름다이 삶을 지어야 할 사람이다.

 

 나는 ‘칭찬하는 리뷰’를 도무지 쓰지 못한다. 왜 칭찬을 하는가?

 

 나는 ‘비판하는 서평’ 또한 도무지 쓸 수 없다. 왜 비판을 하는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삶을 아끼는 하루하루를 담아 책을 읽는다. 이 이야기를 내 느낌을 고이 실어 글을 하나 쓴다. 내 삶에 비추어 최규석 님 만화책 《울기에 좀 애매한》은 최규석 님이 쓴 말마디 ‘애매한’이라는 말뜻 그대로 ‘어설프’다. 더구나 최규석 님은 책끝에 당신이 내놓은 이 만화책이 ‘어설픈’ 작품이라고 밝히기까지 했다.

 

 스스로 어설프거나 부끄러이 여긴대서 어슬프거나 부끄러울 작품은 아니지만, 참말 어설프며 부끄럽다 싶은 작품이라고 느낀 나는, 이 느낌을 고스란히 글에 실었다. 왜냐하면, 앞으로 최규석 님이 더는 어설프거나 부끄럽다 싶은 작품을 우리한테 내놓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까. 얼마 앞서 최규석 님이 새로 내놓은 《지금은 없는 이야기》도 한참 앞서 사 놓고 아직 느낌글을 쓰지 않았다. 이 작품도 《울기에 좀 애매한》보다 나아지지 않았다고 느낀다. 최규석 님은 스스로 세운 울타리를 넘어서지 않는다. 왜 스스로 사랑스러운 삶을 붙잡지 않을까. 왜 스스로 더 좋은 누리에서 즐거이 꿈꾸는 삶짓기로 나아가지 못할까.

 

 나중에 할 말이었으나, 먼저 몇 마디 늘어놓는다면, 우리가 함께 사랑할 이야기는 “이제는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이곳에 있는 이야기”일 때에 아름답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서 나누는 사랑”을 눈물겹고 웃음짓도록 누리면서 예쁘게 어깨동무하는 만화를 그린다면 얼마나 기쁠까. 최규석 님이 칭찬이나 상패보다는 ‘다른 목소리’와 ‘여러 목소리’를, 아니 햇살과 같은 목소리와 바람과 같은 목소리와 흙내음 나는 목소리와 바다 품 같은 목소리와 멧골짝 같은 목소리와 들새와 같은 목소리와 풀벌레 목소리를 곱게 들으면서 어여삐 만화로 빚는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빈다. 아니, 최규석 님 만화책을 읽는 사람들부터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작고 낮으며 예쁜 삶을 사랑하면 좋겠다. (4345.1.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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