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못한 글쓰기

 


 옆지기하고 다섯 차례째 맞이하는 예수님나신날이라고 한다.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하나하나 헤아리자면, 모든 일이 둘이 함께 다섯 차례째 맞이한다. 이제 며칠 뒤면 첫째 아이도 다섯 살로 접어든다. 다섯 차례째 겨울이 지나면 다섯 차례째 봄이고, 이 다음에는 여섯 차례째 여름이겠지. 다섯 차례째를 생각하지 못하며 살아간다면, 앞으로 맞이할 여섯 차례째나 일곱 차례째나 열 차례째를 생각할 수 있을까. 열다섯 차례째나 스무 차례째는 헤아릴 수 있을까.

 

 둘째 아이 기저귀를 갈 때에 함께 잠에서 깬다. 옆지기가 쉬를 누고 오는 동안 둘째 아이를 안고 달랜다. 밤에 기저귀를 갈 때면 왜 이리 우니. 너도 네 누나하고 똑같구나. 다시 자리에 눕는다. 이윽고 첫째 아이도 쉬가 마렵다고 말한다. 혼자 스스로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꼭 불러서 함께 가야겠니. 그러나, 이렇게 함께 가는 일도 앞으로 몇 해 뒤면 시나브로 사라지리라. 여섯 살 일곱 살 여덟 살이 되면 저 스스로 쉬를 보겠지. 아니, 예닐곱 살쯤 된다면 밤하늘 별을 올려다보며 바깥으로 나와 뒷간에서 쉬를 눌 수 있으리라.

 

 이제 한 살을 더 먹으면, 글을 쓰며 살아온 지 열여덟 해째 된다. 내 삶 가운데 반토막 즈음 글쓰기로 살아온 셈이다. 이제껏 내 글이 시끌복닥하게 팔린 적 없으나, 네 식구 밥술을 뜨면서 살아간다. 나는 글을 쓰면서 어떤 삶을 일굴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나는 내가 참으로 써야 하는 글을 쓰는 사람일까.

 

 아이들은 나와 옆지기를 어버이로 맞이하리라 생각했을까. 두 아이는 나와 옆지기가 저희 어버이인 삶이 흐뭇하거나 즐거웁거나 아름다울까. 아침에 읍내 장마당 다녀오는 버스길, 읍내로 갈 때에는 자리에 앉고 집으로 올 때에는 서서 왔다. 아이는 서서 오며 아버지 바짓가랑이만 붙잡는다. 할머니들이 같이 앉자고 불러도 안 간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 함께 버스를 탄 이웃 할아버지한테서 능금 한 알을 얻었다. 제 주먹보다 훨씬 큰 능금을 꽁꽁 언 손으로 들며 싱긋 웃는 아이를 바라본다. 나는 이 아이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 줄 생각이나 했을까.

 

 나는 어떤 책을 쓸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책을 읽을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시골마을 보금자리를 얻어 어느 땅뙈기에 어떤 씨앗을 심을 수 있을까. 나는 우리 책들을 어느 터에 예쁘게 건사하면서 슬기로운 책쉼터를 꾸밀 수 있을까. 네 식구 살아가는 이 시골마을에 어떤 도시 어느 이웃이 시끌벅적한 도시살이를 훌훌 버리고 찾아오도록 이끌 수 있을까.

 

 시골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나요. 시골에서 땅을 파고 글을 파며 사랑을 일구고 꿈을 꽃피우면 즐겁지 않나요. 별빛이 좋아요. 한겨울 찬바람에 기저귀가 꽁꽁 얼어붙다가는 따사로운 햇볕에 스르르 녹아 금세 마르니 좋아요. 억새와 갈대가 이루는 밭이 좋아요. 자전거로 신나게 달리는 조용한 시골길이 좋아요. 아이들 손을 잡고 자동차 걱정 없이 마음껏 넓은 길을 거니는 느낌이 좋아요.

 

 내가 누릴 좋은 삶을 생각해 보지 못했어요. 내가 치를 고된 삶을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언제나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나날이에요. 모두 남김없이 맞아들이는 삶이에요. 내 코가 냄새를 못 맡을 줄 처음 목숨 얻어 태어날 때에 어찌 알았겠어요. 냄새를 못 맡는 코이다 보니, 중·고등학교 다니며 똑같은 밥·반찬인 똑같은 도시락을 먹어도 물리거나 질리는 일이 없었겠지요. 홀살이를 하던 때에도 늘 같은 밥·반찬만 마련해서 먹고, 네 식구랑 살아가면서 새로운 밥·반찬을 스스로 먼저 떠올리지 못하고 말아요. 옆지기가 일깨우는 말을 들으면서, 이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났어도 이렇게 일깨우는 말을 들었을까 궁금하고, 나는 내 옆지기한테 어떤 목소리로 어떤 삶을 일깨우며 지내는가를 돌아봐요. 좋은 새날 고마이 누리는 하루라면, 좋은 글 새로 써서 적바림하는 하루로 보내고 싶어요. (4344.12.25.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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