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 열 시간

 


 서울 류가헌갤러리에서 2011년 12월 6일부터 사진책잔치(포토북페어)를 연다. 이 멋진 사진책잔치 여는마당에서 사진책 이야기를 들려주는 몫을 맡았다. 더없이 고마운 자리요, 참으로 뜻깊은 이야기꽃을 피우는 몫을 받았기에, 전라남도 고흥에서 서울까지 머나먼 길을 떠나기로 했다.

 

 서울로 나들이를 가야 하기에 이모저모 집일을 갈무리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터라,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고(밤잠을 미루며 집일을 했지),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탓에 그만 늦잠을 자고 만다. 올들어 내 몸시계가 제대로 흐르지 않은 적이 없는데, 한 해 막바지 큰일을 해야 하는 날 늦잠을 자다니.

 

 아침 일곱 시 오 분에 마을회관 앞으로 군내버스가 지나간다고 시간표에 적히지만, 정작 군내버스가 지나가는 때는 일곱 시 십오 분에서 일곱 시 이십 분 사이. 그래서 일곱 시 십오 분에 나가려고 짐을 꾸리며 나가려 하는데 일곱 시 십이 분에 버스가 지나간다. 이날 따라 군내버스가 일찍(?) 지나간다. 멍하니 바라보다가 어깨에 힘이 빠진다.

 

 어떡해야 하나 걱정하다가 뒷간에 가서 똥을 눈다. 그래, 버스를 놓쳤으니 뒷간에서 볼일을 보는구나. 미처 챙기지 못하던 짐을 챙긴다. 밤새 마른 기저귀를 갠다. 이것저것 또 챙기고 갈무리한다. 어쩌면, 버스를 놓친 일이 잘된지 몰라. 전화번호부를 뒤적여 도화면 택시회사에 전화를 건다. 두 곳에 전화를 거는데 안 받는다. 시골에서는 아침 일곱 시에 다니는 택시가 없을까. 이러다가 여덟 시 반 고흥읍에서 서울 가는 고속버스 놓치겠구나 싶어 걱정스럽다.

 

 다시 버스 시간표를 살핀다. 일곱 시 사십 분에 마을회관에서 도화면으로 가는 버스가 지나간다. 이 버스를 타고 면에 가면, 면에서는 읍으로 가는 버스가 삼십 분에 한 대씩 있으니까, 여덟 시 버스를 타면 읍에 닿아 가까스로 여덟 시 반 고속버스를 탈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해 본다.

 

 부랴부랴 집을 나선다. 그런데 아랫집 할매 할배 사는 집 앞에 웬 택시 하나 서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어, 뭐지? 아랫집 할배가 문 앞에 선다. 인사를 하니, 당신 딸아이 둘이 김치 담그러 엊그제 찾아와서 아침에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신다. 어쩜 이럴 수가. 나는 도화면 택시를 부르려고 용을 쓰다가 못 부르고 말았는데, 아랫집 할매는 포두면 택시를 부르셨다. 택시를 부르실 때에는 늘 포두면에서 부르시나 보다. 택시를 얻어타며 이야기를 듣고 보니, 포두면 택시 일꾼 아저씨는 꽤 오랫동안 마을 분들하고 알고 지내는 사이요, 다른 곳 택시보다 찻삯이 눅다. 다른 데에서는 만사천 원 만오천 원 받는 삯을 만이천 원 받는다.

 

 고흥읍에서 서울 가는 고속버스 표를 끊는다. 다섯 시간 살짝 안 걸려 서울 강남에 닿는다. 헌책방 두 군데를 돌고 나서 전철을 타고 시청역에 내려서 경복궁 맞은편 류가헌갤러리로 걸어간다. 한 시간 반 남짓 사진책 강의를 한다. 다섯 시간 가까이 고속버스를 탄 터라 속이 미식미식했기에 밥을 안 먹고 저녁 열 시 즈음까지 있다가 느즈막한 때에 막걸리랑 보리술하고 부침개로 배를 채운다.

 

 새벽 네 시까지 술자리를 잇는다. 여관에 겨우 기어든다. 아침 여덟 시 반에 깨어나 전철을 타고 독립문에서 내린다. 독립문 앞 헌책방에 찾아간다. 충청북도 멧골집으로 옮기고 나서 이곳을 거의 찾아가지 못했고, 전라남도 고흥 시골집으로 옮긴 다음에는 도무지 찾아갈 엄두를 못 냈는데 용케 오늘 찾아간다. 독립문 헌책방 〈골목책방〉 아저씨가 “아이고,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한다. “뭘요, 저야말로 이렇게 올 수 있어 고맙지요.” 우리 식구들 참말 먼 데로 옮겼다고 소식을 알린다.

 

 시내버스를 타고 용산역으로 간다. 고흥으로 돌아가는 고속버스는 아침 여덟 시랑 아홉 시 무렵에 있고, 이 다음이 낮 두 시 넘어 있다. 이때까지 기다리거나 길에서 머물 수 없어, 열두 시 고속철도를 타고 광주로 가기로 한다. 세 시간 동안 고속철도를 달린다. 광주역에서 택시로 갈아타서 버스 타는 데에서 내린다. 시외버스를 타고 두 시간 만에 고흥에 닿다. 광주에서 고흥까지 시외버스는 두 시간 사십 분 거리인데, 오늘 따라 시외버스 일꾼이 구비구비 멧길을 너무 거칠고 빠르게 몰아 자그마치 사십 분이나 줄인다. 나는 시간이 줄었다고 기쁘지 않다. 너무 거칠고 빠르게 구비구비 멧길을 이리저리 흔들리며 달리니 속이 메스꺼워 머리가 몹시 어질어질하다. 하마터면 게울 뻔하다.

 

 읍내 과일집 할매한테서 감 백스무 알을 이만 원에 산다. 감이 한창일 때에는 백스무 알에 만오천 원 받는다. 감 백스무 알 꾸러미를 장만하면 참 오래도록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마을에서 지내며 보면, 감에 약을 친다든지 뭘 하는 할매나 할배가 없다. 그야말로 따스한 날씨를 받으며 자라는 고운 감알이다. 충청북도 음성에서는 감알 하나에 천 원을 주고 사서 먹었는데, 전라남도 고흥에서는 감알 하나에 백 원이나 이백 원 꼴. 마을에서는 이웃집 어르신들이 한 소쿠리씩 선물로 주시기도 한다.

 

 좋다. 뿌듯하다. 읍내에서 택시를 불러 탄다. 이천 원 에누리해 주는 만 원만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다. 1박 2일 서울마실을 고속버스와 기차 열 시간 넘게 시달리며 온몸이 찌뿌둥하지만, 감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니까, 살갑고 따스한 집식구들 얼굴을 보니까, 없던 힘을 새로 북돋울 만하다. 둘째는 어머니가 고이 품어 재운다. 첫째는 아버지가 예쁘게 품어 재운다. 첫째는 어제 집을 비운 아버지를 찾았단다. 적어도 2박 3일로 서울마실을 해야 몸이 그나마 덜 고단하지만, 집식구들 생각하면 내 몸이 좀 고되더라도 이렇게 1박 2일 열 시간을 시달리는 일을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한다. (4344.12.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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