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없애야 말 된다
(1642) 위계적 1 : 위계적인 관리체계
.. 또 다른 특징은 자립적이고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공동체 학교이고, 위계적인 관리체계가 없다는 것이다 .. 《크리스토퍼 클라우더,마틴 로슨/박정화 옮김-아이들이 꿈꾸는 학교》(양철북,2006) 5쪽
“또 다른 특징(特徵)”은 “또 다른 모습”이나 “또 다르게 돋보이는 모습”으로 다듬습니다. 짤막하게 “또한”으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자립적(自立的)이고 자체적(自體的)으로 운영(運營)하는”은 “다른 데에 기대지 않는”이나 “나라나 다른 기관에 도움을 받지 않고 꾸리는”이나 “스스로 살림을 꾸리는”으로 손보고, “없다는 것이다”는 “없다”로 손봅니다. ‘공동체(共同體)’라는 말마디를 요즈음 사람들이 즐겨쓰는데,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는 뜻이라 할 때에는 ‘두레’를 넣어 “두레 학교”처럼 적을 수 있어요. “어깨동무 학교”나 “열린 학교”나 “모둠살이 학교”라 해 보아도 됩니다.
위계적 : x
위계(位階)
(1) 벼슬의 품계
- 새 능의 주인공의 신분이나 위계가 서하총의 그것보다는 아래임을 나타내는
(2) 지위나 계층 따위의 등급
- 위계가 서다 / 군대에서는 위계가 분명하다
위계적인 관리체계가 없다
→ 계층으로 나눈 관리 틀이 없다
→ 지위로 나눈 틀거리가 없다
→ 지위나 계층으로 나누지 않다
→ 위아래로 나누지 않다
→ 사람을 위아래로 나누지 않다
…
국어사전에 ‘위계적’이 안 실립니다. 안 실릴 만하니 안 싣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위계’는 실립니다. 실릴 만하니 실을까 생각하다가는, 한자말 ‘위계’ 또한 굳이 국어사전에 실어야 할까 알쏭달쏭합니다.
“벼슬의 품계”이든 “지위의 등급”이든 그냥 ‘벼슬’이나 ‘지위’라는 낱말만 써도 넉넉합니다. 아니, 한국 말투와 말법을 헤아린다면, “새 능 주인공 신분이나 벼슬이 ……”처럼 적으면 돼요. “지위가 서다”라든지 “군대에서는 계층이 뚜렷하다”처럼 적으면 그만입니다.
위아래로 나누지 않는다
지위를 위아래로 나누지 않는다
계층을 위아래로 나누지 않는다
지위를 나누지 않는다
계층을 나누지 않는다
한국말에는 높임말이 있습니다. 높임말과 함께 낮춤말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높임말과 낮춤말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우리는 높임말과 낮춤말을 아울러 씁니다. 높일 만하니 높임말을 쓰고 낮출 만하니 낮춤말을 쓴다 할 텐데, 이른바 ‘고대국가’이니 ‘근대국가’이니 하는 틀을 세워서 지위와 계층을 나누던 삶자락에서는 말마디를 높이거나 낮출밖에 없어요. 그러나 한 지붕에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아이들 다 함께 살아간다 할 때에는, 억지로 높이거나 낮추는 삶이 아니라, 서로를 아끼면서 사랑하는 삶입니다.
조선이 아닌 고려 때에는, 고려 아닌 고구려나 백제 때에는, 고구려나 백제 아닌 옛조선 때에는, 옛조선 아닌 자그마한 마을살림일 때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림집을 꾸리고 밥을 마련하며 집을 보듬었을까요. 이천 해 앞서도, 이만 해 앞서도, 모두들 여자가 집일을 도맡으며 밥·옷·집 건사하는 몫을 치러야 했을까요.
높낮이를 만들어 높임말·낮춤말 가르던 얼거리하고,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는 삶에서 쓰는 말마디 얼거리는 사뭇 다르다고 느낍니다. 오늘날 한국말에는 슬프게 갈린 높낮이 때문에 생긴 억지스러운 높임말·낮춤말이랑, 살붙이가 서로를 아끼거나 사랑하며 서로서로 섬기며 보살피던 여느 말이 어지러이 섞였다고 느껴요.
우리 말글이 처음부터 위아래를 나누는 말이었을까요. 한문이 한국말이 스며들 무렵부터 억지스레 높임말을 만들지 않았을까요. 한문을 한글로 적어 일컬을 때에는 억지스레 높임말로 삼고, 여느 자리 여느 사람들 여느 말글은 낮춤말로 깎아내리지 않았을까요.
또한, 스스로 살림을 꾸리는 두레 학교이고, 높낮이나 위아래가 없다
더욱이, 스스로 살림을 일구는 열린 배움터이고, 높낮이도 위아래가 없다
말에는 높낮이가 없습니다. 글에는 위아래가 없습니다. 말에는 사랑이 깃듭니다. 글에는 믿음이 실립니다. 높낮이 아닌 따사로운 결을 담는 말입니다. 위아래 아닌 너그러운 꿈을 돌보는 글입니다. (4344.11.27.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