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할머니 전통문화 그림책 솔거나라 17
이규희 지음, 윤정주 그림 / 보림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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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엌 아버지가 피우는 꿈이야기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00] 윤정주·이규희, 《부엌 할머니》(보림,2008)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시골집에서 지낸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납니다. 집임자가 빈 채 낡아 먼지를 먹던 집을 치우고 고치느라 부산하게 지냈기에 한 달인지 한 주인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엊그제 드디어 마을 어르신들을 모시고 면내 밥집에서 낮밥 한 끼니 대접하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마을에 자가용 모는 분은 없고 이장님 댁에 짐차 하나 있으나, 면내 밥집으로 가는 길에는 차를 얻어타야 합니다. 마침 밥집에서 봉고차를 끌고 와서 할아버지들을 모시고, 다음 차로 할머니들을 모십니다. 깊은 시골이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마을 어르신들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따로 자리를 잡습니다. 밥집에서든 버스에서든 언제나 할멈 자리와 할아범 자리가 갈립니다. 마을회관에서 잔치를 벌일 때에도 할멈 밥상과 할아범 밥상이 똑 떨어져요.

 오늘날 아저씨 아주머니 사이에서는 서로 자리를 나누어 앉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젊은 사내와 가시내라면 서로 자리를 나누어 앉을 까닭이 없겠지요. 할멈과 할아범이 자리를 따로 나누는 삶은 시골마을 할멈과 할아범이 모두 눈을 감고 흙으로 돌아갈 무렵 시나브로 사그라들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그러니까, 부엌일은 언제나 할멈 몫입니다. 밥상을 치우거나 반찬을 더 내오거나 하는 몫은 노상 할멈 몫입니다. 할아범이 밥상을 차리거나 치우는 일은 없습니다. 할아범이 반찬 그릇에 손을 대거나 설거지를 맡는 일은 없어요.

 그동안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만, 마을 어르신들 밥잔치 자리에 네 살 딸아이와 함께 끼면서 ‘아버지라는 사람이 딸아이한테 밥과 반찬을 하나하나 집어서 먹이는’ 일을 마을 어르신들이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궁금합니다. ‘사내가 칠칠맞다’고 여기셨을까요. ‘이제 온누리가 달라졌으니 젊은내가 이렇게 할 수 있겠지’ 하고 받아들이셨을까요.


.. 혼자 멀뚱멀뚱 앉아 있으려니 봄이 할멈 생각이 더 나는구먼. 시집온 지 사흘 만에 조심조심 부엌 문지방을 넘어오던 모습이라니! 새색시가 그날부터 아궁이에 불을 활활 때서 가마솥에 물 끓이고, 중솥에다 밥 짓고, 옹솥에 국 끓이느라 정신이 없었지. 식구들이 좀 많아야지.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동생, 시누이에 군식구까지 모두 한솥밥 먹으며 북적북적 살 때였거든 ..  (8쪽)


 빈 시골집을 아직 얻기 앞서 이장님 댁에서 여러 날 묵었습니다. 빈 시골집을 계약하고 나서 집식구 모두 시골마을로 찾아왔을 때 아직 집에서 물을 쓸 수 없기에 이장님 댁 바깥수도로 둘째 오줌기저귀를 빨았습니다. 이장님 댁에 묵으면서 설거지라도 거들려 했지만 아주머님이 손사래를 쳤습니다. 바깥수도에서 손빨래를 할 때에 ‘빨래는 애 엄마한테 시키지’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두 아이와 옆지기와 내 옷가지’ 모두를 도맡아 빨래하는 아버지가 이 나라에 몇이나 될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아예 없지는 않겠지요. 기계빨래 아닌 손빨래로 네 식구 옷가지를 빨래하면서 집일을 하는 아버지가 이 나라에 얼마나 될는지 아리송합니다. 하나도 없지는 않을 테지요.

 그렇다고 내가 집일을 잘 한다고 할 수 없어요. 집일을 도맡지만 많이 엉성합니다. 집일과 집살림을 몽땅 거느린다지만, 집살림을 알뜰살뜰 여미지 못해요. 시나브로 나아지리라 믿으며 애를 쓰고 용을 써요. 이제껏 옳게 못했다지만, 앞으로 알차게 다스리고 싶다는 꿈을 꿔요.


.. 우린 그렇게 옥신각식하며 지냈어.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아이들도 하나둘 태어났지. 가을볕에 아람 여물듯 여물어 가는 아이들을 보면 어찌나 대견하던지. 그 아이들이 다 내 자식 같고 손자 같았거든 ..  (16쪽)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어 밥상에 차리며 가만히 헤아립니다. 첫째 아이가 밥을 먹고 둘째 아이도 머잖아 밥상에 도란도란 둘러앉아 밥을 먹을 나날을 찬찬히 그립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으레 아버지가 차리는 밥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랄 텐데, 먼 뒷날 아이들이 어른으로 씩씩하게 자라고 나면, 아이들이 저희 어버이한테 저희 아이를 낳아 찾아온다면 ‘할머니 손맛’이 아닌 ‘할아버지 손맛’을 느낄 밥을 나누어 먹잖아요. 언제쯤 뒤가 될는지 모르겠는데, 앞으로 서른 해쯤 뒤에, 또는 마흔 해쯤 뒤에, 아니면 쉰 해쯤 뒤에, 내가 그무렵까지 튼튼하게 내 삶을 꾸릴 수 있다면, 예순 일흔 여든 나이에 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한테 ‘시골 할아버지 밥차림’을 베풀 수 있을까요. 우리 마을에 새로운 젊은 이웃이 생겨 젊은 이웃이 낳은 아이가 무럭무럭 커서 저희 아이들을 낳고 우리 집에 마실을 온다면, 이때에 ‘이웃 할아버지 밥대접’을 나눌 수 있을까요.


.. 아이들이 자라서 하나둘 도시로 나가자 봄이 할멈은 자나 깨나 빌었어. “조왕 할멈, 부디 내 새끼들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리게 해 주오!” 막둥이가 장가들어 손녀딸 봄이를 낳은 뒤로는 더욱 지극 정성이었지. “조왕 할멈, 조왕 할멈. 부디 우리 귀한 손녀 병 없이 탈 없이 잘 자라게 해 주오!” 첫새벽이면 조왕 보시기에 물을 떠 놓고는 빌고 또 빌었어. 그 지극 정성을 보고 내가 어떻게 가만있겠어 ..  (20쪽)


 윤정주 님 그림과 이규희 님 글로 엮은 그림책 《부엌 할머니》(보림,2008)를 읽습니다. 부엌에서 온삶을 보내는 ‘사람 할머니’와 이 사람 할머니 곁에서 다독이고 타이르며 나무라거나 일깨우는 ‘조왕 할머니’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부엌 할머니》를 읽습니다.

 시골집에서 할머니는 으레 부엌 할머니입니다. 논일을 하는 할머니라든지 낫질을 하는 할머니보다 부엌에서 살림을 맡는 할머니입니다. 사람들은 으레 이렇게 바라보고 이렇게 여깁니다. 나무를 하는 할머니나 지붕을 이는 할머니를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러나 시골 할머니는 부엌일부터 논밭일 집일 모두 맡습니다. 어느 일이나 할아버지와 함께 합니다.

 할머니가 있기에 시골마을이 굴러갈 수 있습니다. 할머니가 있어서 사람들이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할머니가 있는 터라 사람들이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할머니가 있는 만큼 사람들은 따순 방에서 느긋하게 잠들며 쉴 수 있습니다.

 그림책 《부엌 할머니》는 할머니가 맡은 숱한 집일 가운데 오직 한 가지 ‘부엌일을 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이제 시골마을 할머니들이 하나둘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가고 나면 사라지고 말 부엌살림과 부엌살이가 어떠한 그림과 이야기였는가를 들려줍니다. 할머니가 있기에 아이들이 태어나 자랐고, 할머니가 있어서 아이들이 젖과 밥을 먹으며 컸습니다. 할머니가 있기에 아이들은 정갈하게 씻었고, 할머니가 있어서 아이들은 다소곳하게 옷을 입었어요.

 책을 덮습니다. 처마가 보드라이 기우듬하지 않은데다가 너무 밭아 눈비가 몽땅 들이칠 만하게 그린 기와지붕집 그림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책을 덮습니다. 살가운 이야기를 한결 살가우면서 올바로 담아내는 그림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습니다. 자료사진을 많이 살폈을 테고, 옛 살림집을 틀림없이 드나들며 살폈겠지만, 막상 그림쟁이 스스로 옛 기와집이든 풀집이든 시골집에서 ‘바로 오늘’ 살림을 꾸리지 않을 때에는, 부엌 할멈 삶자락 드리우는 이야기를 구수하게 밝히기에 만만하지 않구나 싶어요.

 그래도 《부엌 할머니》는 반갑습니다. 네 식구 복닥거리는 우리 시골집을 떠올리도록 해 주니 고맙습니다. 우리 집 어린 두 아이가 앞으로 야물딱지게 자라서 이 시골집 곁에서 새 흙집을 지어 예쁘게 살아갈 때에 어떤 부엌을 마련해서 어떤 부엌살림을 꾸리려나 꿈꾸도록 도와주니 기쁩니다. 부엌 할머니가 부엌에서 한삶을 마무리지으면서 돌아본 당신 아이들 이야기와 이 아이들이 낳은 아이들이 펼칠 새로운 이야기가 이제부터 어떤 빛깔로 빛날까 하고 돌아보면서 재미납니다.

 부엌은 사랑 담은 밥이 보글보글 끓는 곳입니다. 부엌은 믿음 실은 국이 부글부글 끓는 자리입니다. 부엌은 꿈 보듬는 이야기가 오순도순 피어나는 터입니다. (4344.11.24.나무.ㅎㄲㅅㄱ)


― 부엌 할머니 (윤정주 그림,이규희 글,보림 펴냄,2008.2.25./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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