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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일생 1
니시 케이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온삶 걸쳐 사랑을 빚는 사람들
[만화책 즐겨읽기 64] 니시 케이코, 《남자의 일생 (1)》
날마다 밥을 먹습니다. 날마다 옷을 걸칩니다. 날마다 잠을 잡니다. 어느 누구라도 밥·옷·집이 없이는 목숨을 잇지 못합니다. 어디에서 어떤 밥·옷·집을 누리든, 밥·옷·집을 맞아들이지 못할 때에는 내 목숨이 끊어지거나 흔들립니다.
누군가는 사랑스러운 터에서 사랑스러운 밥·옷·집을 누립니다. 누군가는 슬프거나 메마른 터에서 슬프거나 메마른 밥·옷·집에 허덕입니다.
사랑으로 맺은 내 목숨일 텐데, 왜 사랑으로 꽃피우지 못할까요. 사랑으로 이루는 내 삶일 텐데, 왜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가요.
스스로 밥을 차리지 못하면서 스스로 사랑을 할 줄 모릅니다. 스스로 옷을 짓지 못하면서 스스로 사랑하는 길을 잊습니다. 스스로 집을 건사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사랑을 북돋우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나무라기도 하고 추켜세우기도 합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 때문에 나라가 무너진다 걱정하면서, 한미자유무역협정을 해야 나라가 산다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어떤 나라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짚지는 않습니다. ‘어떤 나라가 어떻게 살찌우는’가를 헤아리지는 않습니다.
나라에서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맺으려 한다면, 나라힘을 거머쥔 몇몇 사람이 저희 밥그릇을 채우고 싶기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부터 ‘밥그릇 더 채우기’에 마음을 쏟기 때문입니다. 삶을 참답게 사랑하면서 삶을 예쁘게 가꾸는 일에 마음을 쏟는 여느 사람으로 이루어진 나라일 때에는, 제아무리 밥그릇 채우기에 힘쓰는 권력자나 공무원이 가득하다 하더라도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맺어 ‘나라 살찌우기’를 한다고 나서지 못합니다. 사람들 스스로 옳은 삶을 바라보지 않으니까, 사람들 스스로 옳은 삶으로 고치지 않으니까, 사람들 스스로 옳은 삶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자꾸자꾸 슬프며 안쓰러운 정책이나 돈벌이만 판칩니다. 돈벌이에서 홀가분하지 않은 여느 사람들인 만큼, 이러한 터전에서 정치권력을 붙잡아 행정을 맡는 이들이 옳거나 바르거나 착하거나 아름다운 길로 접어들지 않아요.
- “아무 생각 없이, 난생 처음 긴 휴가를 내서, 체면치레 따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었어.” (12쪽)
아름다이 살아가려는 어버이일 때에, 이 어버이가 보살피는 아이들도 아름다이 살아가려는 길을 걷습니다. 착하게 살아가려는 어버이일 때에, 이 어버이가 돌보는 아이들 또한 착하게 살아가려는 길을 걸어요.
어버이 스스로 좋은 터에서 좋은 꿈을 꿀 때에, 아이들이 좋은 넋을 길어올리며 좋은 말꽃을 피웁니다. 어버이 스스로 좋은 밥을 좋은 손길로 지을 때에, 아이들이 좋은 마음을 좋은 빛줄기로 가득 채웁니다.
첫손 꼽는 요리사가 지어야 좋거나 맛나거나 아름다운 밥이지 않습니다. 훌륭하다는 요리책에 나오는 대로 지어야 좋거나 맛나거나 아름다운 밥이 되지 않아요.
사랑을 담는 밥일 때에 좋거나 맛납니다. 빛줄기를 따사로이 싣는 밥일 때에 기쁘면서 고맙습니다.
- “제가 살게요. 할머니 땅 전부 다. 집도, 산도, 밭도.” (20쪽)
- “그래도 상관없어요. 그렇게 의좋던 친척들이 싸우는 걸 보기도 괴롭고, 결국 아무도 이곳을 돌볼 수 없게 되어 남의 손에 넘어가느니.” (57쪽)
이 나라에서 남자들은 언제부터 밥짓기에서 손을 떼었나 궁금합니다. 이 나라에서 남자들은 언제부터 밥짓기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집살림에서 멀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이 나라 남자들이 어리석거나 어리숙하거나 어처구니없는 길을 걷더라도 이 나라 여자들은 어리석거나 어리숙하거나 어처구니없는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이 나라 여자들도 이 나라 남자들처럼 어리석거나 어리숙하거나 어처구니없는 길을 걸었다면 나라가 폭삭 무너졌겠지요. 마을이 와장창 사라졌겠지요. 살림이 송두리째 날아갔겠지요.
이 나라 여자들은 밥순이요 집순이요 빨래순이요 아기순이가 되었습니다. 이 나라 남자들은 밥돌이도 아니요 집돌이도 아니며 빨래돌이나 아기돌이 또한 아닙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을 놓지 않은 이 나라 여자들이고,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을 내동댕이친 이 나라 남자들이에요.
오늘날은 남자이건 여자이건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을 등돌립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을 저버립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을 처음부터 모릅니다.
목숨보다 아름다운 무엇이 내 삶에서 또 있으려나요. 목숨보다 값진 무엇이 내 나날에서 다시 있으려나요.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할 무엇이 내 하루에서 어떻게 있으려나요.
- “7시에 저녁식사예요. 빨래와 식사 준비는 내가 할게요. 식비는 반반 부담이에요. 카이에다 씨는 장작 패기와 목욕물을 맡아 주세요.” “아, 그런 거 해 본 적 없는데.” “간단해요. 그럼, 7시에.” (70쪽)
- “자네 꽤나 신경질적이군.” “난 할머니 같은 우아함도 관용도 배려도 없어요.” “아니, 관용 외엔 있는데. 의외로.” “그런 건 도쿄에서 다 닳아 없어졌어요.” “오오, 자신을 너무 깎아내리지 말라고.” (136쪽)
주식이 있어야 나라가 있지 않습니다. 자동차가 있어야 마을이 있지 않습니다. 아파트와 재개발이 있어야 보금자리가 있지 않습니다.
들판이 있어야 합니다. 멧줄기가 있어야 합니다. 바다와 냇물과 푸나무가 있어야 합니다. 짐승과 벌레가 있어야 합니다. 바람과 햇살이 있어야 합니다. 흙과 돌과 모래가 있어야 합니다.
손전화나 피아노는 없어도 됩니다. 책이나 졸업장은 없어도 됩니다. 영화나 잔치마당은 없어도 됩니다. 통계청이나 서울시청은 없어도 됩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없어도 됩니다. 교사나 판사나 의사나 운전기사는 없어도 됩니다.
오직 하나 사람이 있으면 됩니다. 내가 있고 이웃이 있으며 벗이 있으면 돼요. 어버이가 있고 아이가 있으면 됩니다. 딸이 있고 아들이 있으면 돼요. 할머니가 있으며 할아버지가 있으면 됩니다. 아기 울음소리가 있어야지 텔레비전 소리는 없으면 그만입니다. 호미가 있어야지 공장은 없어도 넉넉해요. 숟가락이 있어야지 골프장은 없을 때에 즐거워요.
-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 곁에 있고 싶다고 내 안의 뭔가가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게 선생님의 손녀였다는 건 나중에서야. 하지만, ‘사랑’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182쪽)
니시 케이코 님 만화책 《남자의 일생》(시리얼,2011) 1권을 읽습니다. 세 권으로 이루어진 《남자의 일생》 가운데 첫 권은 ‘사람이 살아가는 길에서 생각할 한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사람 가운데 여자로 살아가는 사람, 사람 가운데 남자로 살아가는 사람, 이 둘은 서로 어떻게 맺고 만나는가를 이야기합니다. 남자는 무엇을 바라보며 사는지, 여자는 무엇을 생각하며 사는지, 남자와 여자는 나란히 무엇을 돌아보며 사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아니, 삶을 이야기한다기보다 이야기하자고 이끕니다. 삶을 나 스스로 생각하자고 이야기하도록 이끕니다. 삶을 나 스스로 아끼며 사랑하자는 이야기가 나오도록 이끌어요.
삶을 느끼지 못할 때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삶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사랑이 자라나지 않습니다. 삶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내 목숨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살포시 나누지 못합니다.
삶을 바탕으로 사랑이 태어납니다. 삶을 밑거름 삼아 사랑을 꽃피웁니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스스로 삶을 옳게 바라보고 착하게 보듬으면서 사랑을 새삼스레 새로 빚습니다. (4344.11.13.해.ㅎㄲㅅㄱ)
― 남자의 일생 1 (니시 케이코 글·그림,최윤정 옮김,시리얼,2011.4.25./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