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색깔=꿀색 - 한 해외 입양인의 이야기
전정식 글.그림, 박정연 엮음 / 길찾기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사랑을 꽃피우는 꿈
 [만화책 즐겨읽기 75] 전정식, 《피부색깔=꿀색》(길찾기,2008)


 가장 아름답다고 할 만한 곳이 따로 있는지 잘 모르지만, 가장 아름답다고 할 만한 곳에서 살아갈 수 있다 해서 내 삶이 가장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둘째로 아름답거나 셋째로 아름다운 곳에서 산대서 내 삶이 덜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고 느끼지 않으며, 막째로 아름다운 곳에서 살기에 내 삶이 찌그렁뱅이가 될 턱이 없다고 느껴요.

 가장 좋다고 할 만한 일이 따로 있는지 잘 모르지만, 가장 좋다고 할 만한 일을 하며 지낸대서 내 삶이 가장 좋을 수 있으리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둘째로 좋거나 셋째로 좋다는 일을 하기에 내 삶이 덜 좋을 수 있다고 느끼지 않으며, 막째로 좋은 일을 하니 때문에 내 삶이 꾀죄죄하거나 볼품없을 수 없다고 느껴요.

 어디에서도 내 삶입니다. 어떤 일이어도 내 나날이에요.

 주어진 삶을 고스란히 겪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주어졌기에 마냥 받아들여야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내 삶은 주어진 삶이 아니라, 사랑이 열매를 맺어 태어난 삶이거든요. 하늘에서 톡 떨어진 삶이 아니라, 고운 사랑이 따사로이 만나 태어난 삶이니까요.


- 서울의 그 경찰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나를 2000명의 친구들이 있는 그 미국식 고아원에 데려다줬으니 말이다. 친구도 생겼고 배가 고프면 먹을 수 있었다. (18쪽)
- 홀트 할머니에 대해, 감사를 해야 할지, 미워해야 할지, 지금도 모르겠다.  세계로 흩어져 입양된 한국 아이들이 20만 명이나 된다. 너무 많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홀트 할머니께 감사하자. 만일 한국에 계속 남아 있었더라면 나는 분명히 군대에 강제징집됐을 것이다. 아니면 굶어죽었을지 모른다. (28∼29쪽)
- 의혹이 내 안에 자리잡았다. 대답 없는 질문들이 내 머릿속에 밀려들었다. 나는 누굴까? 왜 한국은 나를 버린 걸까? 왜 나는 백인이 아닌 거지? (91쪽)


 살아가는 뜻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내가 받은 사랑을 내 나름대로 얼마나 꽃피우면서 즐길 수 있는가입니다. 살아가는 길은 오직 한 갈래입니다. 내가 받은 사랑을 내 깜냥껏 얼마나 꽃피우면서 누릴 수 있느냐예요.

 나와 옆지기한테서 사랑을 받은 두 아이는 두 아이 나름대로 살아가겠지요. 두 어버이 사랑을 받는 두 아이는 두 아이 깜냥껏 꿈을 키우겠지요.

 어버이가 어리석게 길을 걸으면 아이들도 한동안 어리석은 길에 휘둘립니다. 어버이가 슬기로이 뜻을 나누면 아이들도 시나브로 슬기로이 뜻을 나눌 수 있겠지요.

 맑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는 어버이 곁에서 맑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이입니다. 활짝 웃는 얼굴로 손 흔드는 사람들 둘레에서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아이예요. 기쁘게 차린 밥상 앞에 기쁘게 앉는 아이입니다. 살며시 쓰다듬는 손길대로 살며시 쓰다듬는 손길을 동생한테 물려주는 아이예요.


- 프랑스가 (한국처럼) 똑같이 둘로 갈라진다면, 이산가족이 얼마나 나올까. 그리고 홀로 버려지는 아이들은 몇 명이나 될까? 하지만 프랑스는 한국이 아니다. 그렇게 쉽게 아이들을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입양한다. (23쪽)
- 거기서 멈췄더라면 괜찮았을 거다. 하지만 다음 말이 이어졌다. “양동이 속의 썩은 사과는 잘 자란 다른 사과도 썩게 만든다!” 더 명확하게 이런 말도 덧붙였다. “이제는 네가 ‘내 아이들’한테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다!” (86쪽)


 전정식 님이 그린 만화책 《피부색깔=꿀색》(길찾기,2008)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전정식 님은 프랑스말로 만화를 그리고, 남녘땅에서 살아가는 박정연 님이 한국말로 옮깁니다. 전정식 님은 맨 처음 한국말을 배우며 살았으나, 이내 프랑스말 쓰는 나라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프랑스말을 쓰는 나라에서 살아가며 한국말 쓰는 사람들 삶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기에 만화책 《피부색깔=꿀색》을 프랑스말로 그리고, 이 만화책이 한국말로 옮겨집니다.

 문득 생각해 봅니다. 전정식 님이 그린 만화는 어떤 만화 갈래에 넣어야 할까 궁금합니다. 전정식 님 만화는 한국 만화일까요, 벨기에 만화일까요. 전정식 님 작품은 한국 문화인가요, 세계 문화인가요.


- 프랑스어를 배워 가면서 한국말은 잊어버렸다. 이상하게도 새로운 언어를 배워 가던 이 시기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내가 정말 한국말을 했었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58쪽)
- 나는 하고 싶은 질문이 무척 많았다. 가령, 한국 정부가 세계 곳곳에 수천 명의 한국 아이들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것이 수치스럽지 않은지도 궁금했다. 그들(벨기에 유학생)의 의견이 궁금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보여준 선의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대답을 얻진 못했다. (223쪽)


 누군가는, 아니 내 곁에 있던 살가운 사람은 죽습니다. 나도 모르거나 나도 아는 어떤 슬픔과 아픔이 깊이 쌓인 끝에 죽습니다. 누군가는, 아니 내 곁에 살던 살가운 이웃이나 동무는 이곳에서 살든 저곳에서 살든 슬프거나 아픈 응어리가 쌓입니다. 누군가는, 아니 내 곁에서 마주하는 사람은 즐거이 한삶을 누립니다. 누군가는, 아니 내 곁에서 어우러지는 사람은 웃고 울며 떠들고 노래합니다.

 살아가는 터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살아가는 마음에 따라 삶이 거듭납니다. 살아가는 이웃에 따라 삶이 새롭습니다. 살아가는 사랑에 따라 삶이 빛납니다.

 좋아하는 꿈으로 좋아하는 삶을 일굴 수 있습니다. 괴로운 응어리로 고단한 삶을 보낼 수 있습니다. 아끼는 빛살을 가슴으로 포옥 감싸며 웃는 나날일 수 있습니다. 미움과 시샘으로 얼룩진 몸뚱이가 되어 퀘퀘한 쇠사슬일 수 있어요.


-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이모는 나더러 머리를 자기 무릎에 기대라고 했다. 물론 나는 마다하지 않았다. 너무 좋았다. 새로운 느낌이었다. 따뜻했다. 이모는 내게 손을 얹었다. 나는 그 행복의 순간을 만끽했다. (70∼71쪽)
- 만일 우리의 길이 교차하게 되어 있다면, 나는 엄마에게 걸맞게 의젓한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둘 중, 죄책감의 무게로 더 힘들었을 사람이 엄마일 테니까. 아주 오래 전부터 내 운명을 걱정해 왔을 사람이 바로 엄마니까. (149쪽)


 만화책 《피부색깔=꿀색》을 생각합니다. 만화책 《피부색깔=꿀색》은 한국에서 나라밖으로 보내진 아이들 삶을 다룹니다. ‘홀트 해외입양’에 따라 유럽 어느 나라로 보내진 아이가 어린 나날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한국땅에서 어머니를 잃거나 빼앗긴 아이들은 나라밖에서 새어머니를 찾으면 좋다 할 만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한국에서처럼 배를 곯거나 따돌림을 받거나 손가락질을 받지 않을 뿐더러, 학교에 갈 수 있고 놀잇감을 마음껏 얻을 수 있으며 군대에 끌려갈 일이 없는데다가 남녀차별에 시달리지 않아도 돼요.

 그러니까, ‘홀트 해외입양’은 참 좋은 제도이자 복지인지 모릅니다. 한국에서 입시지옥으로 앓아누울밖에 없는 모든 어린이와 푸름이를 나라밖으로 보내면 좋을는지 모릅니다.

 뭐하러 한국에서 ‘등록금 낮추기 운동’을 해야겠습니까. 뭐하러 한국에서 ‘4대강 막기 운동’을 해야겠습니까. 경제성장율이 얼마요, 세계경쟁력이 어떠하고 외치는 오늘날에도 한국 아기들은 유럽이나 미국으로 잘 팔립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한국 아기들을 귀엽게 바라보며 기꺼이 돈을 치러 받아들여 줍니다. 유럽으로 간 아기들은 한국에서처럼 무상급식이니 무어니 들볶일 까닭이 없어요. 유럽에서 어린 나날과 푸른 나날을 보낼 아이들은 대학교에 거저로 들어갈 뿐 아니라, 더 훌륭하고 아름다이 배울 수 있어요. 학원 뺑뺑이를 안 해도 됩니다. 참고서와 문제집에 억눌리지 않아도 됩니다. 푸른 나날을 교육방송 들여다보느라 흘려보내지 않아도 돼요.


-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최악은 내가 왜 불행한지 이유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식으로 음식을 먹으면 아플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한 걸음 물러서 생각해 보면, 무의식적으로 내가 죽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입양아 유리는 훨씬 빠른 길(권총 자살)을 택했다. 역시 입양아인 유리의 누나는 마약 과용으로 죽었다. 다리가 짧았던 입양아 브뤼노는 목을 매달았다. 입양된 내 누이 발레리는 알 수 없는 자동차 사고 이후 죽었다. 입양아 안느는 혈관을 끊어서 죽었다. (254∼255쪽)


 사랑을 꽃피우는 꿈이면 넉넉합니다. 하루에 한 끼니를 굶든, 옷 한두 벌로 살아간다 하든, 조그마한 집 작은 방 한 칸에서 지내야 하든, 사랑을 꽃피우는 꿈이 있을 때에는 거리끼지 않습니다. 밥하는 일꾼을 따로 두든, 예쁜 옷을 마음껏 장만할 수 있든, 널찍한 집에서 신나게 뛰놀 수 있든, 사랑을 꽃피우는 꿈이 없을 때에는 언제나 어둠이 깃듭니다.

 밥을 먹으며 목숨을 잇는 사람인데, 밥이란 목숨으로 이루어집니다. 화학조합물이나 화학방정식 아닌 목숨인 밥입니다. 고스란히 목숨인 밥이에요. 사람들 목숨을 잇는 밥은 사랑으로 지어요. 밥솥에 안치든 냄비에 안치든, 밥은 목숨을 살찌우는 목숨이에요. 사랑은 목숨으로 살아숨쉬어요. 사랑은 목숨이 깃들기에 빛나요. 사랑은 목숨과 목숨을 잇는 징검돌이에요. 사랑은 온 목숨을 예쁘게 보듬는 착한 손길이에요.

 전정식 님이 벨기에로 보내지지 않고 한국에 남았을 때에도 만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전정식 님이 한국에 남아 홀로 살아남으면서 만화를 그리는 어른으로 자랐을는지 곱씹어 봅니다. 아마, 전정식 님은 한국에서 지냈더라도 만화를 좋아하며 삶으로 받아들였겠지요. 한국에서 지내는 모든 이야기를 꾸밈없이 털어놓으며 꿈과 사랑을 길어올리는 만화를 그렸겠지요.

 벨기에로 보내지는 삶이라 할 때에도, 스스로 아파하면서 찬찬히 받아들였기에 이러한 삶을 그대로 만화에 담을 수 있겠지요. 아픔은 아픔대로 내 삶을 살찌우는 밥이거든요. 슬픔은 슬픔대로 내 삶을 북돋우는 벗이거든요. 기쁨은 기쁨대로 내 삶을 이루는 노래예요. 즐거움은 즐거움대로 내 삶을 빛내는 그림이에요.

 만화책 《피부색깔=꿀색》은 ‘해외입양’을 꼬집지 않습니다. 만화책 《피부색깔=꿀색》은 벨기에나 프랑스나 유럽 나라가 멋지거나 앞선 나라라며 추켜세우지 않습니다. 만화책 《피부색깔=꿀색》은 착하게 살아가려는 예쁜 사랑을 나누고픈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모든 길은 하나예요. 모든 꿈은 하나예요. 모든 삶 또한 하나예요. 사랑이 꽃피우는 터 하나예요. 사랑을 먹으면서 사랑을 낳는 보금자리 하나예요. (4344.11.5.흙.ㅎㄲㅅㄱ)


― 피부색깔=꿀색 (전정식 그림,박정연 옮김,길찾기 펴냄,2008.1.15./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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