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ungwoo Chun : Versus - 천경우 작품집
천경우 지음 / 이안북스(IANNBOOKS)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사진이 되기, 예술이 되기, 이야기가 되기
 [찾아 읽는 사진책 48] 천경우, 《Photographs》(IANN,2011)


 마을 이장님 댁에서 하룻밤을 지냅니다. 우리 네 식구는 충청북도 멧골자락 작은 집을 떠나 전라남도 고흥군 시골마을 작은 집으로 옮기기로 합니다. 마땅한 빈집과 빈터를 찾는 동안 마을 이장님이 도와줍니다. 가을걷이를 하는 바쁜 때이지만 저녁나절 짬을 내어 도와주시고, 저녁밥과 잠자리까지 내어줍니다.

 새벽 네 시 십오 분에 잠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짙게 드리운 구름을 올려다봅니다. 시골고양이 여러 마리가 고샅길을 조용히 거닙니다. 따로 고양이를 키우는 집은 없으나 고양이가 이렇게 마을 한식구로 지낸다고 합니다. 마을에 쥐가 없답니다.

 한창 가을걷이를 하고, 온 길바닥에 나락을 넙니다. 드나드는 자동차란 군내버스 말고는 거의 없기에 찻길은 차 한 대 지나다닐 자리를 빼고는 온통 나락누리입니다. 막 거둔 노란 나락으로 예쁜 노란누리를 펼칩니다. 노란 빛깔 흙내음이 물씬 퍼집니다. 내가 선 동백마을이나 이웃 신기마을이나 봉서마을이나 봉동마을이나 한결같이 나락내음과 흙내음입니다. 부디 나락베기와 나락말리기가 다 끝날 때까지 빗방울이 들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나락을 벤 자리는 벼포기만 몽땅하게 남습니다. 벤 벼포기는 네모낳게 말아 주는 기계가 척척 네모반듯한 덩이를 내놓기도 하고, 흙일꾼 할매와 할배가 집집마다 다른 모양새로 짚뭇을 삼기도 합니다. 사진을 찍는 분 가운데에는 이 짚뭇 모습이 재미있다 여겨 온나라 다 다른 짚뭇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다니기도 합니다. 한 마을 짚뭇만 보더라도 얼마든지 다 다르고,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마다 햇살에 따라 느낌과 모양과 빛깔이 다릅니다. 온나라 짚뭇을 들여다보려 한다면 수만 수십만 짚뭇에다가 때와 철과 날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릴 테지요.

 새벽 네 시 반, 마당에 있는 물꼭지로 낯을 씻고 머리를 감습니다. 기지개를 켜고 마당을 휘 둘러봅니다. 달은 구름에 가리고, 마을 고샅 여기저기에 걸린 작은 등불이 내는 빛을 받은 바지랑대와 빨랫줄에 하얀 빛가루가 내려앉습니다. 달빛가루만큼은 아니지만 달빛가루와는 또 다르게 고즈넉하면서 눈부시며 어여쁜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집 즐거이 마련할 수 있으면 우리 집에는 어떻게 빨랫줄을 잇고 바지랑대를 걸칠까 하고 꿈을 꿉니다. 충청북도 멧골자락은 아침저녁으로 퍽 서늘해 풀벌레소리 일찌감치 잠들었으나, 전라남도 시골자락은 아침저녁에도 풀벌레소리 가늘게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거의 모두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이 나라 사람 가운데 반쯤 되는 숫자는 서울과 서울 둘레 커다란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전남 고흥이 고향이지만 서울에서 일자리를 얻어 회사를 다니는 이가 퍽 많습니다. 해남이, 강진이, 보성이, 순천이, 화순이, 담양이, 나주가, 구례가, 곡성이, 남원이, …… 고향이지만, 이 고향을 등지고 커다란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 한 자리를 얻어 돈을 버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고흥이나 해남이나 강진이나 화순이 고향이요 당신 어버이가 예부터 흙을 일구고 살아가는데 당신은 서울이나 서울 둘레에서 사진찍기를 하면서 꿈이나 뜻을 펼치는 분이 있으리라 봅니다. 사진이라는 문화를 빛내고 사진이라는 예술을 살찌우며 사진이라는 열매를 거두자면, 시골마을에서는 할 수 없고 큰도시에 깃들어야 한다고 여길 만할 테니까요.

 사진삶을 일구려는 이들은 으레 서울로 모이고, 서울에서도 강남으로 모입니다. 으레 뉴욕이나 파리를 꿈꾸며, 때로는 베를린이나 도쿄를 찾습니다. 런던이나 산티아고로 발길을 옮기는 이도 있겠지요. 암스테르담이나 오슬로를 찾아가는 사람도 있을 테고요.

 사진빛을 보듬고자 고흥이나 통영이나 고성이나 문경이나 부여에서 살림집을 건사하면서 살아가는 이는 쉬 찾아보지 못합니다. 사진길을 걷고자 군산이나 김해나 밀양이나 상주나 홍천이나 횡성에서 뿌리를 내리며 마을 이웃을 사귀려는 이는 좀처럼 만나지 못합니다.

 사람이 찍는 사진이고, 사람을 찍는 사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찍는 사진이며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찍히는 사진입니다. 내 삶과 네 삶이 어우러지는 사진입니다. 내 꿈과 네 꿈이 어울리는 사진입니다. 내 사랑과 네 사랑이 하나되는 사진이에요.

 천경우 님 사진책 《Photographs》(IANN,2011)를 들여다봅니다. 뿌옇게 보이는 사진마다 어떤 이야기가 담겼을까 하고 가만히 헤아립니다. 천경우 님이나 다른 예술비평가가 적바림한 글을 읽지 않고서는 이 사진을 읽어낼 수 없을까 하고 곱씹습니다. 천경우 님은 당신 사진책 이름을 ‘Photographs’라고 붙이는데, 사진을 보여주는 사진이기에 사진책 이름이 이와 같은지, 사진은 사진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사진책 이름이 이러한지, 사진으로는 사진을 할 수밖에 없어서 사진책 이름을 이렇게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은 사람들과 함께하는가요. 사진은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나는가요. 사진은 사람이 빚어서 사람이 즐기거나 누리는가요.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르게 살아가며 다 달리 사진을 누립니다. 《Photographs》 또한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삶에 따라 태어난 다 다른 사진책 가운데 하나예요. 더 돋보이지 않으며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더 눈부시지 않으며 좀 어수룩하지 않습니다. 더 빛나지 않으며 썩 모자라지 않습니다. 그저 천경우 님 삶·넋·말만큼 길어올린 이야기가 담긴 사진책 하나입니다.

 내가 대학교 사진학과를 다녔다면, 내가 나라밖에서 사진을 배웠다면, 내가 내 사진을 ‘사진 주류한테든 비주류한테든 알리려고 서울에서 사진잔치를 연 적이 있다’면, 내가 내 사진을 서울에 있는 미술관이나 전시관이나 박물관에 팔았다면, 내가 내 사진을 나라밖으로 알리려고 힘썼다면, 나도 천경우 님처럼 사진을 했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대학교를 다니지 않았고, 사진강의를 듣지 않았으며, 나라밖 사진잔치를 열지 않았습니다. 오직 내가 살아가는 작은 골목동네와 시골마을에서 사진잔치를 조그맣게 엽니다. 내가 찍은 내 사진은 나한테 사진으로 찍힌 이들한테 나누어 줍니다. 나는 내가 찍은 사진을 챙기거나 간직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사진은 예술이 되어야 하나요. 사진에는 어떠한 이야기를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삶을 일구면서 담아야 하는가요.

 나는 내 삶이 좋습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합니다. 나는 내 삶에 따라 내 사진을 누립니다. 이제 곧 동이 트겠군요. (4344.10.13.나무.ㅎㄲㅅㄱ) 



― Photographs (천경우 사진,IANN 펴냄,2011.6.10./2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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