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철 책읽기


 동백마을 이장님 댁에서 이틀째 묵는다. 새벽 세 시에 “비가 오네. 들깨 덮어야겠소.” 하는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깬다. 이장님과 아주머님 두 분이 일어나서 바깥으로 바삐 나가신다. 나도 퍼뜩 일어나서 뒤따른다. 오는지 마는지 소리조차 없는 듯한 실비가 조금 내린다. 말리려고 널어 놓은 들깨를 셋이 함께 덮는다. 엊저녁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는데 비가 오기는 온다.

 어제 도화면 지죽리까지 돌아보고 돌아오는 길, 동호덕마을 할배와 할매 두 분이 햇볕에 말린 나락을 푸대에 다시 담아 경운기에 싣는 모습을 본다. 세 시간 남짓 자전거를 몰았기에 다리가 많이 지쳤지만, 할배와 할매를 스친 자전거머리를 돌린다. 경운기 뒤쪽에 자전거를 세운다. “경운기에 실으시지요? 제가 거들게요.” 할배하고 둘이서 나락푸대를 경운기에 싣는다. 할배는 일흔은 훌쩍 넘으신 듯한데 기운을 퍽 잘 쓰신다. 할배가 이만큼 기운을 쓰지 못한다면 경운기에 나락푸대를 실을 수도 없을 테지만, 경운기에 실어 댁으로 돌아간 다음 갈무리하지도 못할 테지. 아니, 나락논을 돌보려면 기운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흥군 도화면 신호리 동백마을뿐 아니라 이웃마을 모두, 시골마을 어디나 가을걷이철이 되어 몹시 바쁘다. 나도 새 보금자리 찾으러 다니느라 바쁘다 할 만하지만, 요 며칠은 집임자하고 계약을 한다며 집임자가 언제 오나 기다리기만 했다. 집임자는 끝내 시골집까지 안 오고 전화로만 이야기한다. 한 번 떠난 고향마을에는 다시 찾아오고 싶지 않을까. 당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흙으로 돌아가 없는 고향마을에는 어쩐지 다시 찾아올 만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도시에서 해야 하는 일이 몹시 바쁘며 빠듯하기 때문에 쉽사리 찾아들 수 없을까.

 도시에서 학원 강사 노릇을 하는 옆지기 동생은 강사 노릇뿐 아니라 다른 공부까지 하느라 언제나 밤이 깊을 무렵 집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옆지기 동생만 이러하지는 않다고 느낀다.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거나 배움자리를 찾아다니는 누구나 새벽 일찍 집을 나설 테고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겠지. 나는 인천에서 살던 때, 인천에서 서울로 일하러 가느라 새벽 아주 일찍 부산을 떨어 지옥철을 탔다가, 저녁에 파김치가 된 몸으로 오징어떡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참 많이 보았다. 이들 도시내기 회사원과 공무원한테 가을이 있으려나. 가을걷이가 있으려나. 가을걷이로 바쁜 흙일꾼 비지땀을 느낄 가슴이 있으려나.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로 떠난 다음 도시에서 튼튼히 뿌리를 내린 딸아들은 시골마을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해마다 가을이면 부지깽이한테조차 일을 거들라 할 만큼 힘에 부치고 바쁜 줄 느낄 겨를이 있을까 궁금하다. 이 바쁜 틈에 마을 이장님네 아주머니는 손자한테 보내준다고 잘 익은 단감을 따서 갈무리하고 김치를 함께 싸서 서울로 보낸다. 나는 옆에서 감 갈무리를 조금 거들고는 감알 셋 얻는다. 다쳐서 보내지 않고 이곳에서 먹을 감알 가운데 셋을 골랐더니, 이잠님네 아주머니는 서울로 보내려던 예쁜 감알을 셋 골라 얹어 주신다. 옆지기와 두 아이 몫으로 두 알씩 생긴다.

 가을은 책을 읽는 철일 수 있을 테지만, 먼저 가을걷이를 하고 나서 책을 읽는 철이 된다. 가을걷이를 모두 마치고서야 비로소 종이책을 읽는 철이 된다. 가을걷이가 있기에 책이 있고, 가을걷이를 하는 사람들은 온몸에 나락내음과 풀내음과 흙내음이 짙게 배는 책읽기를 한다. (4344.10.1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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