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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새 5
데즈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삶과 죽음은 모두 똑같은 이야기
[만화책 즐겨읽기 71] 데즈카 오사무, 《불새 5》
한 사람으로서 어버이한테서 목숨을 선물받아 살아가는 뜻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합니다.
내가 한 사람으로 태어난 이야기라든지, 어버이한테서 목숨을 선물받은 이야기라든지, 살아가는 뜻이라든지, 따로 학교나 교과서나 책에서 들은 적은 없습니다. 학교는 한 사람 삶이나 넋이나 말을 가르치는 곳이 못 됩니다. 교과서는 한 사람 꿈이나 얼이나 마음을 가르치는 스승이 못 됩니다. 책은 살아숨쉬는 슬기를 그러모아 뒷사람한테 물려주는 사랑이 못 되곤 합니다.
한 사람으로서 태어난 까닭은 회사원이 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어버이한테서 목숨을 선물받은 까닭은 ‘나라 안팎에 이름난’ 대학교에 들어가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내 한삶을 사랑하며 하루하루 맞아들이는 까닭은 부동산이 될 만하면서 퍽 넓은 아파트를 장만하거나 꽤 값나가며 멋들어진 자가용을 마련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연봉이나 명함이나 학벌이나 몸매나 재산이 한 사람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명예나 훈장이나 권력이나 지위가 한 사람을 밝힐 수 없습니다.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하더라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법관 같은 이름은 고이고이 남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물려주거나 물려받으면서 남는 이름이란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나눈 사랑’으로 살아낸 사람들 이름과 넋과 꿈과 말과 삶입니다.
- “난 벌써 사람을 몇이나 죽였어. 더는 겁날 게 없다구. 나도 갓 태어났을 때는 사지육신이 멀쩡했어. 그런데 처음 세상에 태어난 날 이런 몸뚱이가 되고 만 거야 … 난 멀쩡한 두 팔을 가진 녀석들을 보면 울화가 치밀어.” (25, 27쪽)
- “이제 내 인생은 끝났어! 난 이제 죽을 때까지 내 손으로 훌륭한 작품을 조각할 수 없게 됐어!” “하지만 왼손이 아직 남아 있지 않나.” “왼손? 그게 어쨌다는 거죠? 혼이 담긴 조각을 만들려면 왼손만으로는 어림없어요!” (31쪽)
사람들은 날마다 밥을 먹습니다. 날마다 밥을 먹는 사람들치고 내가 먹는 밥을 일군 흙일꾼 이름을 아는 이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꽤 자주 고기를 먹습니다. 물고기이든 뭍고기이든 참 쉽고 값싸게 장만해서 먹습니다. 고기를 꽤 자주 먹는 사람들이나, 이 고기를 누가 거두고 누가 마련하며 누가 이루는가를 아는 이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늘 옷을 걸칩니다. 언제나 옷을 입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실을 잣고 물레를 돌리거나 베틀을 밟아 천을 얻는 사람은 없다 할 만하고, 돈을 주고 옷을 사입더라도 이 옷을 누가 마름하여 만드는가를 아는 이는 없다 할 만합니다.
사람들은 집이 있어 잠을 자거나 쉽니다. 집 없이 떠돌거나 맴돌며 한뎃잠을 자면 몸이 무너지거나 망가집니다. 푸른 들과 멧자락이 아닌 시멘트바닥이나 아스팔트바닥에서 한뎃잠을 잘 때에는 누구나 몸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멘트로 집을 짓고 아스팔트로 길을 냅니다. 흙으로 집을 짓지 않고 흙으로 길을 닦지 않습니다. 모든 목숨이 흙에서 비롯하지만, 사람들은 흙을 멀리하거나 흙을 괴롭히면서 도시 물질문명을 이룹니다.
- “그럼 넌 대체 누구야?” “난, 언젠가 당신이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에요.” “목숨을?” “헛소리! 내가 널 어디에서 만났지? 난 전혀 생각이 안 나.” “당신은 살며시 날 들어올려 목숨을 구해 줬어요. 당신은 살인자에 난폭하긴 하지만 날 죽이지 않았죠. 사실은 당신이 마음씨 착한 사람이란 걸 알고. 난 기뻤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시집갔던 거예요.” (70쪽)
우리 집 두 아이는 집에서 제 어버이와 함께 살아갑니다. 네 살 첫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안 넣었으니 첫째는 마냥 집에서 놀고, 갓난쟁이 둘째 또한 집에서 두 어버이가 돌보는 손길을 맞아들이면서 하루하루 씩씩하게 큽니다. 이제 넉 달째 살아낸 둘째는 어제 비로소 뒤집기를 합니다. 아버지는 둘째를 집에서 보살피며 살아가기에 둘째가 뒤집기를 할 때에 말끄러미 바라보았고, 이내 거듭거듭 뒤집기를 하면서 입을 쩍쩍 벌리며 좋아라 하는 모습을 아낌없이 사진으로 담습니다.
나는 흙을 일구며 살아가지는 못하지만, 집에서 글을 쓰며 살아가기에 집살림을 건사하면서 아이들하고 부대낍니다.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모든 모습을 고스란히 받아들입니다. 하루 내내 아이들하고 살을 부비고, 하루 내내 아이들을 안고 어르며 놉니다. 아이들 먹을 밥을 차리고, 아이들을 씻기며, 아이들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우리 살림이 가난하니까 아이들 보살피는 몫을 집에서 모두 치른다 할 테지만, 두 어버이가 사랑으로 낳은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는 일을 다른 누구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학교나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에 맡길 수 없습니다. 한글교재나 영어교재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자가용이나 텔레비전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어버이 두 손에 맡깁니다. 어버이 가슴에 맡깁니다. 어버이 마음밭에 맡깁니다.
옆지기는 옆지기 어머님이 마련한 밥을 먹으면서 사랑을 느낍니다. 나 또한 내 어머니가 마련한 밥을 먹고 자라면서 사랑을 느꼈습니다. 이 나라 서울시는 무상급식을 놓고 주민투표까지 벌이는데, 아이들이 학교에서 먹는 낮밥은 ‘무상급식으로 하느냐 마느냐’로 따져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사랑을 느끼며 밥을 맞아들이도록 하느냐 아니냐를 따져야 합니다. 아이들은 영양소 아닌 사랑을 먹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사랑이 감도는 좋은 밥을 먹어야지, 이런저런 숫자로 어림한 영양소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 사랑과 어른 사랑을 고루 받아먹으면서 마음씨를 착하게 북돋아야지, 시험성적 숫자에 목을 매달면서 어린 넋이나 푸른 얼을 망가뜨리면 안 돼요.
- “죽은 자를 위해 경문이라도 읽어 주시지 그래요?” “어차피 돈도 안 될 텐데, 뭐.” “그, 그런 말이 어딨어요! 말도 안 돼! 그럼 스님이며 절은 무엇 때문에 있는 거죠?”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아. 나라에서 세운 절이 전국에 산재해 있고 훌륭한 대불들이 세워지지만, 그건 다 정치를 위해서야. 나랏님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도 잠자코 복종하게 만들기 위해, 불교를 널리 전파해 백성들을 속이고 있는 거지. 왜 그러지? 실망했느냐?” (117쪽)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 《불새》(학산문화사,2002)를 5권째 읽으며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은 모두 똑같은 이야기라고 들려주는 《불새》 5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은 똑같은데, 이 똑같은 삶과 죽음을 옳게 바라보는 어른은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요. 삶과 죽음은 하나인데, 이 하나인 삶과 죽음을 참다이 느끼는 어른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나요.
삶은 아름답고, 죽음 또한 아름답습니다. 삶은 사랑스럽고, 죽음 또한 사랑스럽습니다. 삶은 기쁘며, 죽음 또한 기쁩니다. 삶은 목숨이요, 죽음 또한 목숨입니다.
- “고, 고맙습니다. 스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어요.” “나보고 고맙대, 나보고. 나 같은 인간을 보고! 우하하하 우하하하 우히히히 으하하하.” (123쪽)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먹고산다 이야기하지만, 사람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먹고살 수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먹이를 거두도록 흙을 일구거나 푸나무를 아껴야 먹고살 수 있습니다. 회사나 관공서나 가게에서 일을 하며 벌어들이는 돈으로는 ‘숨을 잇기’는 하지만, 목숨을 아끼거나 사랑하면서 돌보지 못합니다. ‘나이를 먹을’ 수 있으나 삶을 일구거나 보살피지 못합니다.
오늘날 이 나라를 돌아보면, 사람들은 돈만 따집니다. 밥그릇 나이만 셉니다. 눈으로 바라보는 몸매에 얽매입니다. 오늘날 이 나라에서는 사랑과 꿈과 빛과 흙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살아숨쉬는 푸나무와 푸른바다와 파란하늘을 깨닫지 못합니다. 맑은 햇살이나 눈부신 달빛을 보듬지 못합니다.
삶을 삶다이 마주하면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죽음다이 껴안으면서 아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죽음은 삶으로 이어집니다. 한결같이 얼크러지는 삶과 죽음은 내 왼손과 내 오른손이듯, 아니 내 한몸으로 녹아드는 내 한마음이듯, 하루 열두 시간은 낮이요 하루 열두 시간은 밤입니다. 동이 트면서 모든 목숨이 눈을 뜨고, 어스름이 깔리면서 모든 목숨이 새근새근 잠듭니다. (4344.9.29.나무.ㅎㄲㅅㄱ)
― 불새 5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최윤정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2.3.25./4500원)